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희용 씨. ⓒ 이혜준
코스타리카 평가전이 열린 20일, 전반전이 끝났는데도 우희용 코치(38세)를 볼 수 없다. 광고가 끝나자 곧바로 이어지는 경기 분석. 다시 흘러나오는 광고, 아무래도 TV로 `축구공 묘기`를 보긴 틀린 모양이다.

"하하 연습이요? 많이 했죠. 88올림픽 이후 처음입니다. 흥분되네요."

`축구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도 얼마나 많은 것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람. 우 코치는 경기 전날 몹시 들떠 있었다. 국내 경기장에서 그것도 축구팬들 앞에서는 오랜만에 하는 공연. 하지만 23일, 그의 목소리는 침울했다.

"공연은 잘했죠. 그런데 관중 반응이...속상했습니다. 왜 제대로 소개를 안 해주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요."

[동영상 보기] 세계가 인정한 볼리프팅 시연 - 이혜준 기자

`미국 하와이 주립대학 여자 축구팀 코치이자 축구공 묘기의 달인`(일간스포츠), `사커 아티스트`(KBS 비바 월드컵), `세계를 제패한 축구 묘기의 신화! 오늘의 기인(奇人)`(MBC)까지. 지난해 12월 우 코치가 귀국한 후, 국내 언론사가 그에게 붙여준 호칭은 다양했다. 하지만 가장 구체적인 표현은 인터뷰 도중 사인을 부탁한 아주머니로부터 나왔다.

"어유, 그럼요. 잘 알죠. 그...뭐냐. 머리로 공 잘 받는 분이잖아요."

우 코치의 공연은 발, 어깨, 이마 등으로 공을 튕기는 일을 계속하는 볼 리프팅(이하 `리프팅`)에서 출발한다. 공에 대한 감각을 키워 개인 기술을 발전시키는 축구의 기본, 리프팅에 우 코치는 숭실 고등학교 축구부 시절부터 특별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팀에서 가장 키가 작은 데다가 볼의 높이는 늘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볼을 헤딩하려면 다른 선수들 보다 훨씬 더 높이 점프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다른 것보다도 이 연습이 오늘날 내가 높이 뛰어 오를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켰다고 생각한다. (펠레의 자서전 `나의 인생과 아름다운 게임`중에서)

우희용 씨와 축구공. ⓒ 이혜준
170cm. 훌륭한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던 열일곱 살의 소년이 넘어야 할 장벽의 높이였다. 남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개인기가 필요했다. 혼자서 리프팅을 열심히 연습했고, 한편으로는 `다른 선수들 보다 훨씬 더 높이 점프`를 하기 위해 뛰고 또 뛰었다. 그러나 결과는 펠레와는 너무 달랐다.

"고등학교 3학년때였습니다. 무릎이 너무 아픈 거에요. 자라는 뼈에 이상이 생겼다고, 무릎을 더 이상 쓰면 안된다고 하더군요."

의사의 진단과 함께 `대학`도 남의 얘기가 되버렸다. 축구를 전부로 알았던 소년은 희망을 찾을 수 없었다. 군대를 다녀오는 동안 무릎은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지만, 축구 선수가 될 수 있었던 금쪽같은 기회는 이미 날아가 버린 후였다.

"우리나라에서는 한번 틀에서 벗어나면 선수로 복귀하기가 굉장히 어렵잖아요. 공백 기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은행을 다니게 됐어요. 재미없었죠. 너무 착잡했습니다. 20대 중반에 선수 생활을 완전히 접게 됐으니까요."

그래도 `축구`로 살고 싶었다. 우 코치에게 남겨진 건 축구공뿐, 남보다 뛰어난 리프팅 기술로 승부를 걸었다. 88올림픽 주경기장 공연, 1989년 6월에는 헤딩 논스톱 부분(5시간 6분 30초, 389,694회) 기네스북에 올랐다. 하지만 공연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저건(리프팅은) 축구가 아니다, 그런...얘길 들을 때가 많았어요. 공연이 끝나면 `너 왜 했니`라는 분위기였죠.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대로 땅바닥에 공을 떨어뜨릴 수는 없었다. 축구 선진국이라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것 같았다. 아는 영어라곤 `오케이와 댕큐`뿐이었지만, ○○○ 생활 영어를 파고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 하나만 달랑 들고 낯선 땅으로 간다는 건 역시 큰 용기가 필요했다. 우 코치는 쉽게 떠날 수 없었다. 더구나 그는 외아들, 오손도손 함께 살고 싶은 부모님의 작은 소망까지 저버릴 수 없었다. 1990년 이탈리아로 월드컵 대표팀이 떠나기 하루 전날, 한 장의 티켓은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는다.

"당시 국가대표팀 항공권 발매를 담당한 여행사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혹시 남는 표 있냐?`, 그냥 지나가는 말로 물어봤는데, 딱 한 장이 남아 있다는 겁니다. 대표팀과 동행하기로 했던 기자 한 명이 부모님 상을 당했기 때문이었어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야겠다."

제2의 축구 인생을 약속해 줄 땅에 도착한 우 코치는 먼저 자신이 누군지 알려야 했다. 돈 안 들이고 `우희용`을 홍보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역시 축구 경기장 주변. 신기에 가까운 리프팅은 구경꾼들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문제는 소문이 퍼져 나갈 때까지 버티기에는 턱없이 모자란 돈. 한동안 우 코치는 한두 푼의 관람료(?)로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해야 했다.

"현지 교민 중에 도와주는 분들이 계셨어요. 덕분에 어려움을 견뎌냈습니다. 그러다 엔싱어(Ensinger)라고 독일의 큰 음료 회사에서 스폰서를 자청하고 나섰어요."

이젠 거침이 없었다. 분데스리가 경기, 유럽컵 결승전 등 각종 행사를 통해 `우희용(Woo Hee Yong)`은 곳곳에 알려졌다. 1990년 10월, 마침내 그는 월드컵 개막전이 열렸던 메아차 스타디움에 우뚝 설 수 있었다. `축구황제`의 생일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세계적인 이벤트, 50세의 펠레가 소속된 브라질 대표팀과 세계 올스타팀 경기에서 공연하게 된 것.

"원래는 경기 시작전 5분만 할 예정이었는데, 하프타임에도 공연을 하게 됐죠. 너무 반응이 좋았습니다. 펠레가 다가와 말했어요. 이렇게 훌륭한 축구 묘기를 본 적이 없다. 축구의 아름다움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고맙다. 나는 축구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신은 예술 축구의 황제다."

그렇다면, 20일 대구 월드컵 경기장을 찾은 관중들은 펠레도 인정한 공연을 왜 맘껏 즐기지 못한 걸까. 대체 어떻게 소개가 됐기에.

"`우희용 씨의 축구 묘기가 있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밖에 안해주더라구요. 물론 전광판에는 나왔죠. `예술 축구 황제 우희용`이라구요."

ⓒ 이혜준
-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소개하는데요?
"어유- 내가 원하는 거는 일일이 다해주죠. 공연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쇼를 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차이가 커요. 제가 알죠. 공식적인 하프 타임 쇼라는 게 확실히 인지되면, 동작 하나 하나마다 `야 잘한다`는 반응이 나타나거든요."

- 우리 관중들은 시간 때우는 공연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겠네요.
"그렇죠. 어차피 팬 서비스 차원에서 하는 거 아닙니까.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하면, 그래서 좋은 공연이 되면 팬들도 `요즘 축구 문화 좋아졌구나`는 그런 반응들이 나올 수 있잖아요. 그럼 결국은 축구 발전에 도움되지 않겠어요?"

- 많이 속상하셨나봐요.
"한편으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정말 절실하게 운동장을 찾아 준 팬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면 그렇게 안 할 겁니다. 안타까웠습니다. 아직까지도 많이 변하지 않았구나."

덧붙이는 글 | 우희용 코치와의 인터뷰 두번째 `42.195km, 9시간 17분`이 이어집니다.

2002-04-27 10:08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우희용 코치와의 인터뷰 두번째 `42.195km, 9시간 17분`이 이어집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