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08 14:38최종 업데이트 23.09.08 14:38
  • 본문듣기

1950년 9월 29일 서울수복기념식에 앞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대화하고 있다. ⓒ NARA

 
1950년대 중반이 되자 우리나라는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며 출생률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1970년대 초반까지 지속된 베이비붐의 시작이었다. 인구는 지금의 절반이 되지 않았지만, 매년 출생아 수는 지금의 두 배 이상이었다. 1955년 출생아 수가 90만 명을 넘어섰고, 이런 분위기는 1974년까지 지속되었다. 인구 증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산업이 발전하지 않은 까닭에 빈곤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휴전 직후 비교적 높았던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1950년대 중반에 이르자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지속적인 가난과 사회적 혼란이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을 맞아 대통령은 국민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부정선거와 독재로 장기 집권을 시도하였다.


측근 관료들의 부패와 부정은 극에 달하였다. 부패한 지도층은 범죄 조직과 공생관계를 형성하며 사회를 더욱 큰 혼란으로 몰아갔다. 북에서는 전쟁 책임을 물으며 시작된 숙청 작업이 반복되면서 김일성의 독재 체제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남과 북이 닮아가고 있었다.

1957년 10월 소련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 성공으로 세상은 매우 시끄러웠다. 세상 변화에 아랑곳하지 않고 1958년 1월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 등 진보당 간부 7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하였다. 미국은 소련을 따라잡기 위해 1958년 7월 항공우주국(NASA)을 설립하였다.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웠던 1958년 여름 어느 날 문학평론가이며 작가였던 팔봉 김기진은 시내를 걷다 진열장 안에 있는 낯선 물건을 보았다. 하나는 '원자시계'라는 표딱지가 붙은 삼각형 금시계였고, 다른 하나는 귀금속점에 놓여 있는 '금수저'였다.

혼란한 시절이나 힘든 민생과 멀어지고 있던 "사치하면서 부패하는 사회"를 보여주는 물건들이었다. 팔봉의 표현대로 구공탄 불에 커피를 끓여 먹는 족속들이 원자시계를 걸치고, 금수저로 밥을 먹던 시절이었다.

한편에서는 외래 물건인 커피를 사치품으로 격렬히 비판하였지만, 신문 여기저기에 커피에 대한 긍정적인 기사가 넘치고, 커피 소비의 확대에 따라 다방 커피값이 하루가 다르게 치솟던 시절이었다. 신문 연재물마다 문학작품마다 커피 마시는 풍경은 넘쳐났다.

반복되는 뉴스들
 

1957년 10월 13일 자 <경향신문> 기사 "사개다방 영업허가취소-커피 한잔 150환 받다가"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당시 신문에 등장하는 커피 관련 기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고 나면 인상되는 다방 커피값이었다. 정부에서 고시하는 커피값이 언제 오를지는 비단 커피를 좋아하는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커피값 인상이 가져올 파급 효과를 주시하는 모든 시민들의 관심거리였다. 한잔에 80환인 관허요금을 무시하고 150환을 받은 나일구 다방 등 시내 네 개 다방이 동시에 영업정지처분을 받은 것이 대서특필된 게 1957년 10월이었다.

두 번째는 커피를 둘러싼 각종 범죄 소식이었다. 주로 미군부대로부터 커피를 불법적으로 빼돌리다 적발된 사건이 보도되었고, 이와 함께 밀가루를 커피로 속여 판매하거나 한번 사용한 커피 가루를 두 번 세 번 사용하다 걸린 다방 업주 이야기 등이 자주 등장하였다. 1950년대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이런 뉴스들은 반복되었다.

이런 뉴스 속에서도 흥미로운 소식들이 자주 전해졌다. 아프리카 라이베리아의 삼림 속에서 지금까지 알려져 있던 그 어떤 커피보다도 향기가 드높은 새로운 커피가 발견되었다는 해외토픽이 1957년 12월 23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어 커피 애호가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다.

그런가 하면 "커피는 만병통치약"이라는 고문서가 일본에서 발견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58년 3월 14일 자 <조선일보>를 통해서였다. 일본 오사카의 한 쓰레기 청소부가 옛날의 문서를 주웠는데 80년 전, 그러니까 1887년 문서로 여기에는 커피의 여러 가지 치병 효능이 쓰여있으며 커피는 만 가지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는 반가운 내용이었다.

가을이 깊어지던 1958년 10월 16일 자 <경향신문>에는 커피를 맛있게 끓이는 법과 커피 에티켓이 소개되었다. 향기와 맛을 제대로 원한다면 여과법이 가장 적당하다고 소개하였다. 요즘 표현으로 드립커피다. 물을 펄펄 끓인 다음 찻병 위에 헝겊 주머니를 걸쳐 놓고 커피 가루를 큰 수저로 가득 담아 넣은 후, 끓인 물을 세 번에 나누어 천천히 붓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내린 커피를 마실 때는 더운물에 담가두었던 컵에 따른 후 기호에 맞게 설탕이나 우유를 섞어 마실 것을 권하였다. 커피잔 무늬가 손님을 향하도록 하고, 커피잔 손잡이와 스푼은 컵의 오른쪽에 놓는 것이 예의라는 설명도 포함되었다. 만드는 법이나 에티켓이 요즘과 다르지 않다.

1950년대 후반까지는 물에 녹는 인스턴트커피보다는 원두를 갈아 드립 하여 마시는 방식이 유행하고 있었다. 만드는 것이 조금 번잡하고 불편하였지만 커피의 맛이나 향은 1960년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인스턴트커피보다 훨씬 좋았던 시절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의 커피를 대하는 태도였다. <경향신문> 기사는 여성들이 대접을 받으면 쓸데없이 체면을 지키느라고 사양하는 것이 버릇이 되고 예의인 것 같이 인식하고 있지만 사양 말고 뜨거울 동안에 맛있게 드는 것이 오히려 주인에게 실례가 되지 않는 에티켓이라고 주장하였다.

전통과 근대의 분기점에서 근대적 음료로 등장한 커피를 대하는 바람직한 여성의 태도를 설명한 것이다. 여성의 경우 마시고 난 다음 컵에 입술연지가 묻었을 경우에는 남몰래 살그머니 닦아 없애는 정숙한 마음씨도 필요하다고 부연하였다. 남자에게는 불필요하지만 여성에게는 필요한 에티켓이었다.

국운이 다한 것인지
 

1958년 11월 6일 자 <동아일보> 기사 "커피의 상식"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1958년 11월 6일 자 <동아일보>에는 '커피의 상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따끈한 한잔의 커피는 피로를 회복시키고 마음의 휴식을 주는 동시에 생각하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우리나라에 커피가 처음으로 들어온 것은 약 60여년 전 초대미국공사 부임과 동시이지만 이제는 우리들이 항상 즐거이 마실 수 있는 차가 되고 말았다."

이 기사는 커피의 주성분인 카페인이 졸리듯 흐릿한 기분을 거두어 버리고 개운한 기분을 만든다고 소개하였다. 이런 기사를 읽고 커피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기사가 실린 것은 낙엽이 지는 가을의 끝자락이었다. 이 당시에 지식인들은 커피가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이 아관파천보다 10여 년 앞선 1883년 즈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낯선 수입 음료 커피가 서울에서는 남녀노소가 즐기는 음료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물론 서민들에게는 사치품이었다. 팔봉 김기진을 비롯하여 몇몇 지식인들은 이런 세태를 비판하였다. 커피와 같은 사치품보다 심각한 것은 나라의 운명을 불안하게 하는 한심한 사건 소식들이었다. 거리의 상품진열창은 안 보면 그만이었지만 뉴스는 피할 수가 없었다.

하룻밤 자고 나면 꿈에도 예측하지 못했던 한심스러운 사건이 꼬리를 물고 튕겨 나오는 것이 문제였다. 요즘과 다르지 않았다. 예를 들면 1958년 당시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것이 '판사의 살인사건'과 '교장의 광고사건'이라는 희대의 뉴스거리였다.

전자는 술에 취한 판사 이모씨가 요정에서 기생의 옷을 강제로 벗기려 하다가 이를 말리려던 요정 주인의 아버지 멱살을 잡아 질식사시킨 사건이었다. 후자는 맹휴의 책임을 물어 퇴학 처분을 한 학생 7명의 명단을 실은 광고를 신문에 게재한 교장 이야기였다.

이 두 사건에 대해 언론은 교장 사건에 대해서는 비교적 공정한 보도를 하였으나, 판사의 살인사건은 살인 판사에게 동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판사는 2년 형에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신문에는 이것이 취중 살인이었고, 판사가 반성하고 있으며, 가족들의 생계 책임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동정적인 기사들이 넘쳤다.

어느 날 다방에서 팔봉은 손님들의 대화를 들었다. 한 손님이 말하기를 "여보게 판사가 살인을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걸 어떡하면 좋지?" 하니까, 그와 함께 있던 친구가 한숨을 쉬면서 "국운이 이렇게 됐다고 할밖에..."라고 대답하였다.

"낙엽 소리 하나를 듣고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알았다"는 말을 인용하며, 팔봉 김기진은 판사가 요정에서 살인을 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 하고,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를 알지 못할 지경이라고 한탄하였다.

초임 교사에 이어 정년을 앞둔 교사가 스스로 교직과 목숨을 버리는 세상, 수십만의 교사가 거리로 뛰쳐나와도 꿈쩍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다. 국운이 다한 것인지.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1957~1958년 기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