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전에 무술을 연마하고 있는 '바람의 파이터' 최영의
ⓒ 대산사업 '신의 손'으로 널리 알려진 최영의(崔永宜·1922∼1994)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바람의 파이터>가 8월 12일 개봉을 앞두고 후반 작업이 한창이다. 극진 가라테를 탄생시켜 일본인의 영웅이 되었던 최영의의 삶은 영웅이 없는 시대, 고개 숙인 남자들의 시대에 불굴의 의지와 야수와 같은 남성성의 상징으로 주목할 만하다.

사람들에게 최영의는 소뿔을 부러뜨린 괴력의 남자로, 영화 <넘버 3>에서 송강호가 '불사파'를 조직, 최영의를 언급하며 역설했던 '무대뽀 정신'의 화신으로 인식되어있다.

세계의 무술 고수들과 싸우기 위해 전세계를 돌며 혈전을 벌여 그 치열한 싸움에서 전승을 기록한 '바람의 파이터' 최영의. 기자는 지난 14일 서울 압구정동 한 카페에서 장남 최광범(30)씨를 만나 아버지 최영의에 대해 들어봤다.

최광범씨는 인터뷰 내내 "사람들이 아버지를 소뿔을 부러뜨린 괴력의 사나이, 30:1의 싸움에서 이긴 전설의 싸움꾼으로 인식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아버지는 진정한 무술인의 인생을 사셨을 뿐입니다. 승리의 기록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 속에 배어있는 땀과 피를 사람들이 더 값지게 여겼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강조했다.

▲ 최영의의 장남, 최광범 씨. 인터뷰 내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을 이야기했다
ⓒ 김태우 - 최영의가 창시한 '극진 가라테'는 어떤 무술인가?
"가라테를 중심으로 태껸 등 여러 무술을 결합한 형태의 무술이다. 일부 언론에서는 태껸이 그 뿌리라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처음 극진 가라테를 만들었을 당시에는 사이비 무술이라는 비난도 많았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모든 걸 극복하고 극진 가라테를 널리 인정 받게 만들었다."

- 최영의라는 본명 말고 최배달이라는 이름이 또 있다. 왜 이름이 두 개 인가.
"배달이란 이름은 배달민족의 자긍심에 대한 아버지의 표현이다. 아버지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셨다. 창씨개명을 한 일본이름을 한자로 부르면 최배달이 된다. 비록 창씨개명을 했지만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려고 하셨다."

- 인터넷에 '안티 최영의'가 있는 것으로 안다. 그들이 내세우는 안티의 이유는 최영의가 귀화를 했고 일본인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한국의 영웅이 아니라는 것이다. 창씨개명과 귀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아버지는 분명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와 같은 애국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재일동포로 살면서 아버지에게는 한국인이라는 자긍심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이 분명히 있었다. 당시에는 귀화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가끔 '조국에 대해 고개를 못 들겠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아버지가 일본인이 아니었다는 가장 큰 이유는 후계자로 한국인을 지목한 것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다."

- 언제 돌아가셨나?
"아버지는 폐암으로 1994년에 돌아가셨다. 올해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째 되는 해다. 영화 <바람의 파이터>와 아버지의 무술철학을 소개한 책 이 출판되어서 감회가 남다르다. 아버지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일본에서 치러졌는데 천황이 죽었을 때보다 훨씬 많은 조문객이 왔다고 한다."

- 세계를 돌면서 무술의 고수들과 대결하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일본에서는 더 이상 아버지의 적수가 될만한 사람이 없었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 아버지의 좌우명은 무엇이었나?
"우리집 가훈이 '머리는 낮게, 눈은 높게, 입은 좁게, 마음은 넓게'이다. 항상 겸손하되 야망은 크게 가지고, 말을 아끼라는 뜻이다. 일본 속담에 방망이 만큼 노력하면 침 만큼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아버지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싫어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에는 '나름대로'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최선을 다한다는 말 대신 목숨을 건다는 말을 좋아했다."

- 약 6개월 정도지만 야쿠자 생활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무술인과는 어울리지 않는 전력인 것 같다.
"야쿠자 보디가드를 하기도 했지만 폭력세계의 어두운 면을 깨닫고 그 세계를 떠났다. 알다시피 폭력세계와 결별할 때는 어려움이 따른다. 죽음의 위협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어두운 과거를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는 노력했다."

- 아버지가 유명해서 싫었던 적은 없나?
"동네 목욕탕도 한번 함께 갈 수 없었다(웃음). 내가 샌드백을 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아버지 앞에서 항상 샌드백을 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항상 '최배달의 아들'로 사람들에게 인식됐다. 그래서 아버지를 밝히지 않으려고 했던 적도 있었다."

- 아버지에게도 여성적인 면이 있었나?
"아버지는 집에서 곧잘 설거지를 하셨고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큰 소리 한번 지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잘 믿지 않지만 아버지가 매를 든 적도 한번도 없다."(웃음)

- 아버지가 우는 걸 본 적 있나?
"나는 한번도 보지 못했다. 어머니는 본 적이 있는데, 극진 가라테가 일본화 되었을 때와 체력이 저하되는 것을 슬퍼했다고 들었다."

- <바람의 파이터>에서 아버지는 영웅으로 그려진다. 아버지가 영웅의 자격이 있다고 보는가?
"안주하지 않고 도전하고 끊임없이 수련하는 사람이 영웅이라면 아버지에게는 분명 영웅의 자격이 있다. 아버지 시대의 실전은 지금의 스포츠와는 다르다. 당시에는 지면 끝이다. 실전에서 재기전은 없다. 항상 올인했고 물러서지 않았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아버지는 무술인이었다. 무술인을 그저 무술인으로 인정해주면 좋겠다. 아버지에게 다른 어떤 이미지가 덧칠 되는 것은 싫다."

최영의, 최배달, 오오야마 마스다츠라는 이름으로 불린 사나이 최영의 가상 인터뷰
▲ 생전에 소뿔을 꺾는 최영의 ⓒ대산사업 - 우선 인적사항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 부탁합니다.
"본명은 최영의(崔永宜), 일본 이름은 오오야마 마스다츠[大山倍達], 애칭은 신의 손, 바람의 파이터라고 불렸다. 전라북도 김제에서 1923년에 출생했고 한국, 일본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 가장 내세울만한 업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실전무도 극진 가라테를 창시했고 나만의 무도 스타일로 일본의 무도 고수들을 격파, 일본 무도계를 격파했다. 또 세계 무술 고수들과 벌인 100여 차례 승부에서 단 한번도 패배하지 않고 전승을 거두었다."

- 정말 황소뿔을 부러뜨린 적이 있습니까?
"47마리의 황소뿔을 꺾고 투우소를 쓰러뜨렸다. 하지만 헐크와 같은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무술의 연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가 달려오는 힘을 이용하고 각도를 조절하고 모든 기술을 이용한 것이다. 힘으로만 소의 뿔을 부러뜨린 헤라클레스로 나를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 사람들은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나요?
"1994년 권위 있는 무도잡지 'Black Belt'의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아울러 절권도의 창시자인 '이소룡'과 450전 무패를 기록하고 있는 현존 최고의 파이터 '힉슨 그레이시'와 함께 20세기를 대표하는 세명의 무술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당신이 만들어서 보급한 극진 가라테는 현재 어느 정도 보급되었나요?
"극진 가라테는 세계 곳곳에 120여 개국의 지부를 두고 있고 약 2000여 만명이 수련에 힘쓰고 있다. 다만 일본화된 게 무척 아쉽다."

-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사회 여러 곳에서 힘들어 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좌절하지 말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목숨을 걸고 하면 못 할 일이 없다."

이 가상인터뷰는 자료와 최광범씨의 말을 토대로 작성했습니다. / 김태우 2004-07-16 11:21ⓒ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 김태우 기자의 다양한 글을 싸이월드 클럽 '태우의 글상자(writinglife-woo.cyworld.com)'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소통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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