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용기가 없는 그녀, 그것을 알고 있는 노련한 나쁜 남자.
ⓒ LJ FILM(주)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 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의 한 구절이다. 그래서일까, 종교학자 윌리엄 제임스는 종교의 시원을 '공포'에서 찾았다. 여기서 '공포'란 미래에 대한, 실존에 대한 불안일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그 어딘가에 자신을 정주(定住)시키려고 한다. 그것이 종교이든 그 무엇이든 말이다. 그런데 니체는 정주하려는 인간의 행동을 노예적 삶, 짐승의 삶이라며 혹독하게 비판을 한다. 왜일까, 그가 무신론자라서? 아니다. 그는 근원적 신은 사라지고 없으며 그 자리를 우상(偶像)이 꿰차고 앉아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연 신을 몰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우상은 누구란 말인가? 이 의문에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인간에게는 신이 되고픈 욕망이 있는데, 이 욕망은 인간 스스로 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갖는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고, 틈(?)만 보이면 신의 명을 어긴 것도 그런 불순한 목적 때문이라는 거다. 그렇다면 니체의 '신은 죽었다'는 선언은 인간의 욕망이 신을 죽였고, 그 욕망이 신의 자리를 꿰차고 인간을 욕망의 노예로 만들고 있다는 고발이지 않는가? 그래서 니체는 노예적 삶에서 벗어나려면 스스로 "자기 낫을 갈 줄 아는 자", 즉 초인이 되어야 한다고 그토록 외쳤던 모양이다. 그러나 우상은 타파되기는커녕 더 더욱 강해졌으며 초인은 지금도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은 여전히 자기의 '낫도 갈지" 못하는 노예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인간은 신은 버렸지만 신은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 철학자 셸링과 헤겔이 종교를 떠나버린 신이 예술과 철학에서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을 찾았으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우상에게 밀려난 근원적 신이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 내림굿을 한 모양이다. 김기덕 영화에 상식적인 해피엔딩은 없다
 ‘나쁜 남자’, 그의 충동적 행위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본 매우 낯이 익은 이미지이다.
ⓒ LJ FILM(주)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가 다름 아닌 니체처럼 '주체적인 인간'이 되는 것과 '인간의 구원'에 대한 고뇌이니 말이다. 그래서 욕을 먹는 것일까? 우리가 만든 우상을 비판하고 다시 근원적 신을 되찾으려고 하니 말이다. 특히 영화 <섬>은 낚시 바늘의 잔혹한 자학이 우리를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자학이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소명을 받은 낚시꾼(종교)의 딴 짓 때문이라면 우리의 불쾌감, 비난이 향해야 하는 곳은 김 감독이 아니라 교리와 제도에 매여 생명력을 잃은 종교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쯤에서 비판의 칼끝을 내렸으면 될 텐데 그는 끝낼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젠 아예 작심을 하고 나선 것 같다. 그나마 <섬>에서는 종교의 사명을 망각한 제자들에게 비난의 칼을 들이댔다면 영화 <나쁜 남자>와 <활>에서는 구원의 주체인 신(神)을 향해 비판의 칼을 들이민 것이다. 쉽게 말해 니체의 '신은 죽었다'의 김기덕 버전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니체는 "자기 낫을 갈 줄 아는 자"가 되어 우상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라고 외쳤다면, 김 감독은 아마도 인간은 영원히 '해방'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암울한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일까? 영화 <나쁜 남자>부터 읽어보자. 어느 날 그녀에게 느닷없이 다가온 황당한 사건. 그것도 대낮에 공개된 장소에서 일방적이면서 강압적으로 당한 키스! 그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는데서 말이다. 그리고 그 '나쁜 남자'에 의해 납치되어 창녀촌으로 간 그녀, 속된 말로 '개 같은 경우'를 당한 것이다. 이제 그녀의 삶은 나쁜 남자의 것이다. 그녀의 반항과 저항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도 희망이 온 것이다. 그녀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어했던 납치 전의 일상으로 나쁜 남자가 그녀를 돌려보내 준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돌아가지 않고 다시 나쁜 남자에게로 돌아온다. 아~여기서 우린 매우 상식적인 해피엔딩을 상상하며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결말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녀가 나쁜 남자와 함께 트럭을 타고 다니면서 영업(?)을 하는 것이 엔딩이다. 헉, 이번에는 관객들이 '개 같은 경우'를 당한 것이다. 그러니 불쾌감은 물론 배신감마저 들게 하는 이런 엔딩에 호평을 할 관객이 없는 게 당연한 것이다. 납득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 김 감독의 의도는?
 "팽팽함에는 강인함과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 엔딩 자막이다. 활에 대한 김 감독의 생각이다. 프로이트적 시각으로 보면 남근을 상징한다. ‘노인’이 남근이라면 우린 맹목적인 남근숭배자가 된다.
ⓒ 김기덕 필름

문제는 나쁜 남자가 아니라, 그녀의 행동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 혹평의 이유이다. 도대체 김 감독의 의도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은 관객의 몫이라며 매번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런데 이 엔딩은 <활>에 비하면 양호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소녀'는 아예 유아 때 납치(?)되어 노인의 스타일(?)로 길들여진 소녀다. 더 넓은 바다의 배, 소녀는 거기를 떠나 단 한 번도 뭍에 나간 본적이 없다. 소녀가 이해하는 세상은 노인과 바다, 그리고 배뿐이다. 그러니 자연히 소녀와 노인은 서로에게 삶의 의미이며 존재의 이유이다. 둘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인 것이다. 그런 소녀가 어느 날 노인을 떠나려 한다. 노인의 배로 낚시하러 온 젊은 청년 때문이다. 소녀는 온통 그 청년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하다. 청년의 등장은 노인에게는 실존적 위기였지만 소녀에겐 기회였다. 낯선 것에 대한 욕망은 인간에게 용기를 주는 모양이다. 소녀의 노인을 향한 반항의 횟수가 빈번해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스스로 독립을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노인의 보호가 필요 없다고 자각을 한 것일까? 결국 소녀는 떠난다. 자신의 근원적 자궁 같은 안락한 보금자리를 버리고 망망대해 바다를 가로질러 뭍으로, 새로운 세계로 독립의 깃발을 펄럭이면서 말이다. 그래도 <나쁜 남자>의 그녀보다 이 소녀가 더 나은 것 같지 않은가, 스스로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으니. 그러나 노인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라는 만해의 시 구절처럼 소녀가 떠나는 배에 몰래 줄을 묶고 그 줄 끝에 목을 건다. 주체적인 인간 되기의 어려움
 어느 날 다가온 젊은 청년에게서 호기심을 느끼는 소녀, 호기심은 항상 용기를 준다.
ⓒ 김기덕 필름

소녀가 없는 삶을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 것일까? 그런데 그것은 쇼였다. 소녀에게 자신의 자살을 알리고자 하는 일종의 마지막 협박의 퍼포먼스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공을 했을까? 소녀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왜, 돌아본 것일까? 소녀는 미련이 남았던 것이다. 이 미련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 나온 롯의 아내, 그녀 또한 '미련' 때문에 뒤를 돌아보았다가 소금 기둥이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스스로 "자기 낫을 갈 줄 아는 자", 즉 노예의 삶에서 해방되어 주체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두 영화가 새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활>로 돌아가서 노인의 자살 소동을 목격한 소녀, 배를 돌려 노인에게로 달려간다. 이 얼마나 노련한 노인인가, 소녀가 새로운 세계로 나가는 것을 내심 두려할 것이라는 것을 노인은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나쁜 남자>에서 그녀가 돌아온 것도 바로 소녀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아온 소녀는 노인과 선상에서 혼례를 올린다. 그 결혼은 소녀가 노인에게 영혼을 바치는 거룩한 의례이다. 그래야만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소녀는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노인은 행복감에 미소를 짓고는 소녀가 잠든 사이에 물 속으로 뛰어든다(?). 잠시 후 소녀는 혼자 비몽사몽 중에 격렬한 섹스를 한다. 그리고 눈을 뜬다. 소녀의 하얀 속옷 아래는 처녀성을 상징하는 피로 물들어 있다. 소녀는 묘한 미소를 짓는다. 노인은 소녀의 몸과 정신을 영원히 소유했으니 자신의 뜻을 다 이루었기에 사라진 것일까? 김기덕 영화가 불편하고 불쾌한 진짜 이유
 노인은 소녀에게 활(남근)을 겨누다가 공중으로 쏘고는 바다 속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소녀는 비몽사몽 혼자 섹스를 하다가 절정을 맛본다. 노인은 몸과 영혼, 둘 다 가진 것이다.
ⓒ 김기덕 필름

우린 여기서 의미 있는 그리고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 하나와 마주친다. 그것은 그녀와 소녀는 길들여짐에 안주하는 행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왜일까?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다는 모두의 인용문이 그 이유다. 이미 길들여진 실존이 다시 주체로 돌아가기에는 미래가 너무 불안했던 것이다. 아니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 감독은 우리가 니체의 "자기의 낫을 갈 줄 아는 자"가 될 수 없는 이유를 '미래의 불안'에서 찾은 것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불편하고 불쾌했던 진짜 이유는 다름 아닌 '나쁜 남자'와 '노인'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그녀와 소녀에게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쁜 남자'와 '노인'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도 찾아야 할 것이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그래서 매우 낯이 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자. '나쁜 남자'와 '노인'이 충동적이고 강압적이며, 노련하다고 해서 그것이 근원적인 신(神)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쁜 남자'와 '노인'을 근원적인 신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올려놓은 것은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충동적이며, 강압적이고, 이기적인 우리들의 욕망이 그런 우상을 만든 것이다. 그래서 그런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이 신의 이름을 빙자해서 일방적인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며, 그런 우상을 섬기는 인간들이 충동적으로 약자를 짓밟으면서도 그것을 정의라고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볼 때, 우상은 노련했고, 인간은 두려워서 굴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다려진다. <시간>의 평을. 그런데 너무 조용하다. <괴물>에 앞 다투어 찬사를 보낸 그 전문가들은 어디 휴가를 간 것인가? 그들도 노련함을 배운 것인가? 그래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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