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3 11:19최종 업데이트 23.05.17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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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화 장인이 쇳덩이를 화로에 넣고 달구고 있다. 2023년 1월 19일 인천 <인일철공소>. ⓒ 정진오

 

[쏙쏙뉴스] '담금질 기술 1인자' 최고령 대장장이의 하루 ⓒ 이한기

 
송종화 장인이 대장간에서 일자리를 처음으로 구한 것은 70년 전인 1953년 1월이다. 그 대장간은 2023년 지금 일하는 곳에서 불과 100m도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었다. 황곡철공소. 전쟁이 채 끝나지 않은 겨울,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15세 어린이가 대장간에서 일하겠다고 나섰다. 

4형제였는데, 부모님도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생활하던 때였다. 전쟁 통에 집에 폭격도 맞았다. 식구들이 밥 먹다가 맨몸으로 뛰쳐나와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폭삭 주저앉은 집에서 건질 거라곤 없었다. 시도(矢島)며 율도(栗島) 같은 가까운 섬으로 피란도 몇 차례나 떠났었다. 


그 어린 나이에 먹고 살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대장간에 갔다. 제물포역 앞에 있던 집에서 황곡철공소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제물포역에서 도원역까지, 전철로 한 정거장 거리였다. 송종화 장인 표현대로 초창기에는 월급이라고 할 것도 없이 세탁비 정도 받으면서 매일같이 걸어서 집과 대장간을 오갔다. 쉬는 날도 거의 없었다. 한 달에 두어 번 쉴 뿐이었다.

견메와 앞메, 북견메, 메질꾼 셋이서 '세메질'

<황곡철공소>는 당시 초가집이었다. 대장 주인은 40대 아저씨였다. 지금의 도원역 앞 고갯길이 예전에는 조그만 소로였는데 그 길을 황골고개라고 불렀다. 줄여서 황곡(黃谷)이라 하기도 했다. 주인 대장이 거기에서 황곡이란 이름을 따왔다.

송종화 장인은 대장간에 들어가자마자 풍구질부터 배웠다. 화로에 바람을 불어 넣어 쇠를 달구는 일이다. 그것만 2년 정도 했다. 그 뒤에는 해머질이라고 하는 메질만 4~5년을 했다. 송종화 장인은 말한다. 대장장이 기술을 제대로 익히기 위해서는 최소 5~6년은 필요하다고. 그것도 농땡이를 부리지 않고 열심히 하면서 손재주가 뒷받침되는 조건으로.
 

대장간 메질꾼의 위치도. ⓒ 고정미

 
황곡철공소의 직원은 4명이었다. 주인인 대장과 메질꾼 2명, 풍구질 1명. 바쁠 때는 메질꾼 3명이서 일하기도 했다. 대장간에서는 달궈진 쇠를 받쳐 놓고 두드리는 모루가 중심에 놓인다. 모루는 어디고 화로 가까이에 있게 마련인데, 모루에 쇠를 올려놓고 붙잡는 대장이 모루의 한쪽 면 가운데에 선다. 

메질꾼 3명을 기준으로 했을 때 대장의 맞은편 모루의 뾰족한 머리 쪽 메질꾼을 '견메', 대장과 마주보는 메질꾼을 '앞메', 그 앞메의 오른편 메질꾼을 '북견메'라고 불렀다고 송종화 장인은 얘기한다(그림 참조). 

메질꾼이 2명일 때는 대장 앞쪽에 견메와 앞메가 메질을 했다. 여기서 메는 해머라고 하는 커다란 망치를 말한다. 메질꾼 중에서 실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견메를 잡았다고 한다. 셋 중의 우두머리이자 대장 바로 아래 단계가 견메이다. 

메질을 이끄는 게 견메이다. 견메가 잘해야 메질 작업이 잘 이루어진다. 같은 해머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견메와 앞메는 머리 부분에 뚫은 자루 구멍의 위치가 다르다. 대장이 쇠를 잡아주고 견메와 앞메, 북견메, 이렇게 메질꾼 셋이서 메질을 하는 것을 '세메질'이라고 한다.

우리 대장간에서 웬 중국식 농기구냐고?

송종화 장인이 어려서 일하던 1950년대 중후반 황곡철공소에서는 농사일에 쓰는 도구들을 주로 만들었다. 바닷가나 섬 지역에는 곳곳에 작은 대장간들이 있었고, 공장이나 공사 현장도 변변치 않았으니 거기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 기회가 많지 않았다. 

쇠스랑이나 작두, 호미, 낫 같은 농구를 주로 만들었다. 쟁기질에 필수인 보습이나 나무를 찍어내는 데 쓰는 자귀, 목재를 다듬는 대팻날, 칼, 도끼, 망치, 엿가위 들을 만들기도 했다. 송종화 장인의 대한민국 첫째가는 엿가위 실력은 황곡철공소에서 어려서부터 익힌 기술이다.

농기구는 우리 것과 중국식을 따로 만들었다. 우리 대장간에서 웬 중국식 농기구냐고? 요즘 인천의 '화교(華僑)' 하면 대개는 차이나타운의 중국음식점을 떠올리겠지만 1950~60년대만 하더라도 인천에는 농사짓는 화교들이 많았다. 
 

인천광역시 중구 신포시장 안에 있는 화교 푸성귀 시장 기념 조형물. 가운데 서 있는 이가 화교이고, 왼편에 꼬마를 데리고 나온 조선인 아낙, 그리고 오른쪽이 일본 여인이다. 19세기에 세워진 화교들의 채소 시장을 재현하여 2005년에 조형물을 건립했다. 2023년 2월 3일, 이곳을 지나던 어린이가 조형물을 신기한 듯 바라보고 있다. ⓒ 정진오

 
박정희 대통령 시절, 1970년대 화교들의 경제 주권을 억압하는 정책이 시행되기 전까지 용현, 주안, 부평 등 인천의 밭농사 대다수는 화교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우리나라 화농(華農)의 역사도 제법 오래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화농들의 세가 만만치 않았는데 1912년에는 인천과 부천지역 화교 농부들이 모여 인천농업공의회(仁川農業公議會)라는 조직까지 설립할 정도였다. 

인천 중구 신포동과 내동에는 화교들이 생산한 채소만을 따로 파는 전문 시장까지 있었다. 이들 채소상과 채소재배 농민들의 모임도 별도로 있었는데 인천중화농업회(仁川中華農業會)라 했다. 화농들은 주로 산둥성 출신이 많았는데 중국식으로 농사를 지었다. 당연히 농기구들도 중국식이었다. 

화교가 운영하던 대장간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화농들은 호미나 쇠스랑 같은 자기네 농기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대장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황곡철공소 같은 인천의 대장간에서 중국식 농기구를 만들게 된 연유이다. 1970년대 중반 이후 화교들이 부동산을 소유할 수 없게 되면서 그들은 농사를 포기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대장간에서 중국식 농기구를 만드는 일도 사라졌다.

화교 사회, 1950년대 중후반 인천지역 주요 집단

화교 농민 사회의 부침은 화교소학교의 개교와 폐교로 이어진다. 인천의 화교 어린이들이 다니던 소학교는 1902년에 세워진 인천화교소학(仁川華僑小學)이 핵심이다. 인천화교소학은 중국 인천영사관이 1914년에 근대식 공립학교로 전환했다.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가 기획해 만든 『한반도화교사전』에 따르면 1957년의 인천화교소학 학생 수는 545명이었다. 2001년 초등부와 유치부를 합친 260명의 두 배가 넘었다. 

송종화 장인이 중국식 농기구들을 만들던 1950년대 중후반에는 화교 사회가 인천지역 주요 집단 중 하나였다. 이때 화교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조직이 인천화교자치구(仁川華僑自治區)였다. 인천항 개항 직후 형성된 중화회관(中華會館), 중화상회(中華商會) 등에서 출발한 단체다. 

1959년 발간된 『경기사전(京畿事典)』은 '인천의 공공기관' 항목에 공공기관 아홉 곳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 한 곳이 인천화교자치구였다. 『경기사전』에 등장하는 공공기관 아홉 곳은 대한적십자사경기지사, 인천상공회의소, 경기도어업조합연합회, 인천어업조합, 인천시축산협동조합, 경기지구범선조합, 인천중앙공설시장번영회, 인천시원예협동조합, 인천화교자치구 들이었다. 
 

2022년 12월 19일, 송종화 장인이 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 정진오


이는 당시 인천지역에서 화교의 입지가 그만큼 컸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래선지 인천화교소학에서는 여러 곳에 분교를 설치했다. 『한반도화교사전』에 따르면 해방 직후인 1946년에 인천화교소학주안분교가 세워졌으며 1976년까지 운영했다. 부평지역 화교 학생들을 위해 인천화교소학부평분교가 한국전쟁 때 설립되었다. 부평분교는 1986년 7월 문을 닫았다. 

인천화교소학용현분교도 있었는데 이 역시 한국전쟁 기간에 문을 열어 용현동 지역 화교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1987년 폐교했다. 소학교 분교가 있던 주안, 부평, 용현 지역은 모두 인천지역 화농들의 주요 거점이었다. 이렇듯 송종화 장인이 대장간 일을 시작한 황곡철공소의 오래된 기억은 인천지역 화교 사회의 옛이야기까지도 살필 수 있게 한다.

예전 대장간에서는 물건을 만들기 위한 원재료인 쇠를 구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지금은 흔하디흔한 자동차 판스프링 같은 게 당시에는 별로 많지 않았다. 여러가지 고철을 취급하는 고물상에서 조달했다. 철길을 까는 레일이 가장 좋은 재료였다. I자형으로 된 레일을 쪼개서 칼이나 도끼, 망치 같은 것들을 만들었다. 

그러면 이들 쇠를 달구는 석탄은 어디서 구했을까. 송종화 장인은 좀 색다른 얘기를 했다. 석탄을 보따리에 싸 들고 다니면서 파는 아주머니들이 있었다는 거였다. 석탄 보따리상 아줌마. 1960~70년대 부평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커피잔을 비롯한 다양한 미군 물품을 팔러 다녔다는 보따리상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석탄 보따리상 얘기는 처음이었다. 

'검정 강아지' 아이들과 '석탄 보따리상' 아줌마 

아줌마들은 이 석탄을 어디서 났을까. 오정희의 소설 <중국인 거리>에 답이 있다. <중국인 거리>는 1947년생 작가의 초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송종화 장인이 황곡철공소에서 일하던 바로 그 1950년대 후반의 이야기이다. 지금 인천역 부근과 차이나타운 일대가 주요 배경이다. 

화물열차가 인천항 근처 저탄장에 석탄을 부리기 위해 드나드는 모습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동네 아이들은 열차가 멈춰 서면 재빨리 바퀴 사이로 들어가 철길에 떨어진 석탄가루를 훑어내기도 하고, 화물칸의 벌어진 문짝 사이로 팔을 집어넣어 조개탄을 끄집어내기도 했다. 

아이들은 이런 식으로 작업 인부들 모르게 신발주머니나 시멘트 부대 같은 데에 석탄을 담아 선창의 간이음식점에서 만두나 찐빵과 바꾸어 먹기도 하고, 군고구마나 사탕, 딱지와 맞바꾸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 석탄은 현금과 마찬가지였다. 아이들은 그 석탄을 챙기느라 얼굴과 팔다리는 물론이고 온몸이 온통 새까맣게 되었다. 
 

송종화 장인이 벽돌망치(일명 냉가망치)를 만들기 위해 모루 위에 불에 달군 쇳덩이를 올려놓고 망치질을 하고 있다. 2022년 10월 12일 인천 <인일철공소>. ⓒ 정진오

 

모습을 갖춘 벽돌망치. 저 망치 머리 가운데에 자루를 박을 구멍을 뚫는 작업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하나는 아직도 식지 않은 채 벌겋게 달아 있다. ⓒ 정진오


작가는 이 아이들이 얼마나 까맸는지 검정 강아지라고 표현했다. 학교에서는 이 동네 아이들이 등교하면 따로 불러내어 귀 뒤, 목덜미, 발가락, 손톱 밑까지 탄가루가 있는지를 확인했다. 동네 사람들은 사시사철 석탄가루에 시달렸다. 깨끗한 빨래를 밖에 널 수도 없었다. 이 동네를 괴롭히던 저탄장의 석탄이 대장간까지 흘러들었다. 

<중국인 거리>에는 아이들 얘기만 나오지만, 현실에선 어른들도 석탄 열차에서 아이들보다 더 많은 양을 빼내어 석탄이 필요한 대장간 등지에 팔았다. 일종의 밀거래였다. 아이들은 아마도 어른들이 하는 양을 보고서 배웠을 터. 미군부대에서 뜯지도 않은 새 물건들이 밖으로 나가는 루트가 있었듯이, 저탄장도 그런 연결 고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송종화 장인이 들려준 대장간과 석탄 보따리상 아줌마 얘기는 어려웠던 시절의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이 아닐 수 없다. 저탄장 주변에서나 가능했던 석탄의 현금화는 석탄가루에 사철 새까맣게 묻혀 살아야 하는 주민들에게 최소한의 보상이었다고 생각해 두자.

다시 인천행, 대장간을 찾은 송종화 장인

송종화 장인은 군에 입대하느라 그만둘 때까지 황곡철공소에서 일했다. 또래의 다른 이들보다 몇 년이나 늦게 입대했다. 하나 있던 형님이 군대에 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징집영장이 나왔다. 그런데 동생들이 어리다 보니 형제가 둘이나 군대에 갈 수 없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기피자 신세가 된 거였다. 

당시에는 송종화 장인과 같은 생계형 군 기피자가 무척이나 많았던지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군 기피자 자수 기간을 두기도 했다. 송종화 장인도 이 때를 이용해 별도의 처벌 없이 입대했다고 한다.

군 복무를 마치고 나서도 인천의 대장간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남들보다 늦은 서른에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대장간 일을 때려치운 적도 있다. 힘든 일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서울 사당 쪽으로 가서 발전소와 관련 있는 공업사를 한 적도 있고, 경기도 성남에서 부동산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그러나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송종화 장인이 2022년 10월 5일, 낙지잡이에 쓰는 삽을 만들기 위해 스테인리스 판을 재단하고 있다. ⓒ 정진오

 

모습을 갖춘 낙지잡이 삽날. ⓒ 정진오

 
다시 인천행이었고, 대장간이었다. 동구 만석동에 있던 대장간에 들어갔다. 배에서 쓰는 커다란 닻을 주로 만들었다. 당시 인천에는 조기를 잡으려는 전국의 배들이 몰려들 때다. 1970년대 초반까지 인천은 막바지 파시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으니 인천의 대장간들도 고기잡이에 필요한 선구(船具)가 주요 일감이었다. 

송종화 장인은 지금도 닻은 물론이고 배와 관련한 이런저런 물건을 만드는 데 거부감이 전혀 없다. 이때의 경험이 자산이 되었다. 인천역 뒤에 있던 부두가 지금의 연안부두로 이전하던 시절 그곳에서 대장간을 열었다. 배와 관련한 일감이 많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신통치가 않았다. 

송종화 장인은 연안부두를 떠나 다시 옛 도원동 대장간 거리로 돌아왔다. 지금의 <인일철공소> 건너편이었다. 그때는 경인전철 철로변으로 고물상과 철공소 등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경인전철 복복선 공사를 하게 되면서 다들 떠나야 했다. 많은 이들이 가까운 숭의동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숭의동 공구상가가 이때 형성되었다. 

1976년 송종화 장인은 숭의동으로 가지 않고 맞은편 선반(旋盤)을 하던 조그만 이층집을 사서 들어왔다. 인천에 여러 공장지대가 들어섰고 공장을 돌리기 위한 기계에는 각종 부품이 수시로 필요했다. 현대식 공장이 대장간의 새로운 고객이 되었다. 철물점에서 판매하는 제품들도 대장간에서 만들어 대던 때가 있었다. 

철물점이 대장간 생산품의 도매상 격이었던 거다. 대장간의 호경기라고 할 수 있던 시절이다. 1990년대 이후 철물점에는 값싼 중국산 제품들이 차지했고, 공장들은 인천을 떠났다. 이 자리에서만 그렇게 47년. 대장간 일을 배우려는 사람도 이제는 없다. 85세 혼자서 1인 4역을 소화해야 하는 송종화 장인의 인일철공소 망치 소리는 그래도 여전히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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