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8.11 14:53최종 업데이트 23.08.11 14:53
  • 본문듣기

‘오리역 부근에서 칼부림을 하겠다. 최대한 많은 사람을 죽이고 경찰도 죽이겠다’는 범죄 예고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온 가운데, 4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오리역 입구에 경찰특공대 전술장갑차가 배치되어 있다. ⓒ 권우성

 
"전쟁이 지옥이라면, 커피는 군인들에게 구원이다"라는 말이 있다. 남북전쟁,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 그리고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 등 모든 전쟁을 지옥이었지만,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에게 커피는 위안의 음료로 인기가 높았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해방된 지 5년, 정부가 수립된 지 불과 2년도 되지 않은 1950년 6월 25일 한반도는 다시 전쟁의 참화에 빠져들었다. 전쟁은 3년간 지속되었고, 이 기간 서울은 국군이 세 번, 인민군이 두 번 차지하였다. 1950년 6월 28일부터 9월 18일까지, 그리고 1951년 1월 4일부터 3월 18일까지 서울은 인민군이 점령했다.


이후 전쟁은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2년 이상 계속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일시 정지되었다. 전시작전권을 미국에 넘겨준 대통령 이승만은 휴전협정문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잠시 멈춘 상태다.

6.25를 다룬 역사 교과서마다 인민군에는 넘치는 탱크가 국군에는 거의 없어서 전쟁 시작 사흘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다는 안타까운 이야기가 실렸고, 이를 배우며 슬퍼했던 어린 시절 기억이 생생하다.

70년이 지난 2023년 여름, 무차별 살상 사건이 몇 번 발생하고 치안 부재 여론이 비등하자 무시무시한 국산 장갑차가 서울 시내 여기저기에 배치되었다. 칼을 든 난동범을 막기 위해 장갑차를 시내에 배치해도 될 정도로 무기와 병력이 남아도는 것을 보면 전쟁 준비는 충분한 듯하여 여간, 사실은 지나치게, 안심이 된다. 급히 주문한 호신용 가스총을 환불해야겠다. 장갑차가 도심을 지키는 거리에서 시민들은 안심하고 커피를 즐겨도 될 것 같다.

장관 물러나게 만든 커피값 폭등
 

커피 ⓒ pexels

  
정부 수립 초기인 1948년 여름 60원에서 출발하였던 다방 커피 한 잔 가격은 1949년에 2백 원을 넘기더니 1950년 봄에는 4백 원에 이르렀다. 2년 사이에 6배 이상 오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이 벌어졌고, 시민의 모든 일상이 바뀌었다. 커피 소비가 줄어든 것은 전쟁 초기 잠깐뿐이었다.

서울이 두 번째로 인민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던 1951년 2월 피난지 부산에서도 커피 소비는 증가하였고, 커피 가격은 올랐다. 4백 원하던 커피 한 잔의 공시 가격이 5백 원으로 인상되었다. 커피 가격 인상 소식을 전하며 <동아일보>는 "이래저래 곯는 것은 피난민뿐, 이모저모로 축재하는 것은 장사꾼들뿐"이라고 한탄하였다(1951년 2월 17일 자).

인민군이 38선 이북으로 물러가고 중부 전선 이곳저곳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지속되고 있던 1951년 봄부터 휴전이 이루어진 1953년 여름까지 커피 가격의 상승은 멈추지 않았다. 가장 빠른 속도로 상승한 것은 1951년 봄부터 1952년 여름까지의 1년여 기간이었다. 1952년 6월 10일 드디어 커피 한 잔 가격이 2천 원으로 인상되었다. 정부는 가격 인상을 발표하며 위반자를 단속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커피 2천 원, 밀크세-키 3천 원, 오렌지쥬-스 2천 7백 원이 고시 가격이었다. 전쟁 중에도 커피뿐 아니라 이보다 비싼 밀크세-키(쉐이크)를 마셨던 우리 민족이다.

1952년 겨울에 접어들자 커피 소비는 증가하였고, 12월 3일 드디어 다방 업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정부는 커피 한 잔 가격을 2천 6백 원으로 인상 고시하였다. 여기에 특별행위세 2백 원과 국채 2백 원을 더하면 한 잔 가격은 3천 원이었다. 재료 가격이 불안정한 밀크세-키, 레몬티, 코코아, 오렌지쥬-스 등의 가격은 임의로 정하도록 허용했다.

커피 가격이 인상되자 목욕업자와 이발업자들이 반발하였다. 커피 한 잔에 3천 원인데 이발 요금이 4천 원인 것은 형편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었고, 결국 커피 가격 인상이 다른 물가 인상의 도화선이 되었다. 물가 상승 뉴스마다 커피는 빠지지 않는 품목으로 등장하였다. 커피 가격 인상이 주는 효과가 매우 큰 시절이었다.

커피 등 생활 물가의 폭등에 대한 책임론이 일자 최순주 재무부 장관은 자리에서 물러났다. 임시수도 부산의 초장동 초입에 있는 남의 집 문간방 하나를 빌려 '홀아범생활'을 하고 있던 장관이 인플레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아내와 1남 3녀 자식들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유학 보내 놓고 홀아범(기러기아빠) 생활을 하던 그였기에 장관 사직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도 예상되었지만 국정 혼란에 대한 책임을 진 것이다.

하루아침에 청년 160여 명이 죽는 안전사고가 발생해도, 유치해 놓은 국제 행사 준비 소홀로 국가이미지에 흠집이 나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요즘과 다르다. 책임을 지기는커녕 이전 정부를 비난하고, 자화자찬으로 위기를 넘기려는 요즘 공직자들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모습이 70년 전 이 땅의 공직자에게 있었다.

정부는 전쟁 중이던 1953년 2월 17일 화폐개혁을 단행하여 고물가에 대응하였다. 100원을 1환으로 조정하는 내용이었다. 물가는 일시적으로 안정되는 듯하였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커피 한 잔 가격을 30환으로 고시하였지만 곧 시작된 여름과 함께 얼음 음료의 수요 증가로 가격이 무너졌다. 다방에 따라 얼음 한두 조각 넣고 커피 한 잔에 60환까지 받아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단속하려 하자, 서울 시내 2백여 다방 업자들은 불매운동, 즉 커피를 팔지 않겠다는 협박으로 맞섰다.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쟁 중에도 늘어난 다방
 

헬싱키올림픽에 국가대표 승마선수로 참여한 민병선은 유럽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느낀 감상을 정리해서 <조선일보>에 '구라파순례'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실었다.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도대체 전쟁 중인데 커피 가격은 왜 이렇게 올랐을까? 물론 원재료인 커피 원두의 절대적 부족도 요인이었지만, 더 큰 요인은 커피 수요의 증가였다. 당시 언론 보도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별다른 커피 애호 분위기를 충분히 읽을 수 있다.

당시에는 '문화인'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었다. 한 독자의 질문에 <경향신문>은 "과학, 예술 및 도덕적 정조를 혼합한 인간 생활, 환언하면 진화된 학술문화의 진보 및 발전에 뜻을 두고 이의 향상을 기도하는 동시에 이 속에서 호흡 생활하는 층"을 문화인이라고 규정한 후, "우리나라에는 자칭 문화인이 많고, 연기 자욱한 다방에서 커피-를 꼭 마셔야 한다는 층에 '사이비문화인'이 많은 것은 사실"이라고 응답했다.

이 신문은 흥미롭게도 자신들이 계산한 당시 문화인 총 숫자가 132만 5328명이라고 보도하였다. 132만여 명의 문화인층에 속하려면 다방에서 커피를 마셔야 했다.
1952년 여름 핀란드 헬싱키올림픽에 국가대표 승마선수로 출전하였던 민병선은 올림픽 참가 이후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며 승마 대회에 참여하였다. 민병선은 유럽 여러 지역을 방문하고 느낀 감상을 정리하여 <조선일보>에 '구라파순례'라는 제목의 기행문을 실었다.

핀란드에 이어 스웨덴과 독일에서 열린 승마 대회에 출전한 민병선은 이 기행문에서 "구라파에 와서는 하루에 잘 마셔야 커피 한잔인데 한국에서는 어찌하여 그리 많이 커피를 먹지 않으면 안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커피 잘 빼기는 한국이 제일이라는 것을 통감하였으며, 한인이 제일 많이 마시는 것도 알았습니다."(1952년 8월 28일 자)라고 썼다.

당시 세계에서 1인당 커피 소비량에서 공식적 1위였던 핀란드와 커피 소비 강국이었던 독일이나 스웨덴을 경험한 민병선의 주장이었다. 마시기도 많이 마시지만, 잘 빼기(만들기)도 한다는 표현이 신기하기만 하다. 1952년 말부터 미국과 유럽을 여행한 후 <조선일보>에 게재한 '구미시찰담'에서 유진오 교수가 영국 체류를 회고하며 "한국에서 마시는 그런 좋은 커피는 구경할 수 없었다"라고 쓴 것도 당시 한국의 커피 문화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일화다.

<조선일보> 1953년 6월 5일 자는 이렇게 표현하였다. "서울과 부산에는 한 집 걸러 다방이요... 폐허의 서울에도 늘어만 가는 것이 다방이어서... 다방골은 정말 다방촌이 되고 말았다. '인간도처 유청산'이라더니 '인간도처 유다방'이라해도 무방할 듯."

서울의 북쪽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었고, 자고 나면 포성 소리가 들리던 시절에도 도처에 다방과 커피 향이 넘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시나 평시나, 팬데믹 시절이나 포스트 팬데믹 시절이나 커피는 우리 민족에게 위안의 음료인 것이 틀림없다.

(유튜브 '커피히스토리' 운영자, 교육학교수)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1950-1953년.
이길상(2021). 커피세계사+한국가배사. 푸른역사.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