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09 10:10최종 업데이트 24.02.0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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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조병화가 그린 '명동 다방 지도' ⓒ 국립현대미술관

  
1970년대 초반 다방의 중심은 커피가 아니라 마담과 레지였다. 문화인들이 모여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거리의 안식처'였던 다방의 본모습은 사라지고, 자리에 앉기 무섭게 마담이나 레지가 달려와 차 주문을 요구하는 각박한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다방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였다.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에서 사무실이 귀한 때였다. 쉽게 전화를 놓기 어려운 시절에 다방을 사무실 대용으로 쓰는 손님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다방에 걸려 온 전화를 받은 마담이 "김 사장님 전화요," "이 사장님 전화요" 하면 대여섯 명이 일어나는 진풍경이 늘 벌어졌다.


1960년대 어느 순간부터 다방 문화의 중심이었던 명동엔 이제 "다방다운 다방이 없다"는 얘기가 자주 들렸다. 1940년에 서울역 앞에서 시작하여 해방과 함께 명동으로 이전한 후 문화예술인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오던 음악다방 돌체가 문을 닫은 것은 1962년이었다. 명동이 문화의 중심지에서 상업의 중심지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던 돌체 다방 운영자 스스로의 판단이었다.

일제시대에 엘리제 다방이 있던 유네스코 앞 골목에는 '모나리자'라는 다방이 있었다. '모나리자'는 6.25 직후 명동에서 가장 먼저 영업을 재개하면서 명동을 찾는 문화예술가들의 보금자리 구실을 하였다. 1953년 백영수 화백이 첫 개인전을 열었던 곳이고, 명동백작이라 불리던 소설가 이봉구를 비롯해서 박인환, 김수영, 조병화, 서정주, 조지훈, 이중섭, 이해랑, 전혜린 등 문화예술인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다방을 들어서면 모나리자의 미소가 걸려 있었고, 마담은 항상 웃음 띤 얼굴로 손님을 맞았다. 어느날 '모나리자'의 꽃이었던 홍 마담이 다방을 그만두고 시집을 가게 되었다. 단골들은 "모나리자도 시집간다"고 탄식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서서히 다방을 지배하던 정은 사라지고 상혼이 앞서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시인 조병화가 "돈만 남은 명동"이라고 한탄하였던 것이 1966년이었다. 1969년 12월에는 세금 체납으로 무기한 영업정지 처분받은 다방 명단이 신문 지상에 크게 발표되었고, 여기에 '모나리자'도 포함되었다. 결국 '모나리자'는 문을 닫았다.

다방을 소재로 한 석사학위 논문

변화하는 다방의 모습을 아쉬워하는 글이 신문과 잡지에 자주 등장하였다. <경향신문>은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 제출된 이종철의 석사학위 논문을 바탕으로 당시 다방의 분위기를 소개하였다. 1970년에 제출된 이 논문은 아마도 다방을 소재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석사학위 논문일 것이다.

이 논문은 명동 지역을 중심으로 한 음료 소비 실태를 분석하였다. 이 논문에 의하면 당시 한 사람이 매월 사용하는 찻값은 20.4%가 500원 이하, 나머지 70%는 500~2000원 정도였다. 월평균 1000원 이상이었다. 다방 레지와 DJ의 월 소득이 1만 5000원 내지 2만 원이었다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찻값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은 상인과 무직자였다. 이들이 매월 찻값에 쓰는 돈은 평균 5000원에 달하였다. 상인은 모르겠지만 무직자에게는 가혹한 부담이었을 것이다.

당시 명동에서 소비자들이 다방을 찾을 때 고려하는 요소로 첫째는 분위기였고, 음료를 따라 다방을 선택하는 것은 25%에 불과하였다. 다방에 들어갔으나 앉지 않고 나오는 이유로 첫 번째는 '시끄럽다', 다음으로는 '공기가 탁하다', '레지가 불친절하다' 순이었다. 다방을 다시 찾는 이유로는 차 맛, 음악, 레지의 서비스 순이었다.

당시 유행의 하나는 외국어 사용이었고 다방의 명칭에서도 이런 유행이 반영되었다. 1960년대 들어 다방 간판에 외국어 사용이 급격하게 늘었다. 이 논문은 이런 변화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을 분석하였다.

다방의 경우 한국어 간판이 좋다는 사람은 46%였고, 외국어가 좋다는 사람은 21.3%였다. 주점의 경우는 한글 간판 선호 42%, 상관없다가 37.3%, 외국어 선호 16.8%였다. 남자보다는 여자, 그리고 고소득자가 외국어 표기를 더 좋아했고, 나이가 많을수록 외국어 표기를 싫어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방의 명칭에 대해 보다 전문적인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오산고등학교 국어교사 강헌규는 <국어교육>에 기고한 글에서 다방 명칭에 나타난 외래어를 분석하였다. 대전 지역의 다방 명칭을 보면 한글, 한글+한자, 한글+로마자 순으로 많았다.

1955년에 국어학자 이희승이 조사한 것과 비교하면 한글이나 한자로만 된 명칭은 감소하고 혼용은 증가하였다. 서울의 경우에는 한글, 한글+영자, 한글+한자, 한글+한자+영자 순이었다. 외래 문화에 보다 개방적이었던 서울의 경우 지방보다 영문 명칭의 증가가 두드러졌다.

다방에서 들려주는 음악에 관해서는 외국 음악에 대한 선호가 높았고, 외국 음악 중에서는 재즈가 48.5%, 가벼운 고전음악이 38.2%, 정통 고전음악은 13.3% 순으로 좋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논문의 결론에 따르면 당시 명동 지역 다방은 대형화 추세였고, 주로 외국 음악을 틀어주고 있었으며, 무뚝뚝한 레지가 불친절한 서비스를 일삼는 곳이었다.

다방의 아늑한 정취 사라져간 1970년대 초반
 

1971년 8월 9일 자 <경향신문> 기사 "서울 새풍속도 (212) 명동 [12] 인정보다 상혼 앞선 다방"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당시 명동 지역 다방의 또 다른 특징은 '주간 다실, 야간 주점'이었다. 대형화한 다방의 주인이 높은 임대료, 비싼 세금, 증가하는 종업원 급여를 감당하기 위해서 밤에는 술집으로 업종을 바꾸어 영업하는 방식이었다. 적지 않은 다방 벽에는 '맥주팝니다'라는 쪽지가 나붙었고, 레지가 손님 옆자리에 앉아 맥주를 따라주는 풍경이 주간과 야간을 가리지 않고 보일 정도였다.

마담의 전문 직업화도 변화의 하나였다. 다방이 등장한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다방의 마담은 주인 여성을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런데 1960년대부터 다방에서 마담을 고용하기 시작하였다. 직업적 마담이 등장하여 손님 접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른바 '가오마담'이라고 불리는 30세 전후의 마담이 손님을 안내하고, 손님의 비위를 맞추는 '다방의 꽃'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들은 화장품이나 옷 구입에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급여도 일반 레지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유명한 마담을 모시기 위한 쟁탈전도 벌어졌다.

다방을 중심으로 한 소극장 운동도 1960년대 명동을 상징하는 변화의 하나였다. 전통적인 다방 영업으로는 비싼 세금이나 임대료를 부담하기 어려워졌고, 때마침 젊은층을 중심으로 연극에 대한 관심이 증가한 것이 배경이었다. '테아트르' '설파' 등이 차와 연극이 있는 다방이었다. 일정한 입장료를 받고 관객을 모았다. '테아트르'가 입장료 300원을 받은 것이 식품위생법 위반으로 말썽을 빚기도 하였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어 1970년대 초반에 극에 달하였던 다방의 변질은 다방망국론이라는 주장까지 불러일으켰다. 물론 다방에 대한 비판이 아무리 강해도 다방은 점점 늘어갔다. 다방망국론보다는 다방옹호론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시인 박성용은 한 잡지에 기고한 '다방이론'(茶房異論)이란 글에서 "도시인의 하루 일과는 다방에서 시작"된다고 말하며, 특히 "서울 거리에 허구 많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선뜻 '다방'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박 시인의 표현을 따르자면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사랑을 속삭이고, 인생을 논하고, 고독을 나누면서 시간을 땜질하는 장소가 1970년대 초 다방이었다.

새로운 건물이 올라간다 싶으면 틀림없이 다방이라는 아크릴 간판이 나붙게 마련이었다. 당시에도 도시인들은 이미 점심값보다 비싼 돈을 커피나 찻값으로 지불하고 있었다. 아무리 다방이 상업화되고, 커피값이 비싸고, 음악이 시끄러워도 시민들의 유일한 안식처요 대화의 광장인 다방은 필요하다는 것이 박 시인의 마음이었다.

황금만능시대로 가는 길목이었던 1970년대 초반, 다방이 지녔던 아늑한 정취가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었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의 그늘이 다방의 낭만도 조금씩 삼키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박성용(1970). 다방이론. 도시문제 5(12). 124-125.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종철(1970). 료식에 대한 소비자 구매행동 연구: 명동 지역을 중심으로.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석사학위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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