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04 11:53최종 업데이트 23.05.0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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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영화 <송암동>의 특별상영을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특전사 K의 새로운 증언을 비롯한 송암동 일대 사건을 연속 보도하면서,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인 5월 27일까지 펀딩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전재룡씨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숨진 동생 고 전재수(당시 11세)군의 묘를 지난 3월 31일 찾아 눈물을 훔치고 있다. ⓒ 소중한

 
'고무신'.


43년이 지났지만 전재룡(62)씨는 이 세 글자를 쉽게 입에 올리지 못했다. 아홉 살 어린 동생에게 사준 새 고무신은 여전히 그에게 회한으로 남아 있다.


1980년 5월 24일 광주 외곽의 진제마을. 재룡씨의 동생 전재수(당시 11세, 효덕초 4학년)군은 마을 인근에서 친구들과 놀다 11공수여단이 난사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확인된 희생자 중 가장 어린 나이의 사망자다. 5월 21일 전남도청에서 광주 외곽 지역으로 물러난 11공수여단은, 5월 24일 주남마을에서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중 송암동 인근을 지나며 이 같은 만행을 저질렀다.

6월 9일 작성된 재수군의 사체검안서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① 우복부 0.5×0.5cm 사입구와 좌복부 7×5cm 사출구 있는 관통총상 ② 후대퇴부 0.5×0.5cm, 2×1cm 사입구와 (후대퇴부) 6×10cm 후하퇴부 6×3cm 사출구 있는 관통총상 ③ 좌대퇴부 골절
 

고 전재수군 검시조서 및 사체검안서. ⓒ 5.18전자자료총서

   
오른쪽 배로 들어가 왼쪽 배를 뚫고 나온 한 발의 총상. 뒤쪽 허벅지로 들어가 각각 허벅지와 종아리로 뚫고 나온 두 발의 총상. 그리고 부러져 버린 왼쪽 허벅지 뼈. 5월 24일 당일 가장 먼저 동생의 참상을 확인한 재룡씨는 "앞이 휑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헐레벌떡 갔더니 동생이 엎어져 있드만요. 뒤집었는데 하나도 없어브러요. 아랫배가 휑해요. 안에가 싹 다 없어져 브렀고 바닥에는 피만, 그 풀밭이 다 피로 물들어 브렀죠. 그걸 보는 순간 제가 돌아브렀어요. 그래갖고 기절을 했는디 그래도 도롯가로 나가봤죠. 탄피가 쫙 깔렸드만요. 얼마나 쏴브렀는지 탄피가, 탄피가... 숨이 다 막혀블드만요."

지난 3월 31일 광주를 찾아 재룡씨를 만났다.  

'난 못 배웠어도 너만큼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숨진 고 전재수(당시 11세)군의 묘. ⓒ 소중한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일찌감치 자동차공업사에 취직한 재룡씨는 월급 1500원을 받으면서도 가족들을 살뜰히 챙겼다. 특히 어릴 적부터 명석한 모습을 보였던 동생 재수를 보며 '나는 못 배웠어도 니는 꼭 갈쳐야 겄다"고 생각한 재룡씨였다.

"아야 재수야, 니는 커서 뭣 될래?"
"형, 저는 판·검사 될랍니다. 정의로운 판·검사요."


1980년 5월 15일, 월급봉투를 들고 집으로 온 재룡씨의 눈에 동생의 늘어난 고무신이 보였다. 곧장 어머니에게 돈을 건네며 "재수 새 고무신 하나 사주셔요"라고 부탁했다. 형이 사준 새 고무신이 생겼음에도 동생은 한동안 헌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재룡씨는 5월 19~20일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 시내에서 "운전 할 줄 아는 분!"이라는 외침을 듣고 곧장 손을 든 재룡씨는 서부경찰서, 무진중학교, 백운동, 옥천사 등을 거쳐 전남도청으로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곧장 동네에 "재룡이가 버스 운전하고 다닌답디다"라는 소문이 퍼졌다. 옥천사 앞에서 기다리던 아버지는 버스에서 재룡씨를 끌어내 툇마루 아래 고구마굴에 가둬버렸다. 그 이후 재룡씨는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

5월 24일 점심을 먹은 뒤, 재수군은 친구들과 놀고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모처럼 새 고무신을 신으며 친구들에게 자랑하겠다는 동생의 모습에 재룡씨는 새삼 뿌듯했다.

그런데 1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갑자기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총소리는 잦아들 생각을 하지 않고 더욱 거세졌다. 재룡씨가 "뭔 총소리가 이리 심하다냐"고 심각해하던 중 마을회관 앰프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후 3시가 조금 못 된 시각이었다.

"재수가 한씨 선산에서 놀다가 쓰러져 있답니다. 한씨 선산에 재수가 쓰러져 있답니다."
 

고 전재수군이 숨진 위치. ⓒ 1983년 항공사진

 
한씨 선산 인근에는 너른 풀밭이 있어 진제마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재룡씨는 곧장 동생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그런 재룡씨의 귓전엔 그때까지도 "총알이 슁슁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룡씨는 "하늘이 도왔는지 나는 총에 맞지 않았다"라고 떠올렸다.

"(총알이 쏟아져도) 어쩔 것입니까. 동생이 쓰러졌다는디. 나는 동생이 살아있을 줄 알고 갔는디, 가서 보니까... 참 비참하드만요. 공수부대 애들이 지나가니까 첨엔 재수랑 애들이 손도 흔들어주고 했답니다. 거기다 총을 쏴브니까 무서워서 도망가던 중에 재수가 총에 맞았습니다. 한씨 선산이 약간 경사가 졌거든요. 도망치다가 고무신 하나가 벗겨져 브러서 그걸 주워서 다시 올라오다가..."

이때의 총격으로 숨진 이는 재수군뿐만이 아니었다. 인근 원제마을 저수지에서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던 방광범(당시 12세, 전남중 1학년)군 또한 머리에 총을 맞고 숨졌다. 그의 검시조서엔 "두부관통 총상(두개골 좌측이 떨어져 나감)"이라고 적혀 있다.

효덕초등학교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던 김문수(당시 효덕초 5학년)군은 어깨와 허리에 총상을 입었다. 진제마을 집에 머물던 노득기(당시 34세)씨는 갑작스레 날아든 총알에 어깨를 맞았다. 윤영화(당시 37세)씨는 효덕초등학교에서 인성고등학교 인근으로 이동하던 중, 김영묵(당시 65세)·최철진(당시 38세)씨는 벽돌공장에서 휴식을 취하던 중, 김행남(당시 39세)씨는 칠면조 농장에서 일하던 중 총상을 입었다.

동생에 이어 어머니마저
 

5.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숨진 고 전재수(당시 11세)군의 형 전재룡씨가 지난 3월 31일 동생의 묘를 찾았다. ⓒ 소중한

   
동생을 가매장한 후 열흘쯤 지나 관공서에서 재룡씨 가족을 찾아왔다. 사인을 알아야 하니 시신을 병원으로 옮기자고 했다.

"어린 아이니까 일단 항아리에 넣어서 앞산에 묻어뒀습니다. 그걸 다시 파왔는데 얼마나 기가 맥히겄습니까. 부패된 시신을 경운기에 실어다 전대병원으로 가는디 제가 거기서 정신병자가 안 된 게 다행일 정돕니다. 어머님이 울고 난리인 상황에서, 무섭지만 제가 해야 하지 않았겄습니까.

전대병원 영안실에 (동생 시신을) 갖다 주면서 보는디 진짜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시신이 있더군요)... 그 냄시가 얼마나 심했는지 코피가 다 터져 브렀습니다. 병원에서 확인이 끝나니까 동생을 관에 넣었습니다. 그리곤 낮엔 못 오게 했습니다. 밤이 되니까 관에 꼬리표만 붙여갖고 망월동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망월동에 가보니 구덩이가 다 파져 있드만요. 꼬리표에 적힌 것이랑 같은 구덩이에 맞춰서 묻고 (위치를) 확인만 하고 왔습니다."


동생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재룡씨는 어머니마저 잃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화병으로 어머니는 5년을 채 살지 못했다. 재룡씨는 "어머님을 잃고 많이 방황했다"며 울먹였다.

"동생 죽고 어머니가 식사를 못했습니다. 밥을 못 먹고 맨 신경을 쓰다 보니까 화병이 든 거죠. 삐짝 말라갖고 나중엔 간이 다 굳어브렀더만요. 병원에 계셨는데 모든 장기가 다 망가져서 더 이상 치료가 안 된다고 해서 집으로 모셨습니다. 그렇게 복수가 다 차 갖고 숨만 쉬시다가... 제가 우리 어머니를 참 좋아했습니다. 생전 어머님 덕분에 철이 든 사람입니다. 어머님을 잃고 제가 죽을라고도 했었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숨진 고 전재수(당시 11세)군의 형 전재룡씨가 지난 3월 31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인터뷰를 하며 눈물을 애써 참고 있다. ⓒ 소중한

 
연이어 가족을 떠나보내고도 재룡씨는 입을 다문 채 살아야 했다.

"안기부가 저희를 관리하고 감사했습니다. 한 번씩 그 사람들이 와서 어디에 가자고 차를 태워다가 해남이고 어디고 갑니다. 뭔 할 이야기도 없는데 그렇게 갔다가 집에 오믄, 그날 전두환이가 광주에 왔다 간 거드만요. 군대에 갈라고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을 땐 '너 같은 놈은 군대에 갈 자격도 없다'며 거부당했습니다. 가슴앓이를 많이 했죠."

재룡씨에게 '동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청했다. 어렵사리 입을 뗐지만 재룡씨는 말을 잇지 못한 채 눈물을 훔쳤다.

"동생이... 제가 43년 동안 참...
...죄송합니다. 다음에 할게요. 제가 너무 가슴앓이를 해서..."


대신 재룡씨는 2년 전 전두환이 재판을 받기 위해 광주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어떤 기자와 인터뷰를 했었어요. 그때 제가 '오월 영령 앞에서 딱 한 번만이라도 사죄했으면 좋겄다'고 했었죠. 그런데 얼마 뒤에 말 한 마디 없이 사망하더라고요."

그런데 재룡씨는 이날 뜻밖의 만남을 앞두고 있었다.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 측이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동생의 묘를 참배하고 싶다고 며칠 전 연락해 온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 봉주영

  

영화 <송암동> 포스터. ⓒ 영화 <송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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