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영화 <시간>에 1만6000명의 관객이 들었단다, 전작 <활>의 2000여명에 비하면 대단한 흥행이다. 그것도 홍보다운 홍보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예상외(?)의 흥행 이유는 간단하다. 그나마 우리를 덜 불쾌하게 하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느 평론가는 "김기덕답지 않은 영화"라며 칭찬인지 비판인지 뜻 모를 평을 했던데, 아마도 사랑과 성형에 대한 고루한 비판에 초점을 맞추고 봤기에 그럴 것이다. 만약 그런 시각을 찾는다면 번지수를 잘못 택했다. 그건, 영화 <신데렐라>에 잘 나와 있다.

물론, <시간>의 주제가 사랑과 성형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좀 더 자세히 <시간>을 비집고 들여다보면 전혀 엉뚱한 것이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성형을 통해서라도 사랑을 잡을 수 있다면, 권태를 벗어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라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착시현상이다. 그러나 전혀 틀린 착시는 아니다. 그래서 김 감독의 영화는 '쉽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해석이 필요한 영화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해석이란 게 녹록치 않다는데 비평의 어려움이 있다.

사랑의 유효기간...그리고 지루함과 권태

 영화 <시간>, 세희에서 새희로 변신해서 행복한가?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
ⓒ 김기덕 필름

영화 <시간>에서 지우(하정우 분)와 세희(성현아 분)는 사랑하는 연인이다. 안타깝게도 김기덕 감독의 말처럼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랑도 마찬가지.

유효기간이 끝난 상한 우유는 먹지 않고 버리듯이 사랑의 열정이 다한 연인은 이별의 시기만을 저울질 하는 모양이다. 문득, 상대방에게 '지루함'과 '권태'를 느꼈다면 유효기간이 다했음을 알리는 경고음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경고음이 울리는 순간, 화마(火魔)가 지나간 자리에 볼썽사납게 삐죽삐죽 튀어나온 날카로운 철 구조물의 잔해처럼 지루함과 권태가 서로를 찌르고 상처를 주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별은 그렇게 고통과 상처를 주면서 시작되는가 보다. 아~ 그렇다면 사랑의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영원히 활활 타오르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영화 <감각의 제국>의 소재가 되기도 한 실화의 주인공 '(아베)사다'는 자신의 애인인 '기찌'의 남근을 절단해서 자신의 몸에 지니고 다녔던 것은 아닐까.

그녀가 남자의 남근을 절단한 것은 다름 아닌 그를 영원히 소유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남근인가? 여기서 잠깐, 정신분석학자 라캉의 분석을 빌리자면 그녀는 자신에게 성적 만족을 가져다준 대상을 성기, 즉 남근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영화 <감각의 제국>. 주인공은 쾌락의 근원이 남근에 있다고 착각하고, 그래서 그것만 소유할 수 있다면 시간도 멈출 수 있다고 믿는다. 과연 그럴까?
ⓒ 오시마 프로덕션

그래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그 남근에 고착(固着)되었고 그로인해 자신의 성적 만족의 근원이 '기찌'의 성기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3개월 이상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식음을 전폐하면서 쾌락에 몰두한 그녀가 남근을 절단한 것일까?

이유는 지루함과 권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불안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기찌'가 사라져도 자신에게 영원히 쾌락을 선사할 남근만 소유하면 그 불안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에서는 그 지루함과 권태의 도피처가 남근이 아니라, 성형이다. 남근의 거세라는 공포도 없다. 오직 죄의 근원은 여자이며, 그래서 권태와 지루함의 형벌을 혼자 짊어지고 성형이라는 십자가에 매달린다.

그런 점에서 <시간>은 지독한 마초 영화라는 비판을 받을만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외로 조용하다. 아니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은 지극히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다. 사실 <시간>의 깊은 속은 <감각의 제국>처럼 거대한 '남근'을 택하고 있다.

'세희'가 된 '새희', 하지만 고통스럽다

 영화 <시간>은 묻는다. 낯선 것이 영원히 쾌락을 줄 수 있느냐고.
ⓒ 김기덕 필름

정말일까? 다시 복기해보자. '사다'는 지루함과 권태로 인해 '기찌'가 떠날까봐 불안해하면서 그것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남근에 고착(노예)되어 그것을 절단해서 소유한다. 그렇다면 세희는? 지우가 떠날까봐 탈출구로 성형을 택한 것일까? 아니다.

세희 역시 기찌의 남근에 고착한 사다처럼, 지우에 고착된다. 세희가 성형을 한 목적은 다름 아닌 지우에게 새로운 대상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지우의 욕망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지우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기꺼이 자청한 것이다. 주체를 상실하면서까지 말이다.

'사다'가 '기찌'의 남근에만 고착됐듯이 세희 또한 절단만 안했을 뿐이지 '지우'의 남근에 고착 된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과연 '사다'와 '세희'는 고착됨으로서 영원히 쾌락을 얻었을까? 아니다. 사다는 그것을 가슴에 지니고 방황했고, 세희는 '새희'가 되었음에도 행복하기는커녕 고통스럽기만 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성형은, '사다'의 남근절단의 다른 버전임과 동시에 성별을 떠나 우리 모두가 '사다'이며 '세희'라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감각의 제국>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이 날을 세운 곳은 전쟁광이 되어, 전쟁(남근)에 고착되어 일본을 죽이고 있는 일본 정부였다.

허나 김 감독은 이상하게도 이 모든 책임을 여성이나, 사회구조에 돌리지 않고 '시간'에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연인에게 지루함과 권태감을 가져다주고 세희가 스스로 욕망의 대상이 되어 지우를 떠나지 못하고 고착된 것도 모두 '시간'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책임은 시간에 있다?

 영화 <시간>, 다시 옛것을 찾는다고, 또 새것이 된다고 이전의 것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형벌은 진행형이지 완료형이 아니다.
ⓒ 김기덕 필름

이제 좋은 핑계가 하나 생긴 것 같지 않은가. 여성 스스로가 자신을 상품화하는 것도, 남성이 여성을 상품화로 바라보는 것도, 여성들이 성형을 하려고 하는 이유도, 남녀가 바람을 피우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모두 '시간' 때문이니 말이다.

그래서 온갖 치정에 얽힌 사건들이 오늘도 우리 주변에서 심심찮게 일어나는 것도 바로 그 권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낯선 것, 새 것을 갈망하기 때문이니 결국, 모든 원인은 '시간'에 있다는 진단이 그렇게 틀린 진단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시간 속에서 필연적으로 주체를 상실하고 욕망의 대상이 되어 '사다'처럼, '세희'처럼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끔찍한 현실에서, '지우'(남근)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인가?

미안하지만 없다! '시간'에 종속되어 있는 한 인간에게는 그 어떤 길도 없다. 그런데 김 감독은 생각이 다른 것 같다. 굳이 찾으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쉬운 길도 아니라는 단서를 단다.

어떻게? 스스로 새것, 낯선 것이 되면 된다는 것이다. 세희가 새희로 성형을 했지만 본질은 여전히 세희인데도 지우는 착시현상을 일으킨 나머지 낯선 것으로 인식하지 않는가? 여기서 착시는 지우의 욕망의 시선이 착각을 일으킨 것이다. 순간적이지만 말이다.

헉, 그렇다면 성형을 하라는 말인가? 아니, 성형을 하지 않고도 영악한 욕망을 속여,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이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이 끔찍한 남근의 고착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그게 과연 가능할까? 불가능하기에 세희는 새희가 되어도 여전히 지우(남근)에 고착돼 있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지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시지프스가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을 알면서도 산꼭대기에 반복해서 거대한 바위를 굴러 올려야하는 형벌처럼 바로 '시간'의 굴레에 갇힌 우리의 모습이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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