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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 문제의식' 떨어지는 한국, 그건 농담이 아니다

[주장] 인종차별적 발언에 대한 경각심 부족... 유럽-미국이었으면 더 큰 논란 됐을 것

23.06.13 14:43최종업데이트23.06.1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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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차별은 세계적으로 인류사의 오래된 딜레마다. 다행히 현대에는 특정 인종을 노골적으로 모욕하거나 비하하는 것은 명백한 '차별과 혐오' 행위로 인정되어 법적인 처벌까지 받을수 있다. 이제는 최소한 '잘못된 짓'이라는 데 모두가 합의할 만큼은 인식이 발전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 인종차별은 아직도 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안타깝지만 한국 사회와 스포츠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최근 K리그 무대에서 인종차별 논란이 발생하여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울산 현대 소속 프로선수들과 구단 관계자가 지난 10일 SNS상에서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으며 '피부색'과 '특정 인종'을 빗댄 저급한 농담을 나눈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동남아시아 쿼터 든든하다", "사살락 폼 미쳤다", "사살락 슈퍼태클", "니 때문이야 아시아쿼터" 등의 답글을 주고받았다.
 
여기에는 리그에서 뛰었던 외국인 선수의 실명까지 언급하며 조롱하는 내용도 포함되어있었다. 사살락은 K리그 전북 현대에서 잠시 활약했던 태국 출신 선수다. 이명재의 피부색이 짙은 것을 동남아시아 쿼터 및 사살락에 비유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특정인-인종에 대한 명백한 모욕이자 인종차별에 해당하며 이들은 사살락과 별다른 인연이나 친분도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가담한 이명재, 박용우, 이규성, 정승현 등은 모두 20대 후반으로 철없는 어린 선수도 아니고, 엄연히 프로에서도 중고참급에 해당하는 성인들이다. 이들 중에는 소속팀에서 주장단에 포함된 선수도, 성인 국가대표도 있었다. K리그를 대표한다는 명문클럽에서 활약하며 '리더' 역할을 맡고 있는 선수들.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을 대표한다는 선수들이 인종차별을 저지른 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심지어 이를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SNS라는 공개 석상에서 표현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한 이유다.
 
인종차별적 발언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울산 현대 박용우 ⓒ 울산 현대 홈페이지 캡쳐

 
논란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해당 선수들은 뒤늦게 게시물을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울산 현대 구단과 한국프로축구선수협회도 12일 공식 채널을 통하여 각각 사과문을 게재했고 재발방지 대책을 약속했다 하지만 이미 외신과 SNS를 통하여 해외에도 알려지며 사태는 여전히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울산을 넘어 K리그 전체의 이미지까지 실추시킨 '국제망신'으로 번진 것이다.
 
피해자인 사살락도 입장을 밝히며 "비난하는 이들에게 신경쓰지 않는다. 지금까지 내가 잘 해왔다고 믿고 오늘날까지 싸워온 나 자신이 자랑스럽다"로 해당 선수들에게 우회적으로 일침을 놓았다. 분노한 동남아시아팬들의 성토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 팬들 사이에서도 해당 관계자들을 엄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번 사건이 씁쓸한 것은,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전형적인 길을 밟아버린 한국 스포츠계의 모순, 그리고 우리 사회에 은연중에 잠복해있던 차별과 혐오의식의 부끄러운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데 있다.
 
한국 스포츠는 그동안 인종차별과 관련된 문제가 터질 때마다 '피해자'의 입장에 있었다. 야구의 박찬호, 축구의 박지성 같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 해외무대에서 활약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인종차별 일화들은 많은 한국인들을 분노하고 가슴아프게 했다. 동양인의 작은 눈을 조롱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찢는 포즈을 취하고, 마늘냄새가 난다고 코를 잡고, 온-오프라인에서 동양인을 비하하는 혐오성 발언을 듣기도 한다. 지금의 손흥민-이강인같은 현 세대의 스타들도 최근까지 잊을 만하면 한번씩 인종차별을 당하기 일쑤다.
 
그런데 과연 한국 스포츠는 인종차별의 안전지대라고 할 수 있을까. 유감스럽게도 이번 울산 현대 사건이 터지기 전에도 이미 유사한 사례들이 여러 차례 존재했다. 야구선수 최형우는 SNS에서 대화를 주고받다가 상대팀 외국인 감독이던 유색인종의 제리 로이스터를 가리켜 '깜둥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엄청난 뭇매를 맞고 사과했다. 김태균(은퇴)은 외국인 투수였던 쉐인 유먼의 피부색을 빗대어 "얼굴이 까매서 웃을 때 치아와 던지는 공 색깔이 겹쳐보인다"는 망언을 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한국에 귀화한 농구선수 라건아와 혼혈 출신 전태풍은 SNS에 DM으로 쏟아지는 일부 안티팬들의 온갖 인종차별성 혐오 발언에 대하여 고통을 공개적으로 호소하기도 했다.
 
무지가 가해를 정당화할 순 없다

여기에는 인종차별의 심각성에 대한 문제인식 자체가 낮다는 점도 있음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인종차별이 잦은 만큼 사안 자체를 민감하게 여기는 미국이나 유럽에 비하여, 단일 민족과 문화권 개념이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는 이에 대한 경각심이 부족했다.
 
이러다보니 온라인이나 SNS에서는 익명에 기대어 수시로 공공연하게 외국인이나 특정 인종-국적을 비하하는 발언을 일삼고도 문제인식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흑형', '흑누나', '깜둥이', '시커먼스', '동남아스럽다' 등 과거부터 현재까지 피부색이나 인종을 빗댄 온갖 차별-비하적 표현과 비속어들이 그저 가벼운 농담처럼 소비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국내에서는 인종차별이나 혐오 이슈로 인하여 큰 처벌이나 징계를 내린 사례가 드물다보니 어지간한 일은 해프닝 정도로 넘어가는 분위기가 강했다.
 
이번 사태를 일으킨 울산 선수들도 처음부터 고의적으로 인종차별의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지인들끼리 평소에 일상적으로 주고받던 '가벼운 농담 혹은 장난'으로만 인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죽을 수 있다'는 격언처럼, 무지와 무식이 더이상 가해를 정당화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이른바 '잘 몰라서' 저지르는 개인의 우발적 실수라고 해도 그에에 대한 책임과 원칙이 바로 서 있지 않으면 또다른 누군가에 의해서 같은 실수와 시행착오가 반복될 수밖에 없다.
 
울산 선수들이 사살락을 빗대어 나눈 불쾌한 대화들을 단지 농담으로 치부한다면, 만일 손흥민과 이강인이 유럽무대에서 일면식도 없는 다른 팀-다른 인종 선수들에게 똑같이 조롱의 대상이 된다고 가정했을 때, 과연 우리는 어떤 기분을 느낄까.

K리그를 비롯한 한국스포츠에는 이제 수많은 외국인 구성원들이 활약중이고, 한국 사회 자체도 점차 다문화 사회로 변화해가고 있다. 시대적 흐름에 맞추어 다문화에 대한 존중, 차별과 혐오에 대한 개념도 다시 정립되어야 할 시점이다. 만일 유럽이나 미국에서 이번 울산 현대 인종차별과 비슷한 사태가 벌어졌다면 지금보다도 더 큰 논란이 되었을 것이다. 관련자들은 엄중한 문책은 물론, 해당 분야에서 퇴출될 수도 있을 만큼의 중대한 사안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통하여 해당 선수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도 언제든 무의식중에 '차별과 혐오의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느껴야 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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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현대 인종차별 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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