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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떠올리게 하는 '초선의원'의 의미

[셰익첵의 연극&] <초선의원>

24.04.12 09:53최종업데이트24.04.12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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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선의원> 포스터 극장에서 찍은 연극 입간판. ⓒ 편성준

 
88 서울올림픽 준비 열기로 가득한 1987년의 부산 시내.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방송국 여성 리포터가 카메라 앞에 서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인터뷰한다. "올림픽이 열리게 된 대한민국,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네. 우리나라 국민들, 정말 대단하지요. 그런데 왜 정부는 국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정치활동을 금지시킵니까?!" 당황한 리포터가 마이크를 빼앗아 카메라를 보고 어색하게 웃으며 말한다. "네. 일반 시민인 줄 알았는데 불량시민이었습니다." 이번엔 지나가던 대학생을 인터뷰한다. 공부만 하게 생긴 그 남학생은 가슴에서 불온 유인물을 꺼내 길거리에 뿌리며 외친다. "독재타도! 호헌철폐!", "아, 네. 일반 학생인 줄 알았더니 운동권 학생이었습니다..." 리포터는 죽을 맛이 된다. 유쾌한 반전이다. 

'명랑 정치 스포츠 연극'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는 <초선의원>을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보았다. 2022년 초연 이후 세 번째 관람이다. 처음 볼 때 너무 재밌어서 연거푸 두 번을 관람했기 때문이다. 나는 극작가 오세혁과 연출가 변영진을 이 연극으로 처음 만났다. 오세혁 작가는 우리에게 '신념을 꺾지 않고 정의롭게 살면서도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준' 대통령 노무현의 초선의원 시절만 따로 떼어 그려보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덕분에 비극의 기운이 없는 힘찬 연극이 탄생했다.

변호사로 일하며 억울한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을 돕던 최수호는 어렵게 국회의원이 되어 패기 넘치는 의원 생활을 시작하고 길거리 인터뷰 때 만났던 대학생 이명제는 감방에 다녀온 뒤 보좌관이 되어 최수호를 돕는다. 그러나 막상 들어간 국회는 끼리끼리의 당파 결성과 치사한 이합집산이 판치는 정글이었고 국회의원들은 먹이를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였다. 그 와중에 선거와 정치가들의 싸움을 올림픽 종목인 달리기, 양궁, 탁구 등으로 표현한 장면들은 아이디어가 넘치고 배우들의 악에 받친 연기에 힘입어 배꼽을 잡을 정도로 재미있다. 
 

▲ 초선의원 캐스팅 보드 공연장에서 관극 당일 찍은 캐스팅 보드 사진. ⓒ 편성준

 
최수호의 진가가 발휘된 건 1988년에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뜨거웠던 연속 생방송 '5공 청문회'였다. 전두환 일당의 뻔뻔하고 비열한 대응과 변명에도 불구하고 최수호는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파악한 팩트들을 들고 송곳 같은 질문으로  청문회 현장을 달구었던 것이다. 실제로 한때 별명이 '청문회 스타'였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연극 도중 자료화면에 나오는  모습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 나는 정말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했고 그리워했던 것이다.

이 년 전에 성노진 배우가 맡았던 최수호 역을 이번엔 김대곤 배우로 보았는데 이 배우도 캐릭터 구축부터 대사 톤까지 너무나 뛰어났다. 보좌관 이명제 역은 역시 김건호 배우였는데 그동안 연기력이 더 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 변영진 감독은 <이카이노 바이크>나 <쇄골에 천사가 잠들고 있다> 같은 가슴 찡한 작품도 잘 만들지만 여 연극이나 <세상친구>처럼 배우들에게 마구마구 소리를 지르게 하는 '난장 연출'의 대가인 듯싶다. 배우들이 두 시간 가까이 춤추고 운동하고 노래하고 대사 하느라 쓰러질 지경인데 그래도 다들 표정이 즐겁다. 특히 탁구를 치는 장면에 주목하라.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인 것 같다. 

대학로에서 '네버 엔딩 스토리'라는 창작 집단을 이끌고 있는 오세혁 작가는 <보도지침>의 극본을 썼고 <데미안> <브론테> <브라더스 오브 까라마조프> 같은 뮤지컬을 쓰고 공연하는 제작자이기도 하다. 요즘은 중국으로 연극을 수출하기도 하고 이정재의 영화 <헌트>의 극본을 쓰기도 했다. 정말 부지런한 재주꾼이다. 리뷰를 쓰려고 보도자료나 기사들을 찾아보니 이 연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르는 20~30대나 MZ세대들에게 더 인기가 많다고 한다. 

좋은 작품이 시대정신과 만나 그렇게 된 것이다. 총선이 끝났으니 지금의 선거와 정치 상황을 복기하고 새로운 미래를 꿈꾸는 의미로 이 연극을 봐도 좋을 것 같다. 아내와 나는 요즘 볼 만한 연극을 찾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이 연극을 추천한다. 누구라도 즐겁고 뜻깊게 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인터파크에서 간단히 예매할 수 있다. 2024년 5월 12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상연한다. 왜 자유극장인가 했더니 빌딩 이름이 자유빌딩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브런치에 올린 리뷰를 수정한 것입니다.
연극리뷰 셰익첵 초선의원 네버엔딩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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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라이터 출신 작가. 『부부가 둘 다 놀고 있습니다』 등 세 권의 책을 냈고 성북동에 있는 한옥집을 고쳐 ‘성북동소행성’이라 이름 붙여 살고 있습니다. 유머와 위트 있는 글을 지향하며 출판기획자인 아내 윤혜자, 말 많은 고양이 순자와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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