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16 11:44최종 업데이트 23.05.17 18:50
  • 본문듣기
대장간에 가 본 적 있으신가요? 대장간은 인류 최초의 기술 집약형 산업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불과 쇠, 그리고 대장장이의 땀과 아이디어가 결합해 도구를 만들어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장장이들이 한 나라의 기술력을 좌우해 왔습니다. 대장간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옛날 옛적부터 전해오던 대장장이 기술이 끊어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장간은 꺼트리지 말아야 할 불씨와도 같습니다. 대장간의 현재 모습과 오래된 역사, 문화적 흐름까지 두루 살피는 글을 20여 차례에 걸쳐 싣습니다. 우리가 왜 대장간을 지켜 내야 하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기자말]

송종화 장인이 쇳덩이를 화로에 넣고 달구고 있다. 2023년 1월 19일 인천 <인일철공소>. ⓒ 정진오

 

[쏙쏙뉴스] '담금질 기술 1인자' 최고령 대장장이의 하루 ⓒ 이한기


85세 대장장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화로에서는 지름 5cm가 넘는 굵은 쇠막대기가 누런 색깔로 달구어졌다. 대장장이는 커다란 집게로 그 쇠막대기의 끝을 잡고 화로 바로 옆에 놓인 기계 해머(스프링 해머)로 가져갔다. 의자에 앉아 오른발로 해머의 페달을 밟자 해머 머리인 사각형의 쇳덩이가 내려치기 시작했다. "땅~땅~땅~땅~". 

대장장이는 양손으로 쥔 쇠막대기를 해머가 고르게 때릴 수 있도록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돌리기도 하고, 밀었다 당겼다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차례 끝에 길이가 30cm가 채 안 되던 쇠 막대기는 굵기가 약간 가늘어지고 길이는 3cm 정도 더 늘어나 있었다. 


'망강'이라 불리는 쇠인데 강철 중에서도 단단한 축에 든다고 한다. 워낙 강하다 보니 불에 달군 뒤 망치질을 해도 웬만해서 잘 늘어나지 않는다. 그 단단한 걸 더 강하게 해달라면서 어느 공장에서 맡겼다고 했다. 

2023년 1월 12일, 인천광역시 중구 참외전로 대장간 골목의 최고령 대장장이가 일하는 <인일철공소>는 여느 때처럼 바쁘게 돌아갔다. 주인 겸 대장은 1938년생 범띠 송종화 장인. 1953년 15세 때 처음 대장간에 발을 디뎠다. 대장간 일을 배운 지 올해로 꼭 70년. 안경도 쓰지 않았는데 밀리미터(mm) 눈금까지 정확히 잰다. 혼자서 하다 보니 힘에 부치는 일이 많지만 쇠를 다루는 솜씨는 한창 때와 진배없다.

전철역과 가깝고 대로변에 있는 이 도심 속 대장간의 손님들은 다양하다. 각종 공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주문하기도 하고, 건설현장에서 쓰는 연장을 요구하기도 한다. 어구나 농기구를 사 가기도 하고, 고장 난 것들을 고쳐 달라면서 가져오기도 한다. 전국 각지에서 주문하는 물건도 있다. 
 

송종화 장인이 커다란 집게를 만들 위해 불에 달군 철근을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질을 하고 있다. 2023년 1월 12일 인천 <인일철공소>. ⓒ 정진오


마침, 망강으로 된 쇠막대기 작업이 끝나고 커다란 집게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데 60대로 보이는 여성 2명이 송종화 장인을 찾았다. 그들은 메고 온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바닷가에서 굴을 따는 '조새'라고 하는 도구였는데, 두 개가 생긴 모양이 서로 달랐다. 고장난 부분도 제각각이었다. 하나는 뒤쪽 끝 가느다란 쇠꼬챙이가 부러져 나갔고, 또 하나는 앞쪽의 쇠 날이 너무 많이 휘어 있었다. 

둘 다 불에 달궈 망치질하는 작업이 필수였다. 화로가 있는 대장간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부러진 쇠꼬챙이를 새로 끼우고, 앞의 무뎌진 데를 뾰족하게 벼리는 일이 끝나자 새것과 다름없었다. '얼마냐'니 3천 원이라고 했다. 구부러진 것을 펴는 작업은 1천5백 원을 받았다. 

손님은 5백 원 잔돈이 없었고, 주인은 거스름돈을 마련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들은 인천 남동구 만수동에서 왔다고 했다. 겨울이면 가끔 영종도 옆 실미도 쪽 바닷가에 나가서 굴을 딴다고 했다. 이 작업 도구를 고치기 위해 인천지하철 2호선을 타고, 다시 주안역에서 경인전철로 갈아탄 뒤 도원역에 내려서 여기까지 온 거였다.

대장장이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게 담금질

2023년 설 연휴가 코앞이던 1월 19일 오후, 설 잘 쇠시라고 인일철공소에 인사를 겸해 갔다가 색다른 광경을 보게 되었다. 화로에서 시뻘겋게 익은 쇳덩이를 새카만 기름통에 담그는 게 아닌가. 기름에 불을 가져가다니. 불이 번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름 표면에서만 '확~~' 하고 불꽃이 일었다가 금세 꺼졌다. 

기름통 안에 든 기름은 엔진오일이라고 했다. 폐유냐고 물었더니 새것이란다. 색깔이 검게 변한 것은 불에 달구어진 쇠를 담그는 순간 오일이 탔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동차 엔진오일을 새로 넣은 지 얼마 안 되어도 금방 까매지는 것과 같은 원리였다. 엔진오일은 휘발성이 낮아서 담금질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런데 아무 작업이나 기름에 담그는 게 아니라고 했다. 
 

시뻘겋게 단 쇳덩이를 기름통에 넣자 기름 표면에 불꽃이 번졌다. 대장간에서 하는 말로 '기름 야끼' 순간이다. 2023년 1월 19일 인천 <인일철공소>. ⓒ 정진오

 
보통은 물로 담금질을 하는데, 단단한 쇠를 다룰 때는 기름에 넣는다. 쇠의 재질에 따라 물이냐, 기름이냐가 갈린다. 송종화 장인은 이 쇳덩이들을 화로에 넣어 달구고, 해머로 두드려 불리고, 적당히 날을 세운 뒤 물에 담갔다가 다시 달구었고, 마지막 공정으로 기름통에 넣어 식혔다. 그리고 너무 오래 지나지 않아 꺼내서 기름기를 뺐다.  

바로 그때 화물차를 몰고 온 손님이 들어서면서 "노미 세 개요~"라고 말했다. 기름통의 그 쇳덩이 얘기였다. 그는 아침에 맡기고 간 걸 찾으러 온 굴착기 기사였다. 굴착기를 코끼리로 비유하자면, 이 쇳덩이는 코 끝에 매달아 '콕~콕~콕~' 돌을 깨거나 단단한 땅을 파내는 뾰족한 쇠침 같은 거였다. 이게 무뎌지자 벼려달라고 맡긴 거였다.

굴착기(掘鑿機) 기사가 얘기한 '노미(のみ, 鑿)'는 일본말이다. 우리로 치면 '나무에 홈을 파는 끌이나 돌에 구멍을 뚫는 정'을 말한다. 건설 현장이 유난히 그렇지만 대장간에도 일본말로 된 용어가 많다. 대표적인 게 달궈진 쇠를 물에 넣었다 뺐다 하는 담금질. 대장장이들은 이를 '야끼 넣는다'고 표현한다. 

여기서 '야끼(やき)'는 야끼만두할 때 그 야끼이다. 굽는다는 뜻도 있고, 담금질한다는 의미도 있다. 송종화 장인은 이 야끼 넣는 기술의 국내 1인자임을 자처한다. 대장장이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게 담금질이다. 쇠의 강도를 결정짓는 과정이 담금질이다. 쇠의 입장에서 보자면, 내가 세지느냐, 약해지느냐는 결정적 순간이 바로 이때다. 
 

송종화 장인이 엿가위 기초작업을 마치고 가위 날이 될 두 쪽을 맞춰보고 있다. 2023년 1월 19일 인천 <인일철공소>. ⓒ 정진오

 
물 야끼이건 기름 야끼이건 이 야끼를 잘 넣어야 쇠가 단단하면서도 부러지지 않고, 이가 빠지지도 않는 좋은 물건이 된다. 송종화 장인은 담금질 비법을 음식 조리에 비유했다. 유명 맛집의 숙수가 음식을 만드는 재료의 비율이나 불의 세기 등을 누구에게도 알려주는 법이 없듯이 대장장이도 자신만의 담금질 기술을 누구한테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했다. 그저 일하면서 어깨너머로 익히고 자꾸 해 보면서 요령을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는 거다.

악기 연주처럼 흥겨운 송종화 장인의 망치질  

송종화 장인이 스스로 담금질 기술의 대한민국 1인자라고 얘기하는 순간, 벽면에 걸린 메모판에 눈길이 갔다. '엿가위 1조(組)'라는 글씨와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 번호의 임자가 엿가위 2개를 만들어달라고 주문한 거였다. 요새 엿가위는 엿을 치는 도구라기보다는 소리를 내는 악기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풍물 공연이 펼쳐지는 곳에서는 어김없이 각설이 복장을 한 엿장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엿가위는 보통 양손에 쥐고 소리를 내기 때문에 1조가 두 개이다. 1조를 한 벌이라고도 한다. 송종화 장인을 만난 지가 8년여나 되었는데 그동안 여러 차례 들렸으면서도 엿가위를 만드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엿가위도 만드시냐고 했더니, 선반 한쪽 귀퉁이에서 예전의 주문지를 한 움큼 꺼냈다. 

주문자의 주소와 전화번호며 수량 등이 적혀 있다. 주소는 전국에 걸쳐 있었다. 얼핏 몇 장만 보았는데, 멀리는 제주도, 부산 해운대, 울산, 경남 함안 등지에서부터 가깝게는 경기도 안양, 서울 등 그야말로 전국 각지에서 엿가위를 만들어 보내 달라는 주문이었다. 이들 전국 각지에서 밀려든 오래된 주문서들은 엿가위 역시 송종화 장인이 대한민국 최고임을 입증하는 증명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3년여 전부터 엿가위를 만들지 않았었다. 하루 내내 일해야 엿가위 3개가 고작이란다. 한 벌 반, 엿장수 2명 몫도 안 된다. 그만큼 손이 많이 간다. 당시 15만 원을 받았는데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예 만드는 걸 포기했던 거다. 그러다가 얼마 전부터 다시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는 20만 원을 받는다. 물가 인상분을 반영하면 그야말로 남는 것도 없다. 
 

송종화 장인이 작업을 마치고 대장간 내부의 물건들을 바라보고 있다. 2023년 1월 19일 인천 <인일철공소>. ⓒ 정진오

 
송종화 장인의 엿가위가 전국에 소문이 난 것은 겉모양도 겉모양이지만 소리가 남달라서라고 한다. 가위가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쇠를 잘 때려서 풀어낼 줄 알아야 한다고 송종화 장인은 강조한다. 엿가위는 낫처럼 굳이 단단해야 할 필요가 없다 보니 야끼를 넣지 않는다. 

그러면, 쇠를 잘 때려서 풀어낸다는 말은 무엇을 이르는가. 달구어진 쇠를 망치로 두드려서 얇게 펴는 걸 잘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게 바로 쇠를 불리는 공정이다. 적당한 온도로 달구어 낼 줄 알아야 하고, 여기에 숙련된 망치질이 중요하다. 송종화 장인의 망치질은 리듬을 탄다. 쇠를 두드리는 강약 조절에 리듬이 실려 있다. 망치가 쇠에 닿는 순간 밖으로 밀기도 하고, 안으로 당기기도 한다. 

망치를 쥔 손에 힘을 주기도 하고, 망치의 무게보다도 더 가볍게 내려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두툼하던 쇠가 넓게 펴지고 모양을 잡는다. 송종화 장인의 망치질은 마치 악기 연주처럼 흥겹게 들리기도 한다. 송종화 장인과 엿가위를 연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얘기가 하나 더 있다. 

쇠를 잘 굽기 위해서는 불의 온도를 달리해야

둥그렇게 말려 있는 엿가위 손잡이. 볼펜처럼 가느다라면서도 원통형으로 길게 돼 있는 것을 손가락을 집어넣어 움직이기 좋게 둥그런 모양으로 구부려 마무리한다. 예전에는 둥그렇게 말린 손잡이 부분이 볼펜 같은 원통형이 아니라 사각형으로 모서리가 져 있었다. 

다듬기는 했지만 모가 나 있으니 가위질을 오래 하게 되면 손이 여간 아픈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엿가위를 공장 제품들처럼 플라스틱 손잡이로 찍어낼 수도 없다. 대개의 엿가위는 자동차 바퀴 쪽 판스프링으로 만든다. 판스프링은 네모나 있으면서 평면이다. 30cm 자를 연상하면 그 모양이 가늠이 간다. 
 

송종화 장인이 만든 엿가위 완성품. 이 2개(한 벌)에 20만 원이다. 온종일 작업해야 한 벌 반, 즉 3개를 만든다. ⓒ 정진오

 
이 네모진 것을 두드려서 손잡이를 만들어야 하는데 볼펜처럼 원통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다. 송종화 장인은 엿장수들의 손 아픔을 생각했다. 네모난 판스프링을 원통이 될 때까지 망치질을 했다. 비록 한 사람의 대장장이는 힘들었지만 수많은 엿장수들은 손이 아프지 않게 가위질을 할 수 있었다. 

송종화 장인은 자신이 엿가위 손잡이를 원통으로 만들어내기 전에 각이 진 것 말고 원통형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본인이 최초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다들 엿가위의 손잡이를 원통으로 만든다. 엿가위 하나에도 사용자를 향한 장인의 배려가 녹아 있다.

대장장이에게 야끼 넣는 기술과 망치질의 숙련도가 중요한 것처럼 불을 다루는 솜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송종화 장인은 쇠를 불에 달구는 것을 굽는다고 표현한다. 쇠를 잘 굽기 위해서는 재질에 따라 불의 온도를 달리할 줄 알아야 한다. 송풍기의 세기를 적절히 조절해야 하고, 괴탄이라고 하는 석탄의 양도 잘 맞추어야 한다. 

쇠가 아무리 단단하다고는 하지만 센 불에 자칫 너무 오래 넣어 두면 녹아 버려 쓸 수가 없다. 화로에서 쇠를 달구는 불 조절과 시간 맞춤이 중요한 이유이다. 이 불 솜씨는 대장간의 기본 중의 기본이다. 불을 안 뒤에야 망치질을 알게 되고, 그다음에 야끼 넣는 법을 배우게 된다. 대장간에서 일을 익히는 순서가 그렇다.

송종화 장인은 80대 중반의 고령임에도 좀처럼 쉬는 법이 없다. 토요일에도 오후 2~3시까지는 문을 연다. 건설 현장이 토요일에도 작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예방접종을 받은 날까지 일을 했을 정도다. 지난해 10월 12일이었다. 송종화 장인은 4차 예방접종을 하느라 좀 늦게 나왔다고 했다. 

"오늘 같은 날은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니, "아이, 뭘 쉬어요"라면서 벽돌 망치 만드는 일을 계속했다. 강력한 한파로 온 나라가 얼어붙었던 지난 1월 25일, 설 연휴 뒤 첫날. 인일철공소의 문은 열려 있었지만 화로의 불은 꺼져 있었다. 야끼 넣는 물통의 물은 꽁꽁 얼어 있었다. 노(爐)는 새것이었다.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 흙을 이겨 새로 바른 거였다. 명절 연휴 앞뒤로는 일감이 없다. 노를 새로 바르거나 다음 일감을 준비하거나 한다. 송종화 장인은 매일같이 대장간 셔터를 올리자마자 노에 불을 지피고, 퇴근하기 직전 불을 끈다. 노는 대장간 일의 시작이자 마무리이다.
 

2022년 10월 12일 차도 쪽에서 바라본 인천 <인일철공소> 정면 모습. 송종화 장인이 기계해머로 작업하고 있다. ⓒ 정진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8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