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영화를 위해 옳고 그른 것을 가리어 밝힐 필요성을 느낀 것은 세편의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평이 그 범주를 벗어나 한국영화에 대한 도식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기도 하고, 아울러 홍성식 기자의 총론과 맥를 같이하면서 각론에 있어선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총론이란 한국영화의 미래를 숙고해야 한다는 것이고, 각론이란 아직 어둡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프랑스를 아니 세계를 대표하는 유력일간지 중에 하나인 <르 몽드>는 '세계영화제를 급습한 한국'이라는 기사에서 한국영화의 활발한 해외진출현황을 담았다. 여기엔 경쟁부문에 진출한 <춘향뎐>을 비롯한 <오! 수정>등의 총 네편의 영화와 한국영화의 저력에 관한 내용을 담은 것이었다.

그러나 언론의 화려한 주목은 끌었지만 수상의 영광은 라스 폰 트리에의 <어둠 속의 댄서>에 돌아갔고, 그에 못지 않게 주목을 끌었던 건 아시아 영화의 면면들이었다.

심사위원대상과 감독상을 비롯한 9개 부문의 수상자가 가려진 이번 칸느에선 일일이 열거하기에도 벅찰 만큼 많은 상들이 아시아 국가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수상의 영광을 안은 이들 가운덴 낯설지 않은 이름도 눈에 띄었다. 에드워드 양. 또는 양덕창. 고령가소년 살인사건과 공포분자로 일찍부터 명성을 드높인 감독이다. 이외에도 이전부터 후 샤오시엔, 차이밍량 등 이미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감독들은 많다.

그러나 눈을 돌려 이들의 모국인 대만을 바라보면 화제는 달라진다. 국제적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자국에선 이들의 영화는 찬밥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해외에서 자본을 끌어다 영화를 제작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어버렸다. 가장 큰 이유는 市場이 형성되지 않아서이다.

이에 비한다면 미국영화시장은 자국으로 구분짓기엔 그 규모가 이미 너무 커져버렸다. 일례로 자국시장에서 흥행에 실패한 영화라 할지라도 해외시장을 통해 손익분기점을 넘어서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점점 세력을 넓히고 있는 세계 도처의 헐리우드 키드들 때문이다.

여기서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렇다면 요는 '시장에서 성패가 갈린다는 것인가'란 질문이다. 다시말하면 시장을 넓히는게 우선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우선순위로 놓고 생각할지는 좀더 지켜보아야 할 일인듯 하다.

왜냐하면 미국 영화의 강점이 장점들만 모아서 육성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문제를 넘어 이젠 정형화된 미국영화가 식상하지 않기 위해 자기복제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사실에서도 감지된다.

스크림은 그 좋은 보기이다. 1편의 작중인물 가운덴 끊임없이 공포영화의 공식들을 주절거리는 인물이 나온다. 그리고 흥행에 힘입은 연이은 속편들은 그런 공식을 변주(복제)하고 있다. 게다가 더 보태고 뺄 것도 없이 헐리웃 영화들은 이제까지 그런 공식들에 충실했다. 공포영화면 공포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랐고, 액션영화면 액션영화의 공식을 충실히 따랐다. 그래서 헐리웃에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천차만별이라고 해도 영화의 줄거리를 이해하는덴 별 어려움이 없었다. 심지어 멜로영화라 할지라도….

이런 가운데 영화가 산업이기 전에 예술이라는 진부한(?) 생각을 가진 일단의 젊은이들이 세대를 달리해가며 그들의 고민과 모색을 쏟아놓는걸 보게 된다. 비록 아직은 낮은 가능성에 머물러 있다 할지라도 영화가 산업으로 치우치는건 경계해야 한다는 당위에는 변함이 없다는 듯이. 마치 최근에 도그마 선언처럼.

그리고 그런 범주에서 대안영화의 가능성을 묻는 실험도 계속되고 있다. 전주에서 열렸던 디지털 영화제가 그 한 보기이다. 물론 디지털 영화가 필름을 대체한다든지 하는 공상은 자유이겠지만, 그런 가능성에 대해서 길을 열어 놓는 자세와 마음가짐은 필요하다.

사설이 길었다. 각설하고 나는 세편의 영화를 통해 한국영화의 미래를 성급하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모두에서 지적했듯이 미래(예술이냐 외설이냐가 아니라 영화가 과연 산업에 만족하고 성장을 멈출 것인가)를 숙고하기 위한 실험은 진행중에 있고 세편의 영화 역시 아직은 시장과 예술의 불안한 외줄을 타며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여기는 까닭이다.

그러나 한국은 척박한 토양 위에서 비록 안방에서의 승리이긴 하지만 시장에서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이다. 영화 발전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은 일단 갖춘 셈이다. 여기에 더해 기존의 영화문법을 해체하는 파격도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 그대로 도그마를 넘어서는 한국영화인들의 새로운 선언을 기대하기엔, 여건도 내용도 아직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 도리어 다행이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홍성식 기자의 재반론 및 또다른 반론을 기대하며.

2000-06-03 16:35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홍성식 기자의 재반론 및 또다른 반론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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