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3.02 07:12최종 업데이트 23.03.02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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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철공소에서 김일용 장인이 작업하고 있다. 일감이 없어서 큰 화로의 불은 꺼 놓고 있었다. 2023년 2월 9일. ⓒ 정진오


도시마다 유명한 먹자골목 한두 곳씩은 있게 마련이다. 서울 신당동하면 떡볶이가 떠오르고, 시화방조제를 지나 인천 영흥도 가는 길에는 온통 해물칼국수를 파는 집들이다. 모여 있으면 손님을 끄는 힘도 그만큼 강하게 마련.

대장간도 그랬던 적이 있다. 서울 을지로7가가 대표적인 대장간 거리였다. 녹번동이나 수색, 구파발 등지에도 대장간이 많았다. 그런 대장간들이 1970~80년대 급격한 산업구조 개편과 도시개발을 거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서울시는 미래유산보존위원회를 구성해 미래 세대에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489개의 서울미래유산을 지정했다. 그 가운데 두 번째가 대장간이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대장간 4곳을 선정해 1년간 기록했다. 그 결과물로 <서울의 대장간>이라는 보고서를 2021년 펴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의 대장장이들은 조선시대 무기를 제조하던 데서 출발한다. 무기를 만들던 각 군영(軍營)이 을지로 7가 일대에 있었는데 여기서 일하던 야장(冶匠)들이 을지로 7가의 대장간과 철물 산업의 역사로 이어졌다고 한다. 

이곳에 수십 곳씩 밀집해 있던 대장간들은 다 떠나가고 이제는 2곳만이 남아 있다. <조선일보>는 1980년 '사라져 가는 풍물 – 옛것의 아쉬움 그 정취를 찾아'란 제목의 기획 시리즈를 내보냈다. 그 첫 번째가 대장간이었다. 같은해 4월 15일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서울에서 영업하던 대장간은 50여 곳이었다.

인천시 중구 도원동, 국내 마지막 남은 대장간 골목
     

도로 건너편에서 바라본 도원동 대장간 거리. 대장간 거리 아래쪽에 도시형 생활주택 건설 현장의 타워크레인이 우뚝하다. 이들 빌딩이 대장간 거리를 바짝 죄어오는 형국이다. 2022년 10월 12일. ⓒ 정진오

 
그로부터 40여 년.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대장간이 모여 있는 곳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그나마 인천광역시 중구 도원동에 대장간 3곳이 바짝 붙어 있는 데가 있다. 다소 옹색하기는 하지만, 국내 마지막 남은 대장간 골목, 대장간 거리라고 말할 수 있다. 동인천역에서 제물포역 가는 대로변 도원역 부근에 인일철공소, 인천철공소, 인해대장간, 이렇게 3곳이 모여 화로에 불을 피우고 있다. 

지난해 여름까지 도원철공소가 있었는데, 가게를 비워달라는 건물주 요구에 고개 넘어 숭의동 공구상가로 옮겨 가고 말았다. 4곳에서 3곳으로, 겨우 1곳 빠져나갔을 뿐인데, 그 빈자리가 유난히 크다. 도원철공소가 있던 자리에는 전세 사기와 주차난 등으로 요새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도시형 생활주택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주택 건설로 밀려나는 인천 도원동의 국내 마지막 대장간 거리가 전문 연구기관의 실태 조사에서조차 외면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2019년 <전통 철물 제법 기준 마련 및 활성화 방안 연구 종합보고서>를 냈다. 

이 보고서는 2016년 11월 기준, 전국에서 운영 중인 것으로 확인된 대장간이 총 94개소라고 밝히고 있다. 이들 중 인천에는 3개소가 있다면서 동구의 화수부두 <한성닻공장>, 영흥도 <영흥대장간>, 선재도 <선재대장간> 등을 열거했다. 

당시 도원동에서도 문을 열고 작업하던 대장간이 여럿 있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이들은 쏙 빠져 있다. 3개년에 걸쳐 진행된 연구 성과물이라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인천 도원동의 마지막 남은 대장간 거리를 활성화하기 위한 관계 당국의 빈틈없는 자세가 필요한 시기이다.
 

사진 왼쪽이 동생 송종원 장인이 운영하는 인천철공소. 오른쪽은 둘째 형 송종화 장인의 인일철공소. 둘을 합치면 형제대장간이다. 2023년 2월 18일. ⓒ 정진오

 
도원동 대장간 거리의 맏형 격은 송종화 장인의 <인일철공소>이다. 그 바로 옆집인 <인천철공소>는 송종화 장인의 다섯 살 아래 동생이 운영한다. 1943년생 송종원 장인. 전국에 형제대장간이라는 이름이 여럿 된다. 겉으로 써 붙이지만 않았지 여기 <인일철공소>와 <인천철공소>가 바로 형제대장간이다. 

송종원 장인도 10대 후반에 대장간에서 기술을 익히기 시작했다. 둘째 형님인 송종화 장인이 먼저 대장간에 들어간 게 영향을 미쳤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큰 형님도 대장간을 했다. 1936년생이던 큰형 역시 두 살 아래 동생인 송종화 장인을 따라서 대장간 일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이들 3형제가 같은 데서 일한 적도 있다. 한 집안 전체가 대장간으로 생계를 잇고 각자 가정을 꾸려 왔다.

형제 대장간, <인일철공소>와 <인천철공소>

<인천철공소>란 간판을 달고 있지만 도원동 대장간 거리에서 처음으로 '대장간'이란 말을 붙인 것은 송종원 장인이다. 개업할 때 <인천대장간>이라고 했었는데 가족들을 비롯한 주변에서 너무 촌스럽다고 야단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떠밀리다시피 해서 <인천철공소>로 고쳤다.

송종원 장인은 60년을 이어온 자신의 대장장이 기술이 형님인 송종화 장인을 못 따라간다고 실토한다. "대한민국 다 다녀도 이 양반보다 나은 분이 없어요." 동생은 그래서 형님의 특기라고 할 수 있는 엿가위는 아예 만들지를 않는다. 바로 옆에서 비교가 되기 때문이다.

인천 대장장이들이 다른 지방 대장장이에 비해 기술력이 높다고 송종원 장인은 말한다. "다른 지방 대장장이들은 인천에 와서 일을 못 해요. 기술이 달리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인천 사람들은 전국 어딜 가더라도 다 할 수가 있어요. 안 해본 일이 없으니까요." 송종화 장인도 동생과 같은 생각이다.

두 형제가 자부심으로 느끼는 인천 대장장이들의 높은 기술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여러 가지 기술을 익혀야 하는 다양성에 그 답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인천처럼 다양한 종류의 물품을 요구하는 곳이 많지 않다.
 

화수부두에 있던 화성닻공장 터. 공장은 여러 해 전에 이곳이 주차장으로 바뀔 때 이전했다. 버스정류장 옆 오토바이 서 있는 자리가 닻 공장 자리였다고 동네 주민이 알려주었다. 2023년 2월 15일. ⓒ 정진오

 
드넓은 바다를 끼고 있으니 다양한 해산물 채취 기구나 어선에서 쓰는 각종 도구가 필요하다. 우리네 손에 맞고 오래 쓰기에는 대장간이 제격이다. 심지어 배가 정박하는데 필수인 커다란 닻도 대장간에서 만들었다. 주로 만석부두나 화수부두, 연안부두 등지에 있었다. 

닻 만들던 대장간은 도시개발에 밀려 건물 임대료가 싼 인천 이외의 지역으로 떠난 지 오래다. 화수부두에 있던 한성닻공장도 벌써 몇 년 전에 김포 대명포구 쪽으로 이전했다고 한 주민이 말해주었다.

인천에는 농사짓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다. 강화도를 비롯한 크고 작은 섬 지역뿐만 아니라 계양구, 서구, 남동구 등지에도 농토가 널찍하다. 농사에 필요한 각종 연장을 대장간에서 사 가거나 고쳐서 가는 사람들도 제법 된다. 인천은 특히 수도권 최대 공단지대이다 보니 각종 공장 기계에 들어가는 부품을 대장간에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렇듯이 어촌과 농촌, 공장을 고객으로 두고 있는 인천 대장장이들의 기술력이 그 다양성 면에서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물론 다른 지역의 대장장이들은 펄쩍 뛸 게 분명하다. 서로가 제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일 게 뻔하다. 이래서 '대장장이 전국 경연대회' 같은 걸 만들어 최고의 장인을 겨루는 기회를 마련하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인천 도원동 대장간 거리의 막내 <인해철공소> 

많은 이들이 인천의 도시 특성을 이야기하면서 다양성을 말하고는 한다. 여러 지방 출신들이 섞여 사는 용광로 같은 도시가 인천이라는 얘기다. 대장간의 모습 역시 그 도시 특성을 닮아가는 모양이다. 동생이 하는 <인천철공소>와 형님이 하는 <인일철공소>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똑같은 게 있다. 화로의 '노(爐)'를 흙을 이겨서 만드는 방식이 같다. 그 형에 그 아우라고나 할까. 다른 대장간에서는 주로 내화벽돌을 쌓아서 노를 만든다.

<인일철공소>와 <인천철공소>를 거쳐 오르막길 위쪽에 있는 <인해철공소>. 도원동 대장간 거리의 막내라고 할 수 있다. 주인은 김일용 장인. 막내라고는 하지만 1950년에 태어났으니 일흔이 훌쩍 넘었다. <인해철공소>의 '인해'는 인천 앞바다란 의미이다. <인일철공소>가 인천에서 제일가는 대장간을 지향하면서 지었고, <인천철공소>는 글자 그대로 인천에서 따왔으니 이들 세 곳 모두 간판에서부터 '인천'을 앞세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인해철공소 앞에서 본 대장간 거리. 인해철공소에는 인해대장간, 인해공업사라는 간판도 보인다. 철물 장식의 대장간 외관이 이채롭다. 2023년 2월 18일. ⓒ 정진오

 

김일용 장인이 1999년에 등록한 의장등록 물품. 나선형으로 둥그렇게 만든 외형이 독특하다. 돈만 들고 실효성이 없어 의장등록 유지를 포기했다. 그 모형이 대장간 내부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2023년 2월 13일. ⓒ 정진오

 
<인해철공소> 간판은 세 가지다. 2년쯤 전에 <인해철공소>와 나란히 <인해대장간>이라고 따로 달았다. 자꾸만 옛것이 사라져 가는 게 아쉬운 요즘인데 대장간이라는 말이라도 살리고 싶어서였다. 

그 위에 하나가 더 있다. <인해공업사>. 30여 년 전 이곳으로 올 때 달았던 이름이다. 이걸 철공소로 바꾼 이유가 재밌다. 공업사라고 하니 차량을 수리하는 카센터인 줄 알고 차를 맡기러 오는 손님이 더러 있더란다. 안 되겠다 싶어 공업사에서 철공소로 바꾸었다. 김일용 장인은 자신이 직접 작업해 만든 간판을 그대로 두고 있다. 이 세 개의 간판에 <인해철공소>의 이력이 고스란히 담겼다.

<인해철공소>는 다른 곳보다 규모가 크다. 간판 두 개를 나란히 달아도 넉넉할 정도다. 화로도 2개이고, 모루도 2개이다. 그런데 올해 유난히 일감이 없어 김일용 장인의 한숨이 깊다. 몇 남지는 않았지만 인천 도심의 대장간은 건설 경기와 공장들의 경영 상황에 따라 일감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한다. 건설업을 중심으로 불어닥친 경기 침체 상황이 대장간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김일용 장인은 손재주를 타고났다. 1999년 특허청으로부터 '의장등록'까지 받은 실력자다. 의장의 대상이 되는 물품은 '건축구조물용 장신구'이다. 유리문에 붙이는 철구조물 디자인에도 남다른 솜씨를 발휘한다. 

그런데 이 의장등록이라는 게 관리 비용만 들어갈 뿐 별다른 효용성이 없었다. 건축 관련 장신구 사업을 하면서 자신만의 고유성을 인정받기가 쉽지 않았다. 제도적 허점 때문이다. 버티다 버티다 지금은 아예 그 권한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종채 장인이 운영하는 <도원철공소>
 

2022년 여름 도원동에서 숭의동 공구상가로 이전한 도원철공소의 외부 모습. 2023년 2월 18일. ⓒ 정진오

 
김일용 장인은 14세에 목공 일부터 배웠다. 1년쯤 하다가 대장간 일로 방향을 틀었다. <연백농구점>, <황곡철공소> 등 주로 이쪽 도원동 대장간에서 일했다. 그 뒤로 철물 공장 사업을 크게 하기도 했는데 여의치가 않았다. 그래서 다시 돌아와 이 자리에 <인해공업사>를 차렸던 거다.

대장간 세 곳이 모여 있다 보니 손님들 입장에서는 좋은 점이 많다. 같은 물건을 사더라도 세 곳의 솜씨를 비교할 수가 있다. 가격은 대략 비슷하게 맞추고는 있다지만 융통성을 발휘해 손님과 주인이 흥정할 수도 있다. 복잡한 걸 요구할 때, 이쪽에서는 안 된다는 일도 저쪽에 가면 된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도원동 대장간 거리를 이야기하면서 옆 동네인 숭의동 공구상가로 이사 가야 했던 <도원철공소>를 빼놓을 수가 없다. <도원철공소>는 1949년생인 나종채 장인이 운영한다. 나종채 장인은 고향 전라남도에서 열일곱 되던 해에 인천에 와서 대장간 일을 시작했다. <연백농구점>에서였다. 여기서 인해철공소의 김일용 장인과 함께 일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부평에 있던 <한독금속>이나 서울 이문동의 <이화기계>를 비롯한 큰 업체에 스카우트 되어 가기도 했다. 연탄 분쇄기 날을 만들던 <이화기계>에 갈 때는 1980년대 초반이었는데, 당시로는 거액인 1500만 원을 선불로 받고 갔다고 나종채 장인은 자랑삼아 이야기했다. 

그만큼 자신의 쇠 다루는 솜씨가 서울에까지 소문이 났었다는 얘기다. 거기에서 2년 정도 일하다가 다시 인천으로 오게 되었다. 인천의 여러 대장간에서 일하던 나종채 장인은 2000년, 좀 늦은 쉰한 살에 <도원철공소>를 열었다.

나종채 장인과 김일용 장인의 예술적 기질
 

도원철공소 내부 모습. 2023년 2월 18일 토요일 오후 도원철공소는 작업하지 않고 쉬고 있었다. ⓒ 정진오

 
지난해에 숭의동 공구상가로 옮긴 나종채 장인은 요즘 걱정이 많다. 일감이 줄어든 것도 준 것이지만 주변에서 대장간의 소음이 크다고 관할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기 시작한 거다. 기계 해머 작업을 할 때는 '땅~땅~땅' 소리가 무척 크다. 살림집 옆에서는 작업하기 어려운 이유다. 

도원동 대장간 거리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좋은 편이다. 차량 통행이 많은 왕복 6차선 대로변에, 경인전철이 지나는 곳이다 보니 차량과 전철 소음에 대장간 소리가 묻히게 마련이다. 또 가까이에는 가정집도 거의 없다. 이런 좋은 조건의 자리에서 떠밀려 이사했으니 지금의 상황이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나종채 장인과 김일용 장인은 어려서부터 함께 대장간 일을 배운 사이여서 그런지 예술적인 기질을 몸에 품고 사는 점도 비슷하다. 김일용 장인은 사진 전문가다. 그의 산악 사진은 꽤 알려져 있다. 한국산악사진가협회 전시회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대장간 안에도 작품 여러 개를 걸어놓고 있다. 그의 대장간은 손수 만든 각종 연장뿐만 아니라 사진 작품 전시장이기도 하다. 

나종채 장인은 대장간 휴게실에 악기 2개를 애지중지 모셔 두고 있다. 하나는 장구, 또 하나는 색소폰이다. 장구는 어려서부터 소질이 있다는 소릴 들었다. 색소폰은 얼마 전부터 교습소에 다니면서 열심히 배우는 중이다. 새벽 4시면 어김없이 대장간 문을 열고 출근하는 나종채 장인. 70대 중반의 나이에 새로운 장르의 악기를 익히느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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