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양연화>, 어긋난 에로스는 인간을 절망과 고통에 빠지게 한다.
ⓒ 블록 2 픽쳐스

도대체 에로스가 무엇이기에 인간을 눈멀게 하고, 때로는 벼랑 끝으로, 때로는 스토커라는 타자에 대한 테러(?)로 나타나는 것일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왜, 이토록 인간실존을 절망과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반문들을 해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인생이란 자신의 반려를 찾는 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아파하고. 사랑에 목숨 거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한탄이 나올만하다.

그래서 떠나려는 것이다. 어디로? 사랑의 기원을 찾으러 말이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 무슨 처방이라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은 왜 사랑을 하게 되었으며 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지, 그리고 그 누군가를 부단히 소유하려고 하는 것인지 그 근원을 찾아보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떠날 수는 없는 일. 여기서 잠시 종교학자 엘리아데의 혜안을 빌리자면, 신화가 인간에게 사물의 기원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니 그의 말에 따라 먼저 신화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남아메리카 부족의 창조신화에 나타난 '섹스의 기원'

아주 멀고 먼 남아메리카 테네테하라 부족의 창조신화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창조신이 최초의 남녀 인간을 만들었는데, 남자는 동정(童貞)이라서 항상 성기가 발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성기가 발기되어 있으니 얼마나 불편(?) 했겠는가?

그래서 그것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했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그런데 최초의 그녀가 물의 정령에서 성기를 죽이는 비법을 배웠단다. 그리곤 그 난처해하는 남성의 성기를 죽였단다. 남자의 입장에서는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항상 난처했던 것을 죽여주었으니.

그런데 창조신은 그게 보기에 안 좋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노발대발하면서 벌을 내렸단다. 앞으로 성교를 통해서 성기를 죽일 수는 있지만, 그래서 아이를 잉태하게 되겠지만 본인은 죽을 것이라는 거다.

이게 섹스의 기원이란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의 이 절묘한 관계, 어딘지 낯이 익다고 생각했는데 다름 아닌 바로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열심히 설교했던 프로이드에게까지 이 얘기가 흘러 들어간 모양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발기돼 난처한 성기를 죽이려고 여성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그게 사랑이 되었다는 건데, 굳이 오늘의 현실을 들먹이지 않아도 너무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 보통 설득력이 있는 얘기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성의 발기된 성기만을 죽이려고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 삭막하고 동물적인 것인 같지 않은가? 그래도 명색이 만물의 영장이고, 생각하는 동물인데 그래서 하나 더 찾아보았다.

제우스가 신에 도전한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다?

 플라톤
ⓒ 문학과지성사
이번엔 플라톤의 <향연>으로 들어갔다. 이 책에서는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러 사람이 한 주제를 놓고 심포지엄의 형식을 빌려서 논하고 있다. 그들 중 아리스토파네스가 사랑의 기원을 논하면서 신화 속의 얘기를 끌어오는데 그의 얘기는 이렇다.

최초의 인간은 성(性)이 세 종류였는데 <남자+남자>, 그리고 <여자+여자>와 마지막으로 <남자+여자>의 양성으로 이루어졌다는 거다. 좀 더 설명을 하면 팔이 네 개, 다리가 네 개, 머리는 하나에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얼굴이 둘이었단다.

그런데 이 최초의 인간들이 작당을 해서 감히 신에게 도전을 했고 결과는 참혹한 패배였다. 그 벌로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쪼개버렸다는 거다. 그런데 허걱! 이렇게 반으로 나누어진 인간들이 하나 둘씩 죽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유인즉 잃어버린 반쪽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란다. 그래서 제우스는 고민 끝에 일정기간 동안만 그 반쪽을 만나게 허락을 했는데 그게 바로 에로스와 섹스의 기원이었단다. 그나마 이 얘기가 앞서의 얘기보다 좀 더 인간적인 것 같지 않은가?

거기다가 보너스로 동성애에 대한 의문도 말끔히 해결해 주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동성끼리 붙어 있었던 인간에게 잃어버린 반쪽은 같은 동성이니 동성에 대한 사랑의 기원 또한 풀리지 않는가.

그래서 인간은 그 반쪽에 필(?)이 꽂히면 반가움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진해서 온 몸을 불태우는 모양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애초에 반쪽이 아닌 것 같으면 포기하면 될 터. 그렇게 하면 서로의 사랑의 주파수가 어긋나서 이별과 배신의 고통도 당하지 않을 것인데 왜, 미련을 못 버리고 끝을 보려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은 무엇인가를 남기려는 것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좀 더 깊이<향연>으로 들어가야 될 것 같다. 이번에는 소크라테스가 사랑에 대해서 논할 차례인데 그는 자신의 얘기보다는 '디오티마'라는 여사제의 사랑에 대한 혜안을 끌어 와서 논한다. 그녀의 얘기는 이렇다.

인간이 에로스를 추구하는 이유는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행복을 가져다주는 대상을 소유하려는 것이 에로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에로스가 욕망 하는 대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아름다움'을 욕망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을 욕망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아리스토파네스가 주장한 반쪽을 찾는 게 에로스가 아니라 '좋은 것'을 욕망 하는 게 진짜 에로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린 그 '좋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그토록 살벌한 경쟁을, 죽어도 미련을 못 버리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녀의 얘기를 좀 더 들어보자. 에로스에는 육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에 대한 에로스도 있는데 이 둘은 모두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영원히? 어떻게? 그래서 인간은 무엇인가를 남기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육적으로는 후손을 남기는 일이든, 아니면 정신적인 위대한 지혜를 남기는 일이든 그 무엇이든, 무엇인가를 생산(잉태)하려는 욕망이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바로 이 생산을 통해서 인간은 '좋은 것'을 영원히 소유했다는 만족을 얻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아름다움'이며 그로 인해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게 그녀의 에로스에 대한 정의이다. 아니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하고 싶은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수소와 수간한 파시바 왕비... 성욕이 주체가 된 인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애욕에 눈이 먼 것일까? 어긋난 에로스가 죽음을 부른다.
ⓒ 동아수출공사

그렇다면, 에로스가 '행복'하기 위해서 '좋은 것'을 욕망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어떤 대상에 지나칠 정도로 일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좋은 것'도 아니면, 그 '좋은 것'을 낳을 수도 없을뿐더러 그것을 '행복', 또는 '에로스'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보자면 외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에로스는 '좋은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발기된 성기만을 죽이기 위해서 에로스를 추구하는 것 또한 '행복'을 주는 가져다주는 에로스는 아닐 것 같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포세이돈의 저주로 수소를 사랑하게 된 파시파 왕비의 얘기일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애욕을 참지 못하고 암소로 위장(?)해서 그 수소와 수간(獸姦)을 한다. 그 결과 그녀가 낳은 것은 영원히 소유하고픈 '좋은 것'이 아닌, 무시무시한 반수반인의 괴물 미노타우로스였다.

물론, 포세이돈의 저주 때문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시선이 문제였다. 그녀에게 아름다움은 '좋은 것'을 남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의 욕정을 한 순간이라도 풀어주는 것이라면 그 무엇이라도 소유하고자 한 그 욕망에 있었다.

그러니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성욕이 주체가 되고, 인간은 대상이 되니 수소가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상관없게 되는 것이다.

또 있다. 그러니까 기원전 4세기경쯤 그리스 아테네에 아프로디테(고대 그리스의 미의 여신)신상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는 '프리네'라는 아름다운 여성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름다움에는 항상 고통과 질투가 따르는 법.

그녀에게 잠자리를 요구한 고관대작들 중 거절당한 맛이 간 X맨이 홧김에서인지, 암튼 그녀를 신성모독 죄로 고발을 한 것이다. 당시 신성 모독죄는 사형이었다고 하니 애욕을 거절한 대가치고는 너무 혹독한 고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미녀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는 것 같다. 그녀의 소식을 전해들은 전 애인(?) '히페레이데스'가 그녀를 구명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사형을 선고한 배심원들 앞에서 '프리네'의 알몸을 공개한다. 그리고 그는 배심원에게 말한다. "신상(神像)에 자기의 형상을 빌려줄 만큼 아름다운 이 여인을 꼭 죽여야 하는가?"

 장 레옹 제롬의 <배심원 앞의 프리네>1861. 에르미타주 미술관, 러시아
ⓒ 에르미타주 미술관

진정한 아름다움은 '숭고함'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의 벗은 알몸을 본 배심원들이 만장일치(?)로 판결을 번복한 것이다. 판결문은 이랬단다. "저 아름다움은 신의 의지로 받아들여야만 할 정도로 완벽하다. 따라서 그녀 앞에선 사람이 만들어낸 법은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무죄를 선고한다."

외적 아름다움의 승리인가? 아니면, 배심원들의 일그러진 아름다움에 대한 음흉한 욕망의 승리인가? 신성하고 공정해야 할 판결마저도 번복하게 만든 배심원들의 눈에 비친 아름다움은 분명 '좋은 것'에 대한 욕망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파시파 왕비의 눈에 비친 수소와 다를 바 없는 애욕에 눈먼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들이 욕망 하는 일그러진 에로스의 대상이자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애욕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에로스의 대상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인가? 그 질문에 칸트가 명쾌한 답을 주고 있다. 그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숭고함'의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숭고함'? 그것은 질리거나 지루하지 않으며 오랫동안 즐길 수 있고, 또 도덕적으로 고무되기도 하는 그런 감정이다. 그렇다고 종교적 의미의 경건한 감정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숭고함에는 공포도, 전율도, 화려함도, 고상함도, 웅장함도, 떨림도, 모두 포함하는 그런 감정이다. 만약, 에로스의 대상에서 이런 '숭고함'의 감정을 느꼈다면 그것은 분명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애욕에 눈먼 에로스의 감정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숭고함'의 감정이 바로 우리가 찾는, 근원적인 본래의 우리가 욕망 해야 할 '좋은 것'에 대한 시선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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