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나쁜남자
ⓒ LJ필름

불편하고 불쾌하다. 김기덕 감독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평가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이다. 그런데 우린 종종 착각 아닌 착각을 한다. 그게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작품과 김기덕 감독을 등가(等價)시킨다.

그의 작품이 불쾌감을 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의 뇌는 불필요한 연상작용을 일으켜 그를 불쾌한 사고를 가진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판단해버린다.

그래서일까? 많은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불편함과 불쾌감을 김기덕 개인의 정신세계를 분석하는 것으로 그 원인을 찾는다. 그래서 그를 지독한 마초, 또는 사도마조히스트로 낙인찍어 그 불쾌감에 대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해서라도 보상을 받는다면 불행 중 다행이기는 하다.

그럼 그 불쾌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가 우리 속의 열등한 기억,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은 우리 속 깊은 곳에 숨겨놓은 추한 몰골들을 우리들의 허락도 없이 맘대로 끄집어 내 까발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면 알 수 없는 거부감 혹은 불쾌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자신의 단점을 천하에 까발리는데 유쾌할 수가 있겠는가. 당연히 욕을 먹게 된다.

왜 김기덕의 영화는 불편한가

 영화/활
ⓒ 김기덕필름
그렇게 욕을 먹었으니 다음 작품은 좀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데 김기덕 감독은 오히려 더 까발려 버린다. 속된 말로 '이왕 버린 몸'이라서 막나가기로 작정을 한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영화 중 가장 많은 비판을 받은 게 <섬>이다. 이 영화에는 평범한 우리들은 감히 흉내 내기는커녕 생각도 못해본 기괴한 잔혹함으로 가득하다. 그는 도대체 왜 그런 영화를 만들어 욕을 버는 것일까. 왜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극단적인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 것일까. 좀 부드럽게 돌려서 은유적으로, 아니면 약간만 비틀어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욕을 너무 많이 먹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성 어거스틴 처럼 참회를 한 것인지, 아무튼 김 감독은 그 답지 않은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데 가장 그 답지 않은 영화라는 '찬사'를 받은 이 영화가 사실은 가장 어렵고 난해한 영화라는 것을 과연 몇 명이나 알고 있을까.

자신이 이해 못하거나 난해한 것은 무언가 수준이 높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뜻도 모르면서 찬사를 보내거나, 아니면 반대의 경우에는 무조건 혹평과 비난을 퍼붓는다면 그것은 좀 불공평한 잣대가 아닌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그런 잣대로 평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이 영화는 정말 난해하고 어려운 영화다. 그런데 오히려 그것을 쉽게 풀어낸 참고서 같은 영화인<섬> <해안선> <수취인 불명> <나쁜 남자> <사마리아>등이 혹평 내지는 외면을 받았다. 이에 반해 <다빈치 코드>를 능가하는 어렵고 난해한 상징으로 가득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은 찬사를 받는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된다.

 시간
ⓒ 김기덕필름
그렇게 영상미의 극치라면 찬사를 받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의 옷을 하나하나 벗기다 보면 <섬>이 우뚝 서 있다. 거기서 더 벗기면 <나쁜 남자>를 그리고 <사마리아>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더 벗기면 <해안선>을 만나게 되고, 또 벗기고 벗기다보면 결국 우리의 수치스러운 몰골을 보게 된다.

그게 바로 그 영화의 본질인데 우린 화려한 명품으로 한껏 멋을 부린 겉모습에만 환호와 찬사를 보낸 것이다. 그 속을 볼 마음도 생각도 없다. 아니 사실은 화려함에 감추어진 그 속을 서로 암묵적으로 "까발리기 없기"라고 굳게 맹세를 했기에 안보는 게 매너이다.

그래서 오히려 속살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보자고 덤비는 사람이 이상한 취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김기덕 감독이 욕을 먹고 있는 이유다. 그냥 화려한 겉모습만 예쁘게 포장해서 보여주면 되는데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속살마저 보려고 한 것이다. 그것도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말이다. 그러니 불쾌하다는 욕을 먹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김기덕 감독은 너무 적나라하고 잔혹해!"라는 평가가 많다. 그래 맞다. 과격하고 지나친 부분이 없지는 않다. 그런데 그렇게 자극을 주고 경고를 하는데도 자신들의 속을 들여다보기는커녕 자꾸 그 추한 몰골을 감추려고 더 두꺼운 옷을 입으니, 그래서 점점 까발리는 수위가 높아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작년에 개봉 된 <활>이다. 이 영화는 개봉관을 얻지 못해 단관 개봉을 했다. 그런데 그것마저 관객이 2000여 명도 들지 않았다. 관객의 수가 적은 것이 문제가 아니다. 김기덕 감독의 작품은 개봉관을 쉽게 얻을 수 없다는 게 문제다.

왜? 돈이 안 된다는 거다. 자신들의 속내를 공개적으로 까발리는데 외면 받는 것은 당연한 거다. 그러니 자연히 혹평이 쏟아지고 개봉관을 얻는다는 게 기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김기덕 감독은 그의 신작 <시간>의 국내개봉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국내의 모 배급사가 그의 판권을 구입해 개봉에 나선다고 한다. 이게 김기덕 감독이 처한 현실이다.

그의 영화를 보고 안보고는 관객의 자유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놓고 평가할 때 최소한 공정한 잣대로 했으면 한다. 혹독한 비평도 과도한 칭찬도 관객의 몫이지만 유독 김기덕 감독에 대한 평가에는 항상 50점 정도는 깎고 시작하는 것 같다.

김기덕 감독은 우리의 내부 고발자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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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그의 영화를 볼 때 그에 대한 편견의 안경부터 벗고 보면 어떨까? 특정인에 대한 편견이야 없을 수는 없겠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찬사를 보낸 관객이라면 충분히 편견 없이 다시 그의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니 왜 그토록 김기덕 감독의 영화에만 애정을 표해야 하는가? 이유는 간다하다. 그는 우리의 속내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까발리고 있기 때문이다. 까발린다는 것,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욕먹을 것을 알면서도 멈출 생각을 안 한다. 이게 그에 대한 애정의 이유라면 이유다.

누군가가 까발려 줘야하는 일, 그런데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그가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는 내부 고발자인 셈이다. 인간의 추한 몰골을 까발리는 내부 고발자 말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를 볼 때마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인 지도 모른다.

그럼 그의 영화는? 우리의 부정한 모습이 기록된 몰래카메라이자, 부정할 수 없는 증거자료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다시 보자는 것이다. 불편하고 불쾌하지만 진짜 우리의 모습인지 다시 보면서 같이 확인해보자는 것이다. 편견의 안경을 벗어 놓고 말이다.

아니 도대체 그가 무슨 자격으로 우리의 내부 고발자란 말인가. 강하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반문에 분석심리학자 칼 융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칼 융은 작가의 예술작품에는 작가의 주관적인 가치만이 투영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는 작가의 개인적인 상상력을 넘어서는 인류의 더 높은 정신적 가치를 지향하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보았다. 이 말을 되새기면서 이제 그의 영화를 하나하나 읽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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