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7 14:14최종 업데이트 24.05.27 1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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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을 일으킨 윤석열 정부가 지금 추진하는 것이 독립유공자 공적 재평가다. 지난 4월 30일 강정애 국가보훈부 장관이 제4차 사회관계장관회의에서 이에 관한 추진 의사를 밝혔다.

독립유공자의 훈장 등급 등을 조정하겠다는 구상은 전임자인 박민식 장관 때부터 표명됐다. 그는 작년 7월 6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 등에서 '독립운동을 했는가 안 했는가' 혹은 '독립운동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보다는 '무슨 목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는가'를 심사 기준으로 삼겠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무슨 목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는가를 확인하려면 일차적으로 일제 경찰 자료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일제 경찰은 제국주의의 경제 착취를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소작쟁의나 노동쟁의에 참가한 독립운동가들을 그렇게 매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무슨 목적'으로 독립운동을 했는가를 규명하고자 일제 경찰 자료들을 참고하다 보면, 농업·노동 분야의 독립운동가들이 사회주의자로 규정돼 훈격이 낮춰질 가능성이 있다.
 

일제청산연구소 제12차 월례포럼에 줌으로 출연한 임정범 임도현항일비행사기념관장. ⓒ 일제청산연구소

 
이 같은 공적 재심사를 포함해 국가보훈부의 유공자 심사 자체가 과연 공정한지 염려하게 만드는 진술이 지난 26일 일제청산연구소 제12차 월례포럼에서 나왔다. 경기도 하남YMCA교회에서 개최된 이날 포럼의 두 번째 강사로 나선 임정범 임도현항일비행사기념관장은 지난 25년간 큰아버지 임도현(1909~1952)의 항일을 입증하고자 중국과 일본 등을 오가며 자료를 수집하고 보훈부와 대통령실 등에 호소하는 활동을 해왔다.

임도현은 일본 다치카와비행학교 재학 중인 1931년에 비행기를 훔쳐 타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 일로 중국에서 붙들려 강제송환된 뒤 징역 10월형을 받은 그는 그 뒤 중국으로 다시 넘어가 광시항공학교 등에 몸을 담았다. 이 점은 광시인민출판사가 발행한 <류저우 20세기 도록>에서 확인된다. 여기에는 중국 군복을 입은 임도현의 모습이 나온다.
 

<류저우 20세기 도록> 속의 임도현. ⓒ 임정범

 
국가보훈부의 심사 과정

1931년은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에 본격 시동을 건 해다. 이 때문에 항일투쟁이 격렬해진 1930년대의 중국 군사학교는 항일투쟁 거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국 독립군 사관학교인 신흥무관학교가 단순한 학교가 아니라 항일 거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시기에 중국 군사학교에 들어갔다면 항일투사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임도현 선생과 임정범 관장은 제주도 사람이다. 임도현의 원적지인 북제주군 조천면의 역사를 담은 <조천읍지>는 임도현의 행적을 "항일, 공출, 부역, 징용 일제 거부투쟁"으로 정리한다. 그의 출생 연도가 <조천읍지>에 1918년으로 적혀 있지만, 이는 1909년의 오기다. 일본 비행기를 훔쳐 망명한 뒤 징역 10월 형을 받고, 중국 군사학교에 몸을 담고, 제주에 돌아간 뒤 징용거부투쟁을 했다면 항일운동가로 볼 수밖에 없다.

예비역 육군 소령으로 고등학교에서 교련과 한문 등을 가르치다가 퇴직한 임정범 관장은 자료 수집을 위해 외국을 다녔을 뿐 아니라 강현욱 제주대 법의학교실 교수의 힘을 빌려 큰아버지의 시신을 부검하기도 했다.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왼쪽 눈썹 위쪽에 총알을 맞았다는 큰아버지의 자필 기록을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강현욱 교수는 "총창에 의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상태"라는 소견서를 썼다.

임정범 관장이 보훈부에 제출한 자료들이 제대로 된 심사를 받았고 그런 뒤에 불가 판정을 받았다면 그는 진작에 마음을 접었을 수도 있다. 심사가 공정치 못하다는 판단이 들었기에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임도현항일비행사기념관 실내에서 줌(Zoom)을 통해 포럼 강의를 한 그는 2019년경에 힘겹게 입수한 국가보훈부 내부 문건 하나를 공개했다. 제목이 '붙임: 임도현 선생 이력 비교표'인 이 문서는 보훈부가 심사 과정에서 어떤 자료를 채택하고 어떤 자료를 배제했는지를 보여준다. 이런 내부 심사 자료를 입수한 것은 당시 국회의원인 오영훈 현 제주도지사 측의 협조 덕분이다.
 

국가보훈부 문건인 ‘붙임: 임도현 선생 이력 비교표.’ ⓒ 임정범

 
이 문건은 보훈부가 검토한 세 가지 자료를 보여준다. 보훈부가 사실로 인정하는 내용을 담은 '관련 자료', 임도현 자신이 남긴 '자필 이력서', 임정범 관장의 진술을 의미하는 '신청인 주장'이 그것이다.

'신청인 주장' 최하단에 "비행기 도항 건이 탄로나 징역 10월"이라는 문구가 나온다. 이 사실은 1936년 5월 4일자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 판결문에서 확인된다. 임도현에게 징역 10월을 선고하는 이 판결문은 임도현이 다치가와비행학교 재학 중인 소화 6년(1931)에 "비행술 수업 중에" 대열을 이탈해 "상하이로 도항"했다고 기술한다. 그 뒤 일본영사관에 붙들려 제주로 송환된 것은 소화 9년인 1934년 12월이라고 이 판결문은 설명한다.

임도현을 파렴치범으로 몰아 처벌하려 했던 일제
 

임도현에 대한 제주지청 판결문. ⓒ 임정범 제공

  

임도현에 대한 제주지청 판결문. ⓒ 임정범 제공


일제 법원 판결문에 임도현이 일본 비행기를 훔쳐 망명한 사실이 기록돼 있고 이를 근거로 임정범 관장이 보훈부에 진술했지만, 보훈부 문건의 '관련 자료' 칸에는 이런 사실이 나오지 않는다. '관련 자료'는 임도현이 중국에 간 것과 1934년 12월에 강제 송환된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간 것과 그때가 1931년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는다.

'관련 자료'에는 1934년 3월 29일 선박을 타고 상하이에 도착했고 5월 1일 선박으로 송환됐다고 써 있다. 임도현이 한 달여 정도 배 타고 중국 갔다 온 것처럼 기술해놓은 것이다. 일제 검찰과 법원이 인정한 사실관계를 보훈부가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관련 자료'의 1931년 이후 부분에는 임도현이 금전을 요구했다는 문장이 많이 나온다. 총독부에 비행술 연습비를 요구하기도 하고 임씨에게 공갈을 하기도 하고 순사에게 돈을 요구하기도 했다고 적혀 있다.

이런 내용은 위 판결문에도 나온다. 강제송환된 이후의 임도현이 문중 모임에 나가 조상의 비석을 세우자며 금전 납부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이 보훈부 문건에 나오는 '공갈'의 실체다.

일제가 임도현을 중국에서 잡아온 것은 그가 비행기를 훔쳐 타고 달아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재판부는 그가 비행기를 훔쳐 중국으로 날아간 것은 인정하면서도, 엉뚱하게도 친척에 대한 공갈죄 등을 이유로 징역 10월을 선고하는 데 그쳤다. 이는 일제가 임도현의 비행기 절도 사실을 공론화하기를 원치 않았다는 점과 그를 파렴치범으로 몰아 처벌하려 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일본은 1931년에 일으킨 만주사변과 1937년에 일으킨 중일전쟁으로 인해 미국 등 서방세계의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과 협력했던 미국 등은 일본이 중국을 독점하려는 속내를 드러내자 등을 돌렸다.

이런 속에서 일본은 한국인들을 대륙 침략에 동원하고자 한일 두 민족의 일체성을 강조했다. 그런 일본이 한국 청년이 일본 비행기를 훔쳐 타고 중국으로 망명한 일을 널리 홍보하고 싶었겠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이 그를 잡아온 뒤 비행기 절도범이나 독립운동가 아닌 파렴치범으로 몰아 처벌한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국가보훈부는 판결문 일부인 공갈 부분은 인정하면서도 또 다른 일부인 비행기 절도 사실은 인정하지 않았다. 비행기 절도 부분은 '신청인 주장'으로 분류했다. 일제 검찰과 법원이 인정한 사실을 그렇게 취급한 것이다. 

국가보훈부의 공정하고 엄정한 태도 절실
 

포럼의 첫 번째 강사로 나선 양진우 호주기독대학교 초빙교수. ⓒ 김종성

  
포럼의 첫 번째 강사로 나선 양진우 호주기독대학교 초빙교수(일제청산연구소장)는 야스쿠니신사에 위패가 안치된 246만 대다수는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전사자들이라면서 일본 정부가 야스쿠니 참배에 대한 국제적 비판을 무릅쓰고 이들을 추모하는 현실이 의미하는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들에 맞서 싸운 한국 독립운동가는 대략 300만으로 추정되고 그중 15만은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양진우 교수는 가해자인 일본이 246만 이상이나 추모하는 데 반해, 피해자인 한국이 고작 1만 8018명만 독립유공자로 지정한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양진우 교수는 일본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침략전쟁 참여자들을 추모해왔는지를 설명했다. 일본은 패전 4년 뒤인 1949년에 '유족원호에 관한 결의'와 '미망인 및 전몰자 유족의 복지에 관한 결의'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1963년에는 전사자의 배우자를 지원하는 '전몰자 등의 처에 대한 특별교부금지급법'을, 1965년에는 '전몰자 등 유족 특별 조위금 지급법'을, 1966년에는 부상자 등의 배우자를 지원하는 '전상병자 등 처에 대한 특별교부금지급법'을, 1967년에는 '전몰자 부모 등 특별급부금 지급법' 등을 제정했다. 국제사회가 일본의 전쟁범죄를 규탄하는 상황에서도 자국 유공자를 추모하는 일에 나름대로 열성을 보인 셈이다.

임도현에 대한 심사에서 나타난 것처럼 보훈부가 명확한 증거 자료마저 채택하지 않는다면,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한을 풀 길이 막막해진다. 이처럼 부실한 심사가 아무런 견제를 받지 않는다면, 소작쟁의나 노동쟁의 등에 참여한 독립유공자들이 윤석열 정권의 공적 재심사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독립유공자 심사에 대한 국가보훈부의 공정하고 엄정한 태도가 절실하다. 무엇보다 투명한 심사 과정이 보장될 필요가 있다.
 

일제청산연구소 제12차 월례포럼 포스터. ⓒ 일제청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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