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챔프>(1979)
ⓒ MGM
기록에는 1979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내겐 그저 '어렸을 때'로 기억된다. 정확하게 몇 살이었다거나 몇 학년이었다는 식으로 좁히기 어려운데 온 가족이 영화 나들이를 갔던 주말에 사람 무지 많던 극장에서 2회를 기다리던 것만큼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아마도 중앙극장 아니면 스카라 극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1회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이 죄다 눈시울이 벌건 것이 펑펑 울고들 나온 눈치였다. 뭐 영화 한 편 보고 울 것까지야 하고 극장엘 들어섰는데 우리 역시 3회를 끊고 기다리던 사람들에게 퉁퉁 부은 눈을 보여주고 말았다. 너도 울고 나도 울었던 그 영화가 바로 <챔프>(1979)였다. 방탕한 생활로 챔피언 자리와 가정을 잃어버린 권투 선수가 어린 아들에게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다시 링에 오른다. 처절한 혈투 끝에 끝내 죽음에 이르는 권투 선수. 어린 아들이 옆에서 "일어나 챔프!"를 외칠 때 말릴 새도 없이 눈물이 줄줄 흘러 나왔다. 항간에 떠도는 말로는 미국에서 울지 않는 우울증 환자 진단용으로 이 영화가 쓰였을 정도라고 한다. 영화 <챔프>에는 두 가지 중요한 검색어가 등장한다. 바로 '아버지'와 '권투'다. 할리우드가 미국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영화로 표현할 때 충성의 대상은 국가나 대통령이 아니라 가족이다. 가족을 위해 싸우는 것은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가치이며, 가족을 위협하는 적에 맞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할리우드에서 영웅들은 대개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들이며 할리우드에서 주류 배우가 되려면 가족을 지키는 아버지 역할은 필수다. 주류배우가 되려면 '가족 지키는 아버지' 역할을 필수
 <록키>(1976)
ⓒ UA
<다이 하드>의 브루스 윌리스는 별거 중인 아빠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 단지 가족을 위해 싸운 결과로 흉악한 테러범을 분쇄하지만 말이다. <패트리어트 게임>의 해리슨 포드 역시 국가가 부를 때는 꿈적도 않다가 가족이 위험해지자 미련 없이 CIA로 돌아간다. <패트리어트>에서 독립전쟁 참전을 사양했던 멜 깁슨 역시 자기 아들이 위험에 빠지자 도끼를 들고 나선다. 가족을 위해 싸우는 아버지에게 사각의 링처럼 어울리는 곳도 없다. 권투는 미국에서 시작된 스포츠는 아니지만 미국에서 화려하게 꽃피웠고 전성기를 누렸다. 미 육군 사관학교는 권투를 필수로 가르치는데 싸우는 방법이 아니라 맞는 방법을 가르치기 위해서이며 이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는 것이 목적이라고 한다. 프로 권투 선수로 데뷔한 정두홍 무술감독도 고백한 것처럼 사각의 링에서 여러 라운드를 버티며 상대방의 주먹을 견디는 것은 체력이나 맷집 이상을 요구하는 두렵고 힘든 일이다. 바로 이 링에 아버지가 오른다. 쉽게 말하면 돈 때문이겠지만 바로 그 돈은 가족을 지키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화 <데드 프레지던트>에서 부하직원 아내에게 집적거리러 들린 나이든 사장은 간만에 생긴 돈으로 봉투 가득 먹을 것을 사들고 집에 가는 주인공에게 "가족을 위해 뭘 잔뜩 사가지고 가면 정말 남자가 된 기분이지"하고 이죽거리는데 그 분위기는 재수 없었지만 그 말에는 많은 남자들이 공감할 것이다.
 <성난 황소>(1980)
ⓒ UA
<챔프>의 아버지는 돈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는데 모두가 다 퇴물 복서라 비웃을 때 우리 아빠는 챔피언이라며 눈을 반짝이던 아들을 위해서였다. 솔직히 한물 간 복서가 파릇파릇한 현역을 상대로 링에 오르는 것은 허세요 과용이고 자살 행위였지만 "우리 아빠 최고!"하는 자식 앞에서만은 (비록 언젠가는 들통 나겠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정말 최고로 보이고 싶은 마음을 우리가 왜 모르겠는가. 예전에 가게에서 일할 때 사장님이 직원 하나 무지하게 야단치고 있다가 직원 아내와 딸이 나타나자 갑자기 태도를 바꿔 칭찬 일변도로 나갔던 기억이 있다. 처녀 총각 직원들은 이중적이다 가증스럽다 뭐 그랬지만 당사자를 비롯한 유부남들은 가족 앞에서만은 체면 살려주는 사장님이 나쁘지는 않았다. 솔직히 대부분의 아빠들은 장기판의 졸 신세지만 자기 자식 앞에서만은 왕은 아니더라도 차나 마 정도로는 비치고 싶은 마음이리라. 퇴물 복서...아들을 위해 링에 오르다
 <알리>(2001)
ⓒ Columbia
영화 <록키>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이라면 멋지게 계단을 뛰어 오르는 전설의 스테디캠 장면이나 링 위의 혈투가 아니라 퉁퉁 부은 눈으로 '애드리안'을 애타게 찾던 바로 그 모습이다. 링 위에서 죽기 직전까지 맞아도 등 돌리지 않고 센 척 하던 사내들도 사랑하는 여인에게 안기고 싶고 아들 딸 재롱에 무너지는 약한 면을 가진, 어쩌면 연약함 그 자체인 존재들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러기에 아빠들은 죽더라도 링 위에서 죽겠다고 나서곤 한다. 직장 일에 치이면 사람 좋던 아빠도 지쳐 애꿎은 가족에게 벌컥 화를 내버리게 되는 것처럼 사각의 링은 사내들의 폭력성을 끌어내는 탓에 아버지를 가족과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영화 <성난 황소>의 주인공은 링에서는 승리하지만 점점 폭력에 물들어 가면서 끝내 동생과 아내에게 주먹을 휘두르며 파멸로 치닫게 된다. 영화 <알리>는 사각의 링을 지배할 능력을 가진 사내가 오히려 그 막강한 능력 때문에 세상에서 고립되고 가족과 멀어지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실화에서나 영화에서나 아름다운 '복서'는 <신데렐라 맨>에서 만날 수 있다. 1930년대 경제 대공황시대를 배경으로 가족을 위해 다시 링에 오르는 무명 복서는 자기보다 덩치도 크고 주먹도 강한 복서들을 눕혀 나간다. 러셀 크로우가 연기했던 짐 브래독은 링 위의 적보다 가난이 더 큰 적이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헝그리 복서라 불렀는데 생활고에 지친 당시 서민들은 자기들 중 하나인 그를 응원하며 시름을 잊었다. 밤 12시 다되어 지하철을 내리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함께 내리는 것을 보게 된다. 대부분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어머니들인데 다음날 새벽 출근길에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얼굴들이다. 꼭 링에 올라 살인 주먹과 맞서는 게 아니더라도 이 시대를 사는 대부분의 아빠 엄마들은 자식을 위해서 뭐든 마다하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을 것이다. 링에 올라설 각오가 없어서도 아니고, 링에서 매 맞는 품삯이 값싸서도 아니고, 링에 오를 기회조차 꽉꽉 막혀 있는 것이 요즘 대한민국 아빠들의 '주먹이 우는' 답답한 사연이겠지만.
 <신데렐라 맨>(2005)으로 영화화 된 대공화 시대의 '헝그리 복서' 제임스 브래독.
ⓒ Universal

덧붙이는 글 최근 <오마이뉴스>에 프라이드에서 효도르에게 패한 마크 콜먼이 딸들을 링 위로 불러 아빠는 괜찮단다 했다는 기사를 보고 영화 <챔프>를 떠올렸습니다. 가족을 위해 (말 그대로) 피흘리며 싸우는 아빠의 모습은 미국 대중문화가 즐겨 연출하는 주제며 늘 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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