▲ 마초의 대명사 존 웨인. 서부와 2차 대전을 배경으로 강인한 할리우드 남자 캐릭터의 전형을 만들었다.
ⓒ WB
존 웨인은 할리우드 남자 스타의 원형 중 하나다. 영화 <다이 하드>에서 홀로 좌충우돌하는 브루스 윌리스에게 칭찬과 비난을 섞어 '네가 무슨 존 웨인이냐'라고 이르듯, 존 웨인은 강한 남성의 상징이다. 서부극의 카우보이나 기병대 대장, 전쟁영화에서 특히 일본군을 때려잡는 영웅이 그의 몫이었다.

할리우드에 깊은 흔적을 남긴 존 웨인이 이번엔 의학계에 이름을 남겼다. 지난 8월 미국 하버드 의대의 하비 사이먼 교수는 <뉴스위크>에 '오래 살고 싶은 남성은 존 웨인 증후군에서 벗어나라'고 조언했다.

'존 웨인 증후군'이란 '남자는 강해야 한다'는 마초 근성 때문에 아픈 것을 인정하지 않거나 숨기려 들어 병을 키우는 경향이라고 한다.

존 웨인은 존 웨인 증후군으로 단명했을까? 일흔 넘게 장수했으니 마초의 힘을 보여 준 것 같지만 속사정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말년의 존 웨인은 15년 가까이 암 투병으로 고생했는데 폐암으로 시작해 위암, 장암으로 퍼져나가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고 한다.

조금 아플 때 병원 가지 않고 센 척 하다가 생긴 '존 웨인 증후군' 같지만, 일본인 반핵운동가 히로세 다카시는 존 웨인을 죽인 범인은 따로 있다고 주장한다. 존 웨인이 할리우드 캐릭터로 충성했던 바로 그 미국 정부가 존 웨인을 죽였다는 얘기다.

▲ 일본의 반핵 운동가 히로세 다카시는 네바다 사막의 핵 실험이 존 웨인을 죽였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최근에도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 푸른산
1945년 미국은 일본에 핵폭탄을 투하한다. 핵폭탄은 원래 나치 독일이 개발하던 무기였지만 미국이 최초로 전력화에 성공했다. 이는 미국이 2차 대전 후 세계질서 재편을 주도하는 데 중요한 힘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1949년 소련이 핵 실험에 성공하면서, 핵을 독점하던 미국의 '좋은 시절'은 끝난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핵 실험 경쟁에 돌입한다.

특히 미국은 1951년부터 1958년 사이에 알려진 것만 모두 97회에 이르는 핵 실험을 네바다 사막에서 진행한다.

이 시기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버섯구름이 피어오르는 곳 부근에서 별다른 보호 장비 없이 실험을 관측하는 군인이나 민간인들이 보인다.

핵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었든, 실험을 위한 의도적인 배치였든 간에 이 과정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방사능에 노출된다.

암으로 고생한 <칭기스칸> 남여주인공, '엑스트라' 인디언 부족 멸종... 이유는?

1975년 네바다 핵실험에 참가했던 미 육군 출신 폴 쿠퍼는 자신이 백혈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당시 핵실험에 참가한 퇴역 군인들이 유독 백혈병이나 암에 많이 걸렸음을 알게 된 쿠퍼는 조사를 벌여 정부의 책임을 폭로한다.

핵실험 과정에서 방사능에 노출된 병사들과 기술자들을 가리켜 '아토믹 솔저(Atomic Soldier)'라 부르게 되었는데, 1963년 핵실험 금지조약에 이르기까지 그 숫자만 25~38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 소련과의 경쟁에서 앞서야 한다는 강박관념과 방사능에 대한 무지 또는 고의로 실험 결과를 얻기 위해 수많은 군인과 기술자들이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 US DOD
폴 쿠퍼가 별다른 주의사항도 듣지 못하고 핵실험에 노출되고 있을 때, 1954년 존 웨인은 네바다 사막에서 영화 <정복자>를 찍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칭기스칸>으로 알려진 이 영화에서 존 웨인은 칭기스칸 역을 맡았다.

존 웨인이 칭기스칸이라니. 좀 엉뚱하게도 느껴지겠지만, 태평양 전쟁 영화도 스튜디오에 모래를 부어 만든 섬 세트에서 찍던 시절이니 네바다 사막이 몽골이 되고 인디언들이 몽골군 역을 맡았더라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 존 웨인이 칭기스칸으로 등장한 1956년작 <정복자>. 남녀 주연 배우를 비롯해서 이 영화에 참여한 많은 이들이 암으로 쓰러지는 비극을 겪는다.
ⓒ RKO
어쨌든 존 웨인은 칭기스칸이 되어 네바다 사막에서 열연을 펼치고 있었다. 촬영지는 핵실험 장소에서 가까웠고, 정확한 자료가 아직도 공개되지 않고 있지만 관련자 증언에 따르면 촬영 기간에도 핵실험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음모이론 진영에서는 핵실험 차원에서 영화 촬영진 역시 고의로 방사능에 노출시켰다고도 주장하지만, 차마 그랬을 거라 믿고 싶지는 않다. 물론 1946년 비키니 섬 핵실험 때 방사능의 위험을 알고도 불과 30km 거리에 병력을 배치했던 미국이긴 하지만 말이다.

<정복자> 출연자들 중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난 것은 존 웨인만이 아니다. 여주인공을 맡았던 수잔 헤이워드 역시 피부암, 유방암, 자궁암, 뇌종양 등으로 10년 가까이 고통 받다가 1975년 사망했다. 다른 출연자들과 제작진들도 같은 시기 평균에 비해 암 발병 비율이 높았고,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시브위트족 인디언들은 당시 미국 원주민들에겐 흔하지 않았던 암과 백혈병 때문에 부족 자체가 멸종되었다.

히로세 다카시는 <정복자> 출연자들에 대한 추적 조사를 바탕으로 <누가 존 웨인을 죽였는가>라는 책을 내놓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미국 정부와 할리우드는 네바다 핵실험이 할리우드 스타들을 고통스런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주장에 대해 근거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그렇지만 갑작스런 폐암으로 세상을 떠난 스티븐 맥퀸 역시 핵실험 피해자로 의심받는 것처럼, 같은 시기 네바다 사막에서 촬영했던 배우와 제작진들이 유독 암에 고통 받은 것만은 사실이다.

1977년에 처음 만들어지고 2006년에 리메이크된 <힐스 아이즈>는 B급 공포영화의 정서로 미국 핵실험을 기억하고 있다. 사막을 지나던 어느 가족은 길을 잘못 찾아 과거에 핵실험을 한 지역으로 들어선다. 그곳에는 돌연변이가 되어버린 주민들이 하나의 부족을 이루며 살고 있다.

영화는 주인공 가족을 제물로 삼으려는 돌연변이들을 내세운 공포물이지만, 어떤 이들은 평범한 미국 가족이 돌연변이들을 만나는 상황을 미국 시민들이 모르고 있던 핵 실험의 어두운 측면과 맞닥뜨리는 비유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 1975년 이후 '아토믹 솔저'들의 이야기가 폭로되자 할리우드도 1977년 B급 공포물의 대가 웨스 크레이븐의 <힐스 아이즈>로 관심을 드러낸다. <힐스 아이즈>는 1985년 속편이 나왔고 2006년엔 리메이크되었다.
ⓒ BRC

덧붙이는 글 | 2006년 한반도는 핵실험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100% 안전한 핵실험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어떤 핵실험도 100% 안전한 적은 없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방사능의 악영향이 체르노빌처럼 바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영화 <정복자> 배우와 제작진이 겪었던 것처럼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은 네바다 사막의 촬영과 핵실험의 상관 관계에서 개연성은 인정되지만 확증은 없는 가설입니다. 그렇지만 음모이론의 하나로 치부하기엔 특정 시기, 특정 영화의 출연진과 제작진들만 다발성 암에 걸려 쓰러진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이런 핵실험을 하다니 역시 미국 놈들은 극악하다'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나마 정보가 공개되는 미국이 이 정도라면 핵을 손에 넣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새롭게 핵을 갖는 나라들은 그 과정에서 생긴 문제를 감추는 것이 일반적이고, 핵이라는 민감한 영역은 정보 통제가 매우 심하기 마련이니까요.

2006-11-23 12:14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2006년 한반도는 핵실험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북한에서는 100% 안전한 핵실험을 했다고 주장했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한 어떤 핵실험도 100% 안전한 적은 없었습니다. 무서운 것은, 방사능의 악영향이 체르노빌처럼 바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영화 <정복자> 배우와 제작진이 겪었던 것처럼 수십 년에 걸쳐 나타나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히로세 다카시의 주장은 네바다 사막의 촬영과 핵실험의 상관 관계에서 개연성은 인정되지만 확증은 없는 가설입니다. 그렇지만 음모이론의 하나로 치부하기엔 특정 시기, 특정 영화의 출연진과 제작진들만 다발성 암에 걸려 쓰러진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이런 핵실험을 하다니 역시 미국 놈들은 극악하다'고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나마 정보가 공개되는 미국이 이 정도라면 핵을 손에 넣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새롭게 핵을 갖는 나라들은 그 과정에서 생긴 문제를 감추는 것이 일반적이고, 핵이라는 민감한 영역은 정보 통제가 매우 심하기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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