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3 05:26최종 업데이트 23.06.23 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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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서울 용산구 소화병원에 휴진 안내문이 붙어 있다. 국내 첫 어린이전문병원인 소화병원은 토요일과 공휴일에도 오후 6시까지 진료를 봐 왔는데 진료 인력 부족으로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진료를 한시적으로 운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필수의료 공백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사실, 의료취약지의 의료공백 문제는 하루 이틀 된 사안이 아니다. 최근 보도된 '응급실 뺑뺑이' 사건들이 큰 충격을 준 까닭은 병원이 밀집해 있는 수도권과 대도시에서조차 안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지난해, 국내 '최고' 수준이라 평가받는 상급종합병원에서 근무하던 간호사가 뇌출혈로 쓰러졌지만 수술할 의사가 없어 사망한 일 역시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중증 응급질환이 발생했을 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시민들의 불안과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정부는 문제 해결을 위한 여러 정책 대안을 꺼내 놓았다. 그중 가장 큰 화두는 의대 정원 확대 계획일 것이다. 하지만 의사협회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혀 추진이 쉽지 않은 상황이다. 보건의료인력의 수급관리는 정부의 고유 권한이지만, 의사의 집단파업이 초래할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익집단으로서 의사협회가 이해관계를 좇아 의사 수 증가를 반대하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 반대 논리가 모두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 지역과 진료과목 등에서 의사 분포가 편중되는 문제를 놔둔 채 공급만 늘려서는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지금도 피부미용과 같은 특정 분야에는 의사 인력이 과잉 집중되고 있다. 총량과 분포는 별개의 문제로, 총량을 늘린다고 해서 저절로 분포의 불균형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물이 흘러넘쳐 구멍을 메우듯이 공급을 늘리면 의료공백 문제가 해소될 것이라는 가설은 별로 타당성이 없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결과가 될 공산이 크다. 최근 불거진 '소아청소년과 탈출' 사태는 공급 확대가 필수의료 위기의 근본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한국의 보건의료체계는 '풍요 속의 빈곤'처럼 과잉과 결핍이 공존하는 역설적 상황에 처해 있다. 한쪽에서는 불필요한 과다의료이용 문제가, 다른 한쪽에서는 지역 의료시스템 붕괴와 의료접근성 제약 문제가 심화되고 있다. 지금의 의료공백 문제는 적절한 장소와 시간에 적절한 수준의 숙련된 의료 인력을 적절한 수만큼 확보하지 못해 발생한다.

즉, 문제의 핵심은 공급의 절대 부족이 아니라 분포의 왜곡에 있다. 이 왜곡된 분포가 '체계적 비효율성'을 양산하는 것이다. 물론 공급확대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의무복무기간과 지역을 조건으로 하는 공공의과대학 신설 방안처럼 분포의 문제를 함께 고려하는 공급정책이어야만 일정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의사 인력의 분포(배치) 문제는 어렵고 복잡한 과제다. 그동안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의료취약지의 의사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도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둔 사례는 드물다.

시골 지역 병원에서 아무리 고액 연봉을 제시해도 의사를 구하기 어려운 것처럼, 경제적 보상 외에도 노동 강도, 병원 시설, 경력개발과 훈련 기회, 안전, 주거 환경, 자녀 교육, 배우자 직업, 지역사회 인프라 등 수많은 사회적 요인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현 정부가 하려는 수가 인상 정책의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부 대응에는 체계적 접근이 빠져 있어
 

좋은공공병원 만들기 운동본부(준)는 14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앞에서 ‘윤석열 정부 공공의료 후퇴 정책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참석자들은 ‘코로나19 시기에 위기 대응에 나선 공공병원을 높이 평가해 대전, 서부상, 경남진주권 지방의료원 설립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실시했으나, 광주와 울산의료원 설립에 타당성재조사가 필요하다가 말을 바꾸었고, 결국 윤 대통령 공약이었던 울산의료원은 타당성재조사를 통과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의료현실이 어려운 울산의 공공병원은 물론, 다른 지자체의 공공병원 설립 가능성도 위협받게 되었다’고 비판했다. ⓒ 권우성


이렇듯 필수의료 공백 문제는 몇몇 정책과 사업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난제를 풀기 위해서는 개별 정책 중심이 아니라 '체계(system)'의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보건의료체계는 보건의료자원(인력·시설·장비·지식)의 개발과 조직적 배치, 서비스 제공이라는 주축 분야와 이를 뒷받침하는 재정과 정책·관리 분야로 구성된다. 체계적 접근은 이러한 영역과 분야를 포괄하는 관점과 범위에서 문제를 진단하고 대안을 찾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과 인접한 시스템들이 서로 연계되고 상호작용하는 유기체적 특성에 주목하는 접근을 의미한다. 

그런데 필수의료 공백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는 이러한 체계적 접근이 빠져 있다. 올해 초 발표된 '필수의료지원대책'을 보더라도 개별 정책과 사업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역대 정부 모두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문재인 정부에서도 '공공보건의료발전 종합대책'(2018)과 '지역의료 강화대책'(2019) 등 굵직한 대책들을 쏟아냈지만, 체계에 대한 문제의식도, 체계를 재구축하겠다는 목표도 결여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존 체계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엇비슷한 내용의 대안들이 반복해서 제시되고 있는 양상이다. '병원 간 순환당직 체계'와 같이 의료기관 간 연계·협력 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 그러한 예이다. 

이러한 비체계적 접근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그럭저럭 헤쳐 나가는(muddling through)" 점증주의적 정책 결정 방식에 가깝다. 이는 정책의 실행 가능성을 높일지 몰라도 큰 폭의 변화가 필요한 중대한 문제에 대응하기에 부적합하다. 또 정확한 평가와 학습이 이뤄지지 않으면 실효성 없는 정책을 되풀이하게 될 위험이 있다.

민간의료기관들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형태의 '협력적 거버넌스'를 통해 필수의료 공백을 메우려는 시도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이에 대한 정책 평가가 부재한 가운데 매번 '포장'만 바꿔가며 정부 대책에 포함되고 있다. 평가가 없으니 어떻게 '잘' 협력하게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진전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주먹구구식 정책 대응의 또 다른 문제는, 상충되는 목표와 효과를 가진 정책들이 뒤죽박죽 시행되면서 체계의 비효율성을 높일 위험이 크다는 점이다. 체계적 관점에서 보면 필수의료 공백 문제 해결과 공공보건의료기관의 기능 강화는 사실상 같은 과제로 볼 수 있다.

필수의료 문제를 말하면서 정작 코로나19 대응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공공병원에 대한 재정지원을 축소하는 것은 정책적 일관성이 결여된 것이다. 국립대병원의 영리화를 부추기는 기술지주회사·자회사의 설립 허용 방안을 검토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보건의료산업을 육성한다면서 각종 규제 폐지에 골몰하는 가운데 이것이 필수의료에 미칠 부정적 영향은 고려되지 않는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형태로 체계를 재구축해야
 

지난 2월 22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 어린이병원에서 열린 소아진료 등 필수의료 정책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대통령실


체계의 관점에서 보면 필수의료 공백 문제와 과잉·중복진료 문제, 그로 인한 의료비 급증과 의료 불신은 서로 무관하지 않다. 이는 모두 한국의 보건의료체계가 지나치게 '시장화·상업화'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다. 시장의 인력수급 메커니즘에 따라 필수의료 영역에서 의사 인력이 유출되는 것이고, 공급자유인수요에 의해 과다의료 관행이 만연해지는 것이다. 시장구조 속에서 의사들이 자기 이익에 충실한 경제적 주체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문제는 보건의료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시장실패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는 의료 이용과 건강의 불평등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시장성을 일정 수준 통제하기 위한 공적 개입과 통제는 불가피하다. 이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을 지키는 일이다.

필수의료 공백이 사회적 '재난'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면 이는 시장메커니즘을 충분히 통제할 만큼 체계의 공공성이 강하지 않은 결과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지금의 필수의료 위기는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의 위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근본 대안은 체계의 공공성 강화가 될 수밖에 없다. 이를 두고 '의료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지만, 보건의료 공공성 수준이 높은 서구 유럽의 자본주의 국가들만 보더라도 이 주장이 오류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보건의료체계는 역사적 경로를 통해 만들어져 왔다. 지금처럼 시장지배구조가 형성되고 의료전문직이 독점적 권위를 확보하게 된 배경에는 권위주의 정권 시절 경제성장에 주력하기 위해 국가의 기본책무인 의료보장 역할을 시장에 방임하였던 정치적 결정이 자리하고 있다. 이후 의료보험 도입으로 의료수요가 크게 늘어났을 때도 공적 공급을 늘리기보다 장기 저금리의 차관제공과 금융알선 등을 통해 개업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민간 시장의 공급 기반을 확대하였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서 경제성장 정체와 불평등 심화, 인구 고령화와 수도권 쏠림, 지역쇠퇴 등의 '신사회적' 문제가 대두되는 가운데 시장실패에 의한 보건의료체계의 비효율성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커졌다.

당시 '공공병원 30% 확충' 공약을 내세웠던 참여정부는 '공공보건의료 확충 종합대책'(2005)을 발표하며 민간의료시장을 유의미하게 견제할 수 있는 수준으로 공공보건의료 자원을 확충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 '공공보건의료에 관한 법률'(2012) 개정을 통해 공공보건의료 개념이 '소유'관점에서 '기능'관점으로 전환되면서, 사실상 한국 보건의료체계는 압도적 비중을 차지하는 민간의료시장에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필수의료 공백 문제는 그 뿌리가 깊고 넓다. 매우 어려운 과제이지만, 모두가 안심하고 신뢰할 수 있는 보건의료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체계의 공공성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과거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절에 형성된 틀을 굳이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다. 지금 시대의 요구에 맞게, 사람 중심 관점에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책임지는 형태로 체계를 재구축해야 한다.

또한,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는 단지 공공보건의료기관의 양적 확충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불보상제도나 의료전달(이용)체계 등 체계의 모든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단번에 획기적인 변화를 만들 수 없겠지만, 향후 전체 보건의료체계를 어떤 형태로 새롭게 개편할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비전과 청사진을 가지고 단계별 세부 정책을 구상하고 추진하면 된다. 당연히 지금 논의되는 의사 공급 확대 정책 역시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강화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시민건강연구소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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