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태 타이거즈 경기장면
ⓒ 해태 타이거즈 공식 홈페이지
야구장에 처음 간 것은 아마도 초등학교 2학년 무렵으로 기억된다. 연세대학교와 공군팀의 경기였다. 당시 연세대학교 선수로 활약 중인 최동원 선수의 팬이었던 어머니를 따라나선 것이 첫 경험이었다. 첫 번째 경험이라는 것이 설레임을 주기 마련이지만 내게 첫 경험한 야구는 재미 없는 게임이었다. 야구와의 인연, 해태와의 인연3시간 남짓 땡볕 아래에서 치고 달리고 하지만 고작 스코어는 2대 0. 요즘은 그같은 타고투저 현상이 보기 드문 훌륭한 투수전으로 되레 더 큰 긴장감을 주지만, 그 당시 그 경기는 어린 내가 자리를 지키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 점수가 나지 않았다. 참 재미 없었던 기억이 난다.한번은 전국 체전 시상식을 텔레비전으로 본 적이 있다. 서울이 1등, 전남이 2등을 한 시상식이었다(사실 광주가 광역시로 분리되기 전에는 전남이 전국체전의 막강한 강호였다).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지만 6살부터 서울에서 자란 나는 '엄마, 서울이 1등 했어'라고 얘기했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가 우승을 한 참 기쁜 소식이었는데 어머니의 반응은 의외였다. '넌 서울이 1등하면 좋니? 난 전남이 1등을 해야 좋은데.' 그러고 보니 서울에는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광주에는 사촌 누나들이며 형들이며, 방학이면 같이 실컷 어울려 노는 친척들이 살고 있었다. 나는 전라도 사람이었던 것이다.초교 4학년 때는 여름 방학이었지만 광주에 가도 재미가 없었다. 봄부터 텔레비전에서 광주가 어쩌고, 폭동이 저쩌고 하더니 서울 사는 친척이고 광주 사는 친척이고 모두들 기운이 없어 보였다. 외갓집에 갔을 때에도 모두들 우울한 모습이 되어서는 잘 웃지도 않고, 힘이 없어 보였다. 항상 제일 반갑게 맞이해주시던 외숙모님께서도 '애고... 우리 강아('강아지'라는 뜻인데 지역에서는 어린이를 이렇게 자주 부른다), 그래 잘 왔능가?'하시고는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 해 5월이 지난 후에 사촌 형들이 몇 년을 고생해야 했고, 고교 선생님이셨던 아버지께서 교단을 몇 년간 떠나셔야 했던 것도 모두 성년이 되어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프로야구는 그 다음 해에 시작되었다. MBC 청룡 이종도의 멋진 만루 홈런으로 개막된 프로야구는 사실 프로라고 하기에는 엉성한 면도 없지 않았다. 한 예로 당시 해태에는 투수들을 다 합쳐도 지금의 선발 로테이션 수준인 5명이었고, 타자인 김성한이 투수 겸업을 해야 고작 6명이었다.
ⓒ 해태 타이거즈 공식 홈페이지
각 팀별로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는데 해태에서는 회원비로 5천원을 받고 빨간 점퍼와 사인볼 등을 준 것으로 기억된다. 이때 해태의 빨간색(바지는 검은색이었다) 원정 유니폼은 정말 멋있었다. 친척들 모두가 해태가 패션 감각이 있다고들 칭찬이 자자했다. 하긴 빨강과 검정의 조화처럼 강렬한 색상 조합을 난 지금까지도 본 적이 없다.원년에는 OB 베어스(현 두산)가 삼성을 누르고 우승을 했다. '김유동' 이라는 선수가 개막전에서 만루 홈런을 맞았던 이선희 투수에게 다시 홈런을 때리며 대미를 마감했다. 해태는 전후반기 모두 4위 정도의 성적을 기록했다. 우승을 못한 아쉬움을 달래준 것은 개인 타이틀이었는데, 홈런왕 김봉연을 비롯하여 타점왕 김성한, 도루왕 김일권 등... 해태의 스타들은 많은 개인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때 나는 하얀 전지(全紙)에 사진을 붙이고 펜으로 글을 써서 교실 뒤에 붙여두는 주간 학급신문을 만들고 있었는데, 페넌트레이스가 끝난 후에 만든 신문에는 온통 프로야구와 개인 타이틀이야기만 실었었다. 속된 표현으로 '도배'를 한 것이다. 이때 여학생들이 '선생님, 모모는 학급 신문에 야구밖에 안 써요'라며 항의가 대단했다. 선생님께서도 '네가 좋아하는 것만 실으면 안 된다'고 꾸중을 하셨다. 참 이해가 가지 않는 말씀이었다. '목포의 눈물'을 목놓아 합창하던 관중들프로야구의 첫 시즌이 끝나 해태가 개인 타이틀을 휩쓸다시피하였는데 어떻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단 말인가?
▲ 해태 타이거즈 첫 우승 당시 장면
ⓒ 해태 타이거즈 공식 홈페이지
이듬해 해태가 첫 우승을 했다. 과자를 먹어도 '맛동산'만을 먹고, 아이스크림도 '누가바'와 '부라보콘'만을 고집하던 나는 세상의 한 가운데 선 기분이었다(이때는 광주에선 '롯데' 제품을 팔지 않고, 부산에선 '해태'를 팔지 않는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어린이 회원들에게 특별한 선물이 주어졌다. 온통 선수들의 사인으로 둘러싸인 야구공 하나는 그 후 오랜 시간 내 책상 위 첫째가는 주인공이었다. 그 후 해태는 80년대와 90년대를 휩쓸며 최고의 명문 구단으로 성장했다. 올해 프로야구는 20년째인데 그 간 18번의 한국시리즈가 열렸다. 그 동안 해태는 절반인 9번의 우승을 독식했다. 9번 한국시리즈에 올라서 시쳇말로 '아도'를 친 것이다. 매년 가을이면 경기장에는 '목포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고, 그 눈물을 아는 세대가 서서히 떠나갈 무렵부터는 '남행 열차'가 폭음을 울리며 내달렸다. 해태는 사람에 따라서 좋고 싫음이 너무 뚜렷한 팀이었다. 해태를 싫어하는 야구팬들의 첫째 이유가 '지역색'이라면 둘째는 '너무 잘해서'였다. 서울에 사는 나는 대부분의 경기를 동대문(초창기 서울 경기는 여기서 했다)과 잠실, 인천, 수원 등 수도권에서 관람했다. 경기가 끝날 때마다 홈 팬들보다 더 많은 해태 팬들이 '김성한'과 '김봉연' 등을, 조금 지나서는 '선동렬'을, 조금 더 지나서는 '이종범'을 외쳐대곤 했다. 소년 시절 나는 이 순간이 가장 감격적이었다. 나와 똑같이 어디 가서 '해태 팬'이라고 하면, '너 전라도 깽깽이구나'라며 원인 모를 적대감을 받던 사람들과 함께 '전라도'를, '해태'를 외칠 수 있다는 것.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도 어느덧 친숙한 동지가 되고 더 큰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며 나의 투혼(!)은 높아만 갔다. 사람들은 경기를 마치고 그 자랑스런 연호의 마지막엔 항상 '김대중'의 이름을 외치곤 하였다. 나 또한 함께 외쳤다. 목놓아 외쳤다. 다른 구단의 팬들은 이런 광(?)적인 모습을 손가락질하며 구구절절 말들이 많았다. 그러나 내가 정치의식이 거의 전무했던 시절이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그 표현들이 '군중 심리'이건, '왜곡된 정치 의식의 발호'이건, 아니면 '스포츠를 통한 조작된 우민화'의 일환이건 그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경기장에 소주병과 오물을 집어던지던 사람들(요즘 해태 팬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부정하고 싶다면 제발 이번 주말 야구장으로 직접 가시길... 설혹 한두 사람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제지하는 수백, 수천의 타이거즈 팬을 볼 수 있을 테니까)도, 경기가 시작하기 무섭게 술병을 비우다가 중반이면 이미 취중 천국으로 떠났던 사람들도 그 순간만큼은 모두와 함께 야구 이상의 그 무엇을 향한 깊은 갈구를 하였음을, 어쩌면 이러한 동질감에서 나온 에너지들이 합리적인 의식과 만나 현재의 사회를 만드는 데 하나의 바탕이 되기도 했음을 어떻게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무등산 폭격기'와 '바람의 아들'은 떠나고90년대에 접어들면서 덥수룩한 아저씨와 학생이 대다수였던 야구장에 젊은 여성 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넥타이를 맨 젊은 직장인들도 덩달아 늘었다. 잠실야구장에서 연인들이 함께, 가족들이 함께 오는 것을 보는 것이 낯설지 않아졌다. 곳곳에서 사회의 모습이 조금씩이나마 달라져 갔다. 대학에 다니던 내가 소위 '3S 정책의 소산'이라며 야구장을 부끄러워하는 동안 이런 변화들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 해태 팬들의 내공도 '선진 의식'의 함양 덕택인지 조금은 식어갔다. 더 이상 '경기장 난동'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고, 정치인의 이름을 연호하지도 않았다. 야구장에서는 '무등산 폭격기'가 일본 원정 폭격을 떠났고, 이어서 '바람의 아들'이 현해탄을 넘어갔다. 97년 한국시리즈에서 고(故) 김상진 선수의 역투로 9번째 우승을 가져간 것이 마지막 해태의 신화였다. 이 때가 현직 대통령이 당선되기 두 달 전이었다.97년 말 경제 위기 속에서 해태는 모 기업의 부도를 맞이했다. 그리고 서서히 그 빛을 잃어갔다. 대학과 군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나오면서 나는 다시 야구장을 찾아 나섰다. 잠실에서는 더 이상 해태 팬이 홈 팬보다 더 많은 관중을 동원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해태의 승리 소식이 스포츠 신문 1면 톱을 장식하지도 못했지만, 나는 돈이 없어 선수를 팔아야 하는 해태를 찾아 나섰다.
ⓒ 해태 타이거즈 공식 홈페이지

예전 중하위권 팀 팬들이 겪었을 그 묘한 상실감과 허탈감을 이제야 깨달으며, 때론 연패에 빠진 해태를 외면하려 애써 '박찬호 선발 등판'에 관심을 보이며 경기장을 찾곤 했다. 주말에 찾는 경기장에서 해태의 승리를 함께 하고 나면 그 일주일은 정말 충성파 '직딩이'가 되어 생활했다. 패전을 함께 하고 나면 다른 팀 팬들의 놀림 속에서 '9번 우승하고 와서 야구 얘기해!'라며 약 오른 마음을 대신했다. 미국에서 뉴욕 양키즈가, 일본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몇 년 부진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까지는 놀리지 않을 것이라 야속해 하면서... 여하튼 이때부터는 예전의 투혼보다는 생활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 야구장을 찾아다녔다. 마음 속 깊이 담는 그 간절함이야 속일 수 없었겠지만, 많은 야구팬들처럼 해태 팬들도 단지 즐기기(!) 위하여 야구장으로 나섰으리라. 광주에서 마지막 고별전을 보고광주에서 마지막 고별전과 고별식을 함께 하고 올라오던 새벽, 서울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 속에서 내내 나는 이 글의 마지막을 생각했지만 끝내 마음에 드는 끝맺음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실 나는 아직도 '스포츠는 우민' 혹은 '스포츠는 본성의 대리 만족'이라는 식의 일부 식자들의 논리에 대응할 만한 시원한 논리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말의 망설임을 쉽게 내치지 못한다. 그래서 글의 마감은 더욱 어려웠다. 아침 출근길 라디오 프로그램 스포츠 소식에서는 해태의 고별전 소식이 겨우 세 번째에나 흘러 나왔다. 놀라진 않았다. 해태의 고별전이 더 이상 학급 신문을 '도배'하지 못할 것을 이미 나도 알고 있으니까. 미국에서 수백 미터 거리의 작은 구멍에 공 하나 넣는 여성 동포의 3등 소식보다도, 몇 년간 플레이오프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팀의 한국인 선발 투수의 이야기보다도 훨씬 뉴스 상품성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나도 인정하니까. 7월 31일 열릴 예정이던 인천 원정 경기가 우천으로 취소되어 이제 더 이상 해태 경기는 볼 수 없게 되었다. 해태는 해태라는 이름으로는 10번째 우승을 할 기회가 없어졌으며, 그 동안 해태로 인하여 우승의 꿈을 접어야 했던 팀들에게도 더 이상 설욕의 기회는 없어졌다.많은 사람들은 지난 주말 광주에 있었던 해태의 고별전에서 눈물을 흘리던 열성 팬들을, 그 고별전을 위해서 서울에서부터 내려가 월요일 새벽에야 올라온 정신나간(?) 직장인들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함께 간 친구는 애인에게서 '미쳤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고 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사람들도 우리를 이해해주기를 더욱 바란다. 떠나는 해태를 쉽게 보낼 수 없다는 것은 단지 그들이 하나의 프랜차이즈 야구팀만은 아니기 때문이고, 떠나는 해태에 감정이 복받쳐 오르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이고, 그들을 사랑한 이유는 단지 그들이 많은 우승을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감정을 함께 했기 때문이 이라는 것을... 그리고 어쩌면 그만큼 우리의 감정이 절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더욱 우리는 해태는 떠났지만 '타이거즈'는 영원하다고 외친다는 것을.

덧붙이는 글 "친구여, 지난 20년 간 그대가 함께 해준 우리의 설움과 간절한 소망과 큰 영광들과 작은 좌절들에 모두 감사합니다.

그대가 있어 우리는 외롭지 않았으며,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너무도 흔한 표현이지만 진실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대의 이름이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리라는 것을
그대가 새겨둔 신화처럼 변치 못할 것이라는 것을 "

- 지난 20여년간 해태와 함께 했던 모든 선수들과 임원, 프론트, 관계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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