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퍼맨 리턴즈
ⓒ 워너 브라더스
“이 세상은 더 이상 영웅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웅은 아직도 할 일이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우리의 슈퍼맨을 불러냈다. 세상은 필요 없다는 데도 말이다.

그런데 영웅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감독의 말처럼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삶의 안내자, 빛의 역할을 해주기 위해서라면 영웅은 선물(?)을 들고 와야 했었다. 그래야 기립박수를 치든 열광적으로 환영을 하던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자신의 고향을 찾아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전혀 없다. 그나마 화려한 CG기술(컴퓨터그래픽)이 만들어낸 볼거리에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들만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섬세한 기술은 다른 영화에서도 충분히 충족하고 있으니 새삼스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영웅이 더 이상 필요 없다는 이 세계에 영웅을 다시 귀환시켰으면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고작 화려한 볼거리만 보여주려고 2억5천만 달러를 투자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 돈이 아깝다.

아니, 그래도 혹시나 하고 본 영화 관람료가 지금에서야 자꾸 아깝다는 생각이 더 든다. 차라리 박수를 치게 할 능력이 없다면 정신없이 몰입할 수 있도록 재미있게라도 만들든지 왜 영화 내내 투덜대면서 보게 하는가 말이다.

인류가 원하는 것은 악당이 신비한 수정을 가지고 새로운 대륙을 만드는 어설픈 설정도 아니며 그 악당들의 계획을 초인간적인 슈퍼맨의 힘으로 막아내는 것도 아니다. 인류가 원하는 것은 인류 스스로의 힘으로 이 구조적 모순의 세계를 헤쳐 나가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지혜를, 그 빛으로 안내하는 영웅적 삶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스스로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돌아온 슈퍼맨은 혼자 원맨쇼를 하다가 들어가 버린다. 이 세계와 소통은 하지 않은 채 말이다.

지금 인류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무엇으로 인해 고통 당하고 있는지 슈퍼맨은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는 그 자신이 필요한 곳에 그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곳에만 나타나고 고뇌한다. 소통이 없으니 영화는 일방적으로 들려주기만 할뿐이다.

그러니 오늘 인류가 처한 실존적 위기와 고뇌, 고통과 아픔을 알려고 하지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영웅이 인류의 삶과 동떨어진 존재라면 그가 아무리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그것은 개인적인 재능일 뿐 인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가 원하는 것은 슈퍼맨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한 구원자

▲ 슈퍼맨
ⓒ 워너 브러더스
인류는 초인 슈퍼맨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슬퍼하면서 그 속에서 실존적 위기를, 고통을 용감하게 가로질러 타자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우리들의 벗이며, 우리들 속에서 나온 영웅을 원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리스도(구원자)가 된 것은 그가 우리들의 문제를 가지고 고뇌하고, 그 고통을 극복하는 해법을 찾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부처가 보리수나무아래서 각(覺)을 한 것도 그런 연유이다. 그래서 그들이 남긴 말씀이 우리들에게 각자의 종교를 떠나 영적인 양식으로 삶의 지혜로 다가오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래서 출가(出家)와 가출(家出)이 다른 것이다. 출가는 집을 나와 근원을 찾아 떠나는 것이고, 가출은 집을 뛰쳐나오는 것이다. 영웅은 가출한 자가 아니다. 영웅은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의 해답을 찾으러 출가한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와 부처의 긴 여정이 바로 진정한 영웅의 행적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죽음에 처한 공주를 살리기 위해 비약(秘藥)을 찾으러 떠나는 용기 있는 왕자인 것이다. 그 왕자는 다름 아닌 인류를 죽음에서 구원할 비약을 찾으러 떠나는 영웅이기도 한 것이다.

그 영웅은 평범한 일상의 우리다. 그 평범한 인간에게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소명, 그는 안락한 삶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인류를 위한 고난의 길을 떠날 것인가 고뇌하다가 결국 소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런데 모든 영웅 이야기의 구조가 이런 패턴의 반복임에도 이런 영웅들의 이야기에 식상해 하지 않고 시공간을 넘어 전 인류가 열광하는 것은 그 패턴이 인간의 근원적인 원형(原型)상을 충족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신화학자 조셉켐벨의 말이다.

그 긴 여정에서 우리의 영웅은 인류를 구원할 진정한 영웅으로 만들어지며 그는 기어코 악의 상징과 혈투 끝에 신비의 비약을 가지고 귀환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웅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웅의 그 여정이 험난하고 고통스러울수록 인류는 손에 땀을 쥐면서 영웅의 무사귀환을 기도한다. 그러기에 영웅이 귀환하게 되면 전 인류는 그를 환영하며 기립박수를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스타워즈>가 그랬고 <반지의 제왕>이 그랬다.

물론, 영웅이 귀환하지 못하고 악의 상징에 죽음을 당하고, 때론 도망가고, 때론 악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그 모든 유혹을 이겨내는 자에게만 인류는 영웅이라는 호칭을 부여한다.

우리 시대의 영웅은 그런 유혹을 이겨낸 자들이다. 그래서 더 더욱 존경의 박수를 보내는 것이며 그 영웅은 그런 환대를 받아도 될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그런 영웅을 기다리는 소망을, 또는 그런 영웅들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서 신화 속에 그리고 다양한 문화적 양식 속에 그런 욕망과 염원을 투영시켜놓은 것이다.

짝퉁 영웅에게 열광하고 존경을 표하는 시대

▲ 슈퍼맨의 한 장면.
ⓒ 워너 브러더스

그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 이야기를 통해서 인류의 위기를 극복하고, 그 해답을 찾아주는 영웅이 우리 속에서 나올 수 있기를 고대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그런데 인류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오래 전부터 영웅을 더 이상 고대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런 영웅적 긴 여정의 이야기가 점점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낭송되어지거나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그래도 과거에는 황당하고 신비스러운 영웅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다시 곱씹어 보는 계기가 되기도 했었는데 말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인간다움으로 칭송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우리의 영혼이 황폐해져서 그런 것인지 타자를 위한 희생은커녕 자신이 조금이라도 손해를 볼 것 같은 일은 외면하는 게 지혜로운 행위라고 가르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영웅이 더 이상 필요 없는 시대가 아니라 영웅이 어리석은 사람으로 취급받고 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영화 속 대사처럼 영웅은 “남들과 달라서 외톨이”가 되어야 하는 고독한 존재이며 그것이 영웅이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여정이다. 그래서 인류를 구원할 비약을 가지고 돌아오기 전까지 영웅은 온갖 비난과 조롱을 감수하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래서인지 영웅은 폼(?)이 나서 좋은데, 그 고난의 과정은 거치고 싶지 않은 편한 영웅, 짝퉁영웅이 종종 우리주변에 출몰(?)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우리들이 그런 짝퉁영웅에게 열광하고 존경을 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도현의 <연어>에서 ‘은빛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들에게 쉬운 길을 가려는 유혹을 가로막으면서 “쉬운 길은 길이 아니야”라고 한 일갈을 꼭 되씹어 봐야할 것이다.

이런 와중에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난 슈퍼맨이 돌아온 것이다. 돌아오긴 했는데, 빈손이다. 그래서 묻는 것이다. 왜 왔는가? 왜 돌아 왔는가? 아무리 해 아래 새것이 없다고 하지만 과거의 슈퍼맨보다 더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차라리 이렇게 돌아올 슈퍼맨이었다면 귀환을 미루었어야 했다. 서둘러 돌아오느라 인류에게 전해줄 비약(秘藥)을 깜박한 것인가? 아니면 인류를 구원할 비약을 아직 찾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여인 로이스를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귀환한 것인가? 그랬다면 슈퍼맨은 영웅이 되기 위해 마음의 수련을 좀 더 쌓아야 한다.

사실, 수련은 슈퍼맨이 아니라 브라이언 싱어 감독이 쌓아야겠지만 말이다.
2006-07-05 19:1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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