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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누명 쓴 사형수, '철수' 구하기에 나선 사람들

[리뷰]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23.09.08 16:54최종업데이트23.09.0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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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한 한국인 청년이 범인으로 지목된다.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썼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종신형을 받아 감옥에 수감된다. 그리고 이 사건은 두고두고 평범한 한 청년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나비효과로 이어진다.
 
누명으로 시작하여 진짜 살인자가 되어야했고, 사형까지 당할뻔 하다가 간신히 명예를 회복하는 듯 했지만 또다시 긴 방황을 거듭해야했던 기구한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이철수'씨라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비극은, 미국 사회에서 차별받던 소수민족 출신의 인권 문제를 공론화시킨 대표적인 사건이 됐다.
 
억울한 누명으로 인생이 바뀐 남자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SBSS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SBS

 
9월 7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이상한 나라의 철수 리'편을 통하여 억울한 누명으로 인생이 바뀐 한 남자의 가슴아픈 실화를 조명했다.
 
1979년 미국에서는 'The Ballad Of Chol Soo Lee(이철수의 노래)'라는 노래가 등장했다. 노래의 주인공은 '이철수'는 한국인이고, 미국 사회에서 뜨거운 화제의 중심에 섰던 실존인물이다. 
 
이야기는 노래가 등장하기 6년 전인 1973년 6월 11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21살의 한인 청년인 이철수는 다섯 명의 중국인들과 함께 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붙잡혀 경찰서에 있었다. 일주일전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서 총기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사망한 사람은 차이나타운 갱단의 간부인 입이탁이라는 인물이었다. 미국 경찰은 이 사건을 차이나타운을 장악하던 두 중국인 갱단의 세력다툼으로 판단했다.
 
경찰에 체포된 이철수는 당시 6명의 목격자 중 3명으로부터 범인으로 지목받았다. 미국 경찰은 이철수가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범인이자 갱단의 청부를 받은 '킬러'라고 발표했다. 1년 후 법정에 선 철수에게 종신형 판결이 내려졌다. 당시 세상은 살인을 저지른 동양인 중범죄자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사건은 금세 잊히는 듯했다.  
 
4년 후, 이철수의 이름이 다시 세상에 등장한다. 이철수가 교도소에서 또다시 살인을 저질렀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당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철수의 살인죄가 인정될 경우, 부활된 새 사형법에 따라 10년 만의 첫 사형수가 바로 이철수가 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 사건은 언론에도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당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계 유재건 변호사와 이경원 탐사보도 전문기자에게도 전해졌다. 두 사람은 이철수 사건에 대한 궁금증을 느꼈고, 어쩌면 이철수가 범인이 아니라 누명을 썼을 수도 있다는 의구심을 가지게 됐다. 
 
유 변호사와 이 기자는 이철수를 만나기 위하여 교도소로 찾아갔다. 이철수는 죄질이 아주 나쁜 중범죄자를 수용하는 트레이시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당시 25세의 이철수는 처음엔 두 사람을 경계하며 냉랭한 반응을 보일만큼 사람에 대한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이경원 기자는 당시 이철수의 모습을 "외톨이 한국인"이었다고 회상했다. 이철수는 낯선 외국의 감옥에서 홀로 한국인으로 고독한 수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이 기자 역시 당시 미국 주류 언론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한국 기자로서 이철수에게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유 변호사는 "한국의 슬픈 역사는 모두 경험한 남자"라고 이철수의 인생을 요약했다. 이철수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8월 15일 광복절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철수는 당시 한국에서 남자로서 가장 흔한 이름중 하나였다. 그의 어머니는 생면부지의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이철수를 임신했다. 어린 시절의 이철수는 이모 밑에서 자랐고, 12살에 자신을 데러러 온 어머니를 따라 미국으로 갔다.
 
생계를 위하여 일하기 바빴던 어머니는 이철수를 돌볼 시간이 없었다. 영어를 못했던 이철수는 미국에서의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하여 방황했고, 소년원에 들락거리기도 했다. 이철수는 성인이 되어서도 항상 고독했으며, 한국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이모와의 유년 시절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철수는 "변호사님 억울하다"라며 비로소 자신이 겪은 4년 전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진실에 대해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이철수는 총기 소지가 쉬운 미국에서 동료한테 빌린 권총을 호기심에 여기저기 만져보다가 실수로 오발사고를 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출동한 경찰은 총알을 수거해 돌아갔다.
 
그런데 며칠 후, 돌연 경찰이 다시 찾아와 이철수를 살인 사건의 용의자로 체포했다. 이유는 총알이었다. 갱단 간부 입이탁을 살해한 총알과, 이철수가 실수로 발사한 총알이 둘 다 38구경으로 크기가 같았다. 피해자와 용의자가 모두 동양인이고 총알이 같다는 이유로 경찰은 두 사건이 연관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철수는 경찰서에 가서도 금세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주변에 같이 선 용의자들은 이철수를 제외하면 모두 중국인들이었다. 그리고 맞은편의 목격자들은 훗날에 밝혀졌지만 모두 백인이었다. 이들이 범인을 목격한 시간은 고작 2~3초. 백인의 시선에서 동양인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범인을 파악하기에 충분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당초 목격자들은 범인의 신상에 대하여, '장발, 신장 178cm, 동양인 남성, 콧수염은 없음'이라고 증언했다. 이철수는 160cm대 신장에 콧수염이 있었기에 용의자의 인상착의와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무려 세 명의 목격자가 일제히 이철수를 지목했고, 이 증언은 이철수가 범인으로 몰린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이철수는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챘지만 변호사를 부를 돈도, 결백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한국 영사관에서 왔다는 직원은 이철수의 결백을 믿어주지 않고 오히려 빨리 자백할 것을 종용했다고 한다.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고. 판사와 검사, 변호사, 배심원, 증인까지, 이철수 빼고는 모두 백인으로 구성됐다. 아무런 도움도 받지못한 이철수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악명 높은 트레이시 교도소에 수감되어야했다.
 
교도소의 죄수들은 대부분 흉악한 갱단 출신이었고, 인종별로 세력이 철저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이철수는, 여전히 혼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4년 후인 1977년. 이철수는 감옥 안에서 모리슨 니덤이라는 죄수를 우발적으로 살해하게 된다. 모리슨은 백인 갱단의 일원이자 유색인종들을 혐오하는 백인우월주의자였다. 모리슨이 먼저 이철수를 갑자기 공격했고, 이철수는 몸싸움을 하며 저항하다가 모리슨이 갖고 있던 칼을 빼앗아 상대를 찔렀다. 모리슨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철수는 비록 자신을 보호하려고 한 정당방위이기는 했지만, 이번엔 진짜로 사람을 죽이게 된 것이다.
 
당시 캘리포니아주에서 부활한 사형법에는, '두 번의 1급 살인을 저지른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됐다. 이 사건에서 이철수가 정당방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이철수는 두 번의 살인죄로 사형 판결을 받게 되는 상황이었다.
 
이철수에게는 유 변호사와 이 기자를 만나기 전에 유일한 조력자가 있었다. 란코 야마다, 일본인 이민 3세로 당시 대학생이자 이철수와는 친구 사이였다. 외톨이로만 알려진 철수한테 친구가 있었다는 사실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란코가 처음부터 이철수의 결백을 믿고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함께 해준 최초의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란코는 이철수와의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으로 체포되기 1년 전인 1972년에 처음 만났다. 그녀는 이철수를 가리켜 "좋은 사람, 친절한 사람, 그리고 친구가 필요해 보이는 외톨이였다"고 정의했다. 신문에서 이철수의 사건을 알게 된 란코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철수가 대낮에 차이나타운 교차로에 누군가를 죽이러 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제가 아는 그 사람은 아니었다"고 확신했다.
 
란코는 유일하게 이철수의 무고함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자 한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다. 사실 이철수는 란코에게 한때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란코에게 가장 중요했던 건 '죄 없는 사람이 벌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확고한 신념과 정의감이었다.
 
당시 란코는 혼자서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했으나 돈도 힘도 없는 여대생으로서는 한계가 있었다. 란코는 이철수를 돕기 위하여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그 사이에 재판이 시작되고 친구가 종신형을 선고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무력감을 느꼈다.
 
하지만 란코는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엄청난 결심을 하게 된다. 놀랍게도 바로 '이철수를 위해 변호사가 되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일하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란코는 사건이 벌어진 지 2년 만이 1975년, 로스쿨에 진학했다. 그리고 란코가 로스쿨 졸업을 앞둔 시점에 이철수가 교도소에서 두 번째 살인혐의로 사형 위기에 몰린 것이다.
 
절망적인 순간에, 란코와 유재건 변호사, 이경원 기자는 '이철수 구출작전'을 위하여 처음 만나 의기투합했다. 란코는 "뭔가를 오래 하다 보면 어느 시점엔가 좋은 일들이 하나로 모이게 되는 것 같다. 유재건 변호사는 사람의 마음을 이끄는 호감가는 성격을, 이경원 기자는 의욕적이고 맹렬하고 투지가 넘쳤다. 이 모든 다양한 힘들이 하나로 합쳐져야 했던거다. 혼자만 앞선다고 그 일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라고 회상했다.
 
이 기자는 1978년 1월 <새크라멘토 유니언>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패러디한 '차이나타운의 철수리'라는 기사를 올리며 이철수 사건에 대한 문제를 공론화했다. 기사는 재판 과정에서 이철수가 동양인이라 차별 받았고, 인간으로서 누릴 기본권을 뺏겼다며 미국의 사법권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기사가 나온 후, 반응이 뜨거웠다. 이철수가 범인인 줄 알았던 한인 교민들도 진실을 알게 되면서 '이철수 구명운동'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그동안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로 숨죽여 살아가는 한인들은 이철수 사건을 기점으로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크라멘토를 시작으로 LA, 시애틀, 뉴욕, 하와이 등에 이철수 구명위원회가 만들어졌다. 한인들은 "Justice for Chol Soo Lee(철수에게 정의를)"를 한 목소리로 외치며 이철수가 공정한 재판을 받을수있도록 호소했다. 이 움직임은 바다 건너 한국까지 전해졌고 시민단체 등을 통하여 이철수의 구명과 석방을 탄원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늘 외로웠던 이철수에게 더 이상 혼자가 아닌 든든한 같은 편들이 생긴 것이다.
 
구명위원회는 유 변호사와 이 기자를 중심으로 변호인들을 모으고, 후원금을 모집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언론을 통하여 이철수의 무고함을 알리는데 집중했다. 이철수는 자신을 찾아온 또다른 기자에게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저는 천사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악마도 아니다. 제가 어떤 사람이었든, 저지르지도 않은 살인죄를 뒤집어씌우고 감옥에 가두는 건 정당하지 않다"라고 주장했다.
 
시간이 지나며 구명운동에는 한국인만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 필리핀 같은 같은 아시아계에서 일부 흑인들까지 동참했다. 어느새 이철수 구명운동은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범아시아적 인권 운동으로 진화했다. 'The Ballad Of Chol Soo Lee'라는 노래도 이때 만들어졌다.
 
1978년 10월 27일. 구명위원회는 재심 신청을 하고, 이철수를 다시 재판해달라 요청했다.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인권변호사 레너드 와인글래스도 동참했다.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에 대하여 현지 언론에서도 '만분의 일'이라 표현할만큼 확률은 희박했다. 재판을 뒤집을만한 확실한 증거와 결정적인 증인이 필요했다.
 
란코는 사건을 조사하면서 차이나타운 살인사건의 진범을 알고 있는 진짜 목격자 '미스터 X'를 찾아냈지만, 그는 갱단의 보복이 두려워 끝내 증인으로 나서길 거부했다. 고심하던 변호팀은 서류를 조사하다가 '스티브'라는 새로운 목격자를 찾아낸다. 변호팀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사립 탐정까지 고용하여 사라진 목격자 스티브를 마침내 찾아냈다.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한 스티브는 사건 당시 권총을 쏘는 범인을 목격했다고 밝혔다. 그는 가까운 거리에서 범인을 오랜시간 똑똑히 목격했고, 그가 이철수가 아니라고 증언했다. 이철수의 변호인단은 이런 중요한 증인이 왜 수사과정에서 빠졌고, 왜 변호인에게 알리지 않았는지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이철수를 범인으로 조작했던 정황도 밝혀냈다. 결국 이철수의 재심 신청은 받아들여졌다. 구명위원회는 이때부터 ''철수에게 정의를'이던 구호를 'Free Chol Soo Lee(철수에게 자유를)'로 바꿨다.
 
하지만 아직 갈길은 멀었다.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진 것과 별개로, 교도소 살인사건의 재판1심에서는 이철수의 유죄가 인정되며 사형이 선고됐다. 또한 재심의 판결이 나오기까지 3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시간은 흘러 1982년. 어느덧 이철수가 수감된 지 9년이 지났다. 이철수는 "저지르지도 않은 죄로 교도소에 갇힌 게 씁쓸하지만, 동시에 매우 감사하기도 하다. 제 사건이 아시아인 공동체에 경험적 사례가 되었으니까"라며 "제가 교도소에서 보낸 시간은 그저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 아시아인들에게 우리가 원하면 함께 해낼 수 있다는 일종의 교훈을 준 것"이라며 지난 9년의 의미를 담담하게 회상했다.
 
첫 번째 살인사건인 차아나타운 살인사건의 재심 판결이 공개됐다. 그동안 변호인단에는 로스쿨을 마친 란코가 어엿한 '이철수의 변호사' 신분이 되어 합류했다.
 
차이나타운 살인사건 재심 판결이 내려지는 날이 찾아왔다. 만장일치어야만 인정받는 배심원 평결은 3일이나 걸린 끝에 나온 결과는, 이철수의 '무죄'였다. 재판이 끝난 후, 객석을 가득 메운 100여 명의 한인들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애국가를 불렀다. 이철수의 구명운동을 시작한지 약 5년만의 성과였다. 란코는 눈물을 흘리며 "불가능을 이겨냈다. 다들 펄펄 뛰며 소리 질렀다.정말 전율이 흘렀다"며 감격스러운 순간을 회상했다.
 
하지만 이철수에게는 다시 두 번째 살인사건의 재판이 남아 있었다. 구명위원회는 촛불시위를 시작하며 '애초에 죄 없는 사람을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면, 옥중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1983년, 두번째 사건의 항소심이 열렸다. 2심에서는 '사형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한다'라는 판결이 나왔다. 무죄가 아니라 사건을 원점으로 되돌려서 재판을 다시 시작해야하는 절반의 승리였다. 하지만 이철수는 이제 더이상 사형수가 아니라 보석금을 내면 밖으로 나갈 수도 있는 신분이 됐다.
 
이철수의 보석금은 당시 법정 최고액인 25만 달러라는 거액이었다.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철수를 돕기 위하여 나섰다. 놀랍게도 유재건 변호사와 란코의 부모님은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집을 담보로 맡기기도 했다. 그만큼 이철수의 결백을 완전히 신뢰한 것이다.

10년 만에 자유의 몸이 된 이철수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SBS

 
1983년 3월 28일, 보석금을 지불하고 이철수는 마침내 석방됐다. 반쪽짜리 자유이긴 하지만, 억울하게 수감된지 무려 10년 만에 누리는 세상의 빛이었다. 이철수는 유변호사와 란코 등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을 일일이 포옹하며 "여러분이 보낸 지지에 마음 깊이 감사드린다. 오늘 제가 자유를 되찾도록 지지하고 믿어주셔서 감사하다"며 소감을 밝혔다. 이후 이철수 측은 두번째 살인사건에 대한 검찰과의 형량 협상을 통하여 '우발적 살인'을 인정하는 대가로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됐다. 무려 10년 2개월만이었다.
 
이처럼 '이철수 신드롬'은 미국 사회에서 비주류 소수민족들에게 한때 차별과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교도소를 나온 이후 이철수 본인의 후일담은 동화같은 해피엔딩으로 흘러가지는 못했다.
 
10년 넘는 감옥 생활의 후유증이었을까. 이철수는 일자리도 갖고 사회에 적응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또한 이철수는 차이나타운 갱단의 보복을 두러워하며 불안하게 지냈다고 한다. 결국 이철수는 술과 마약에 손을 대며 방황에 빠졌고, 이는 그를 믿고 도와준 이들에게도 실망감과 상처를 남겼다.
 
또한 이철수는 범죄현장에서 얼굴과 몸 전체에 큰 화상을 입는 부상을 당하게 된다. 마음뿐 아니라 몸까지 망가지게 된 뒤에야 이철수의 방황은 겨우 멈출 수 있었다.
 
이철수씨는 남은 생애 동안 마약 퇴치 등 사회 운동에 힘쓰다가 2014년 2월,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철수의 평생 은인이자 친구인 란코씨는 "끝에는... 그도 행복한 사람이었다"고 이철수의 마지막 순간을 회고했다.
 
이철수 사건은 이후 미국 사회에 많은 영향을 줬다는 평가다. 미국에서는 이민자가 100명 이상인 학교에서는, 그 나라의 언어를 하는 교사를 의무적으로 두게 했고, 소수민족이 재판 받을 땐 인권이 침해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피게 되는 전례로 남았다. 비록 이철수의 인생이 행복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그로 인해 조금은 더 좋은 좋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철수는 모두가 기억하고 있는 자신의 얼굴을 잃고 나서야, 비로소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이철수의 인생이, 그가 투쟁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던 것은, 오랜 시간 묵묵히 그의 곁에서 함께 결백을 믿어주고 싸워주고 응원해준 란코같은 친구들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 아닐까. 
꼬꼬무 이철수사건 인종차별 소수민족 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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