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섬>

"낚시의 도(道)를 모르고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물고기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노먼과 폴로 하여금 잡히는 물고기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그들의 인간적 멋과 성숙도 깊어질 수 있도록 하였다."(김영민의 <철학으로 영화보기 영화로 철학하기> 중에서) 김영민 교수가 비평하고 있는 영화는 로버트 레드포드의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1992)이다. 그가 이 영화에서 낚은 것은 종교와 낚시를 통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의 은총이 어떻게 조화롭게 연주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인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성숙되어 가는지를 레드포드의 영화가 얼마나 섬세하게 일깨워주고 있는지 김 교수는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비평하고 있다. 오래전에 비평한 글이지만 요즘처럼 획일적이고 식상한 비평에 비하면 매우 가슴에 와 닿는 적절한 비평이다. 그런데 낚시와 자연이라는 같은 도구(?)를 사용하고 있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과는 어찌 이렇게 다른지. 오히려 <섬>은 바로 이러하기에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은 불화(不和)할 수밖에 없다며, 도발적 선언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두 영화는 분명 정반대의 메시지를 주는 듯하다. 겉보기에는 말이다. 그러나 그 속으로 한 발, 두발 더 깊이 들어가면 두 영화의 지향점은 같으나 그곳으로 가는 길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흐르는 강물처럼>과 <섬>의 같고도 다른 길 굳이 덧붙이면, 레드포드가 정도(定道)를 택했다면 김기덕은 비도(非道)를 통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레드포드가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과의 소통이야말로 인간을 성숙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말했다면, 김 감독은 그 반대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을 불화(不和)로 놓고 그 불화의 원인을 거칠게 까발리면서, 우리에게 소통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두 영화를 비교 분석하면서 김 감독의 <섬>을 호평하는 도구(?)로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레드포드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풀어내고 있는 낚시와 자연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유가 <섬>을 읽는데 매우 유익할 것 같아 잠시 끌어온 것이다. 또한 서두에 김 교수의 비평을 인용한 것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그러니 두 작품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이쯤에서 끝내고자 한다. 아마도 두 감독 모두 자신의 작품이 비교되는 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것 같다.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의 한 장면

하지만 낚시와 자연, 그리고 신에 대한 사유는 우리가 낚은 것이니 그것은 가지고 영화 <섬>으로 들어 가보자. 여기에는 삶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두 남녀가 나온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일상으로부터 도망온 남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들이 만난 곳은 강 위에 떠있는 낚시터(수상좌대)에서다. 남자는 애인을 살해하고 그 세계(일상)로부터 도망온 전직 경찰 현식이고, 여자는 말을 하지 않는 건지 못하는 건지 영화 내내 무언(無言)인 희진이다. 그녀의 일상은 낚시터에서 밑밥을, 때론 몸을 팔기도 하는 낚시터 주인이다. 세상에, 도망 갈 곳이 그렇게도 없을까?, 왜 하필 낚시터인가?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곳은 그럴 만한 곳이었다. 이곳은 낚시가 목적이 아닌 사람들로 가득하다. 도망자 현식, 낚시와는 전혀 무관한 희진, 그리고 고스톱이 목적인지, 아니면 성욕이 목적인지 그 목적이 불분명한 '짝퉁' 낚시꾼들이 그곳에 진을 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영화 밖 우리네 낚시터의 꼴불견과 별반 다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김영민 교수는 같은 책에서 이런 낚시터의 추태에 일갈을 한다. "경망스러운 낚시의 초보자는 두발을 뭍에 두고 있다는 사실만 다를 뿐 바늘 끝에 달린 물고기 새끼보다 별 나을 게 없는 법"이라고. 정말 속 시원한 일갈이지 않는가. 분명, 우리의 눈에 비치는 모습은 낚시터인데, 그 속내는 전혀 다른 낚시터, 이런 겉과 속이 다른 게 어디 낚시터 뿐이겠는가. 그럼 왜? 김 감독은 낚시터를 배경으로 그 곳에 낚시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로 가득 채워 놓은 것일까? 물론, 김 감독이 의도한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사학자 앙리 포시용의 말을 빌리자면 예술작품이 작가의 자유로운 몽상의 구현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동시대를 넘어서는 보편적인 어떤 것을 담아내기도 하는데, 이 보편적인 것이 자신의 작품 속에 있는지 작가는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생각이다. 과연 작가가 모를 수 있는 걸까? 분석심리학자 칼 융은 모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을 한다. 그는 이 보편적인 것을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고 있는 근원적 원형(原型)이라고 이해를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의식을 통해 표현되어질 때는 우리의 의식이 알지 못하도록 위장을 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직설화법으로 의식에 투사되면, 우리의 의식이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상징의 옷을 입고 의식을 통해 표현되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와 인종, 그리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인류에게 끝없는 감동을 주는 예술작품이 존재하는 것도 다름 아닌 바로 그 속에 인간의 근원적 원형을 충족시켜주는 보편적인 어떤 것이 녹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칼 융의 주장이다. 그래서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낚시의 도(道)'는커녕 기본적인 낚시에 대한 이해도 없는 사람들로 가득한 이 낚시터는 그래서 감독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의미심장한 상징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김 교수가 말한 낚시와 자연을 통해서 인간이 성숙해져 가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지적처럼 이 낚시터는 불량한 인간, 또는 절망과 실존적 위기에 처한 인간들에게 다시 삶의 의미를 제공해주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일깨워주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현대문명의 삭막한 세계에서 지친 영혼들이 쉼과 충전을 위해 자연을 찾는 이유 또한, 바로 문명 이전의 우리 조상들이 자연을 통해 삶의 의미와 지혜를 얻어 삶을 지탱해 나갔다는 무의식에서 들려오는 원형의 소리를 따라 그 곳으로 달려가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실존적 위기를 극복해주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곳은 어디일까? 그런 낚시터는 어디일까? 아마도 종교가 아니겠는가. 종교 중에서도 모르긴 몰라도 낚시와 관련이 있는 종교일 것이다. 그래서 찾아보았더니 신약성서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예수께서 밤늦도록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돌아오는 프로 어부들에게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셨는데 어부들이 그 말을 듣고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 어부들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다. 그리고 예수는 그들에게 앞으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소명을 주신다. 다시 말해 사람을 구원하는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합일을 통해서 고기를 낚는 그 지혜, 그 '낚시의 도(道)'를 아는 어부들이니 경망스러운 초보 낚시꾼들보다야 자연과 신에 대한 경외심이 한층 더 높을 것이라고 보신 모양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고 숨을 곳이 없는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다시 실존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전해주고, 자신의 질투심으로 울컥해서 동생 '아벨'을 돌로 죽인 살인자 가인에게도 다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해주기 위해, 또 어디서 솟는지 알 수 없는 본능적 야수성으로 인해 타자를 절망으로 죽음으로 몰아세우는 그들에게 공동체의 의미와 타자에 대한 사랑을 일깨워 주기 위해, 그 분께서는 사람을 낚는 '낚시의 도(道)'를 아는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비난은 초보 낚시꾼들을 양산한 종교로 향해야
 김기덕 감독의 <섬>

그래서 '낚시의 도(道)'를 통해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의 섭리를 배우도록, 그래서 그것을 통해 성숙한 인격으로 성숙되어져 나가도록 가르치라고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는데, 오늘의 현실은 어떠한가? 낚시터(종교)에서 삶의 의미와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를 배우기는커녕, 오히려 일그러진 욕망만을 채우고 있는 짝퉁 제자들인 낚시꾼들만 보이니, 정말 김 교수의 일갈처럼 '바늘 끝에 달린 물고기 새끼보다 별 나을 게' 없다는 욕을 먹어도 싸다고 본다. 그렇다면 도대체 '낚시의 도(道)'를 가르쳐야할 낚시터가 어떻게 하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는 말인가? 다시 본래의 낚시터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인가? 그래서 모두에 김영민 교수의 비평을 인용한 것이다. "낚시의 도(道)를 모르고서 물고기를 잡는 것은 '물고기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 여기서 아버지는 다름 아닌 미국 몬태나 주 어느 시골 강변 마을의 장로교 목사 맥클레인이다. 이런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자란 두 아들이 훌륭한 낚시꾼이 되었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성숙한 인격으로 자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만약 이런 가르침을 받고 현식과 희진이 자랐다면 자신들의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서 현식과 희진이 벌이는 잔혹한 자기학대는 그 학대의 방법이 잔혹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낚시의 도(道)'를 몰라서 방황해야 하는 그들에게 구원의 지혜를 가르쳐 주지 않은 어부들의 책임만큼, 딱 그만큼의 학대를 스스로 그들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학대는 '바늘 끝에 달린 물고기 새끼보다 별 나을 게 없는' 경망스러운 초보낚시꾼들을 양산해 내는 종교를 향한 거친 비판이자, 신(神)을 향한 구원받기 원하는 퍼포먼스인 것이다. 그러므로 잔혹한 학대에 대한 비난과 욕을 김기덕의 <섬>이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초보 낚시꾼들을 양산한 종교에 해야 하는 것이 더 옳은 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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