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07 20:13최종 업데이트 24.06.07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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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오전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 브리핑실에서 열린 국정브리핑에 참석해 동해 석유·가스 매장과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3일 국정브리핑에서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결과가 나왔습니다"고 말해 산유국의 희망을 띄웠다. 뒤이어 미국 액트지오사의 비토르 아브레우 대표가 입국해 7일 기자회견에서 "상당한 매장량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언해 윤 대통령의 발언에 힘을 실어줬다. 

1976년 1월 15일 연두기자회견 때 박정희 대통령도 윤 대통령과 비슷한 보고를 했다. 그는 "작년 12월 초 우리나라 영일만 부근에서 처음으로 석유가 나온 것은 사실"이라고 말해 국민들을 흥분시켰다. 차이점이 있다면 윤 대통령처럼 '막대한' 같은 표현은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나온 양은 소량이나, 처음으로 지하 1천 5백m에서 석유가 발견된 것은 사실"이라며 다소 조심스레 접근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왜?

별 성과 없이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한국의 초창기 대륙붕 개발은 인류 역사의 새로운 변화와 맞닿는 사안이었다. 자원을 향한 인류의 경쟁 무대가 육지에서 해저로 옮아가는 현상을 반영했다.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을 식민지배의 나락으로 몰아넣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은 이 지역의 육상 자원을 놓고 전개됐다. 제국주의는 아시아·아프리카의 육상을 자신들을 위한 원료 공급지로 변화시켰다. 

그런 경쟁은 식민지의 저항을 초래하는 것은 물론이고 제국주의 상호간의 두 차례 세계대전까지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상당한 출혈이 발생하고 육상 자원의 착취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자, 인류의 시선은 육상에서 해저로 옮겨갔다. 제2차 대전 종식 직후의 '트루먼 선언'이 이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1947년 3월 12일의 '트루먼 독트린' 발표로 동·서 냉전의 경계를 만들어낼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1945년 9월 28에는 육상과 해저의 경계를 허무는 트루먼 선언을 발표했다. '대륙붕의 지하 및 해저의 천연자원에 관한 미합중국의 정책(대통령 선언 2667)'으로 명명된 이 선언은 미국 연안에 인접한 수심 183미터까지의 대륙붕 자원에 대한 미국의 관할권을 천명했다. 

신흥 최강국에서 나온 이 선언은 곧바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선언 직후인 1945년 10월 25일 멕시코가 동일 선언을 하고, 이로부터 9년 내에 파나마·아르헨티나·칠레·페루·과테말라·코스타리카·필리핀·온두라스·엘살바도르·니카라과·에콰도르·브라질·파키스탄·호주·인도와 더불어 한국 등이 뒤를 이었다. 이 흐름은 1958년 4월 29일 제1차 국제연합 해양법회의에서 대륙붕조약이 채택되고 1964년 6월 10일 조약이 발효되는 결과로 연결됐다. 

위에서 언급됐듯이, 한국도 이 흐름에 가세했다. 한국전쟁 중인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이 선언한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은 독도 동쪽에 한·일 경계선을 긋는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동해 대륙붕에 대한 권리를 선언하는 기능도 함께 했다. 이 선언은 "한반도 및 도서의 해안에 인접한 해양의 상하 및 내(內)에 존재하는 모든 자연자원 및 재부"에 대한 주권적 권리의 천명이었다. 

대륙붕 개발에 대한 관심이 한국 내에서 확산되는 가운데, 1959년에는 국립지질조사소에 의해 전남 해남군 우황리 일대에서 석유 탐사가 실시됐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석유 탐사다. 우황리에 대한 관심은 한동안 이어졌다. 1961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 '우리나라서도 석유 생산되나'에는 이 해에 진행된 석유 탐사 작업이 보도됐다. 

1961년 5·16 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일본과의 현안 해결에 의욕을 냈다. 그 현안에는 독도 영유권과 어업협정이 포함됐다. 이는 해양 자원에 대한 박 정권의 관심을 한층 자극하는 원인이 됐다. 

1964년부터는 이번에 윤 대통령이 거론한 포항 인근에 대한 탐사가 시작돼 1977년까지 이어졌다. 1970년 1월 1일에는 해저광물자원개발법이 제정되고 대륙붕 석유 탐사가 본격화됐다. 동년 5월 30일에는 해저광구를 일곱 개로 설정하는 이 법 시행령이 제정됐다. 

이 시행령은 서해에서부터 제주 남서쪽까지에 제1~제4광구를, 제주 남방에 제5광구를, 남해안 동부및 동해에 제6광구를 설정한 데 이어, 오키나와열도 코앞에 제7광구를 설정했다. 이는 중동 산유국을 동경하는 이 나라에서 '우리도 산유국이 될 수 있다'는 기대감을 퍼트렸다. 

일본의 이해관계도 함께 걸린 제7광구 설정은 한국의 석유·가스 개발에 일본도 관련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1974년 1월 30일 한일대륙붕협정이 체결되고 4년 뒤 6월 22일 발효된 것은 이 때문이다.

윤 대통령이 국정브리핑 때 "최소 5개의 시추공을 뚫어야 하는데, 1개당 천억 원이 넘는 비용이 들어갑니다"라고 말한 뒤에 액트지오의 아브레우 대표가 곧바로 입국했다. 이런 이들이 자주 드나들다 보면, 석유나 가스가 나오든 않든 천문학적 자금이 해외로 새어나갈 수밖에 없다. 

막대한 자금 쏟아붓고도 '무진전'
 

1976년 1월 15일 자 <동아일보> 1면 '영일부근서 석유발견 이달부터 본격시추탐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박정희 시절에도 외국 기업들이 한국 대륙붕에 뛰어들었다. 1976년 5월 21일자 <경향신문> '대륙붕 개발 에워싼 신기류'는 "7개 광구 가운데서 1·5광구는 미국계 텍사코, 2·4광구는 걸프, 그리고 3·6광구는 영·란계인 셸, 7광구는 한국과 미국계 4개 사의 합작회사인 코암에게 조광권이 설정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런 뒤 "조광권 계약에 따라 그동안 국제 석유자본은 유전 가능 지역에 대한 정밀 탐사를 실시했고, 6개 공의 시추까지 한 바 있다"고 전했다. 외국 기업들의 면면과 6개 시추공이라는 표현은 박 정권이 쏟아부은 자금의 규모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렇게 대륙붕에 돈과 열정을 쏟아붓던 시절인 1976년 1월 15일에 박정희가 영일만 부근 석유에 대한 기대감을 띄웠다. 이는 곧바로 흐지부지됐다. 다음해 1월 15일자 <동아일보>에 '장 상공 포항석유 탐사 무진전'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장예준 상공부장관이 영일만에서 아무 진전이 없다고 밝혔다는 기사다. 석유가 나왔다면 '무진전''이 아닌 '무진장'이 제목에 들어갔을 수도 있다.  

박 정권은 집권 초반의 한일협정 강행으로 민심을 잃고 뒤이어 3선 개헌과 유신 개헌으로 민심과 더욱 멀어졌다. 이로 인한 정통성 부족을 의식해 외형적인 경제 성과에 급급하던 중에 영일만 석유 같은 해프닝도 튀어나왔다. 

영일만 석유를 발표할 당시, 박정희는 "그간 정부가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은 것은 확실한 것을 안 뒤 발표하려 했기 때문"이라며 "국민들이 흥분하는 심정은 충분히 알 수 있으나 지하에 있는 것이니 참고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이 발언은 영일만 석유의 존재가 확실한 것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얼마 안 가 흐지부지됐으니, 박정희 자신부터 확실하지 않은 것을 확실한 듯이 공표했다는 의미가 된다. 국민들의 기대감만 잔뜩 부풀려놓은 대륙붕 개발은 그렇게 시들해져갔다. 

물론 아무런 결실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륙붕 개발은 동해 가스 생산이라는 결과로는 이어졌다. 2005년에 <한국지구시스템공학회지> 제42권 제3호에 실린 류상수의 '국내 대륙붕 제6-1광구 동해-1 가스전 개발 연혁'은 "국내 대륙붕 석유부존 기능성이 제기된 지 40여 년 만인 1998년 7월, 양질의 가스가 국내 대륙붕 제6-1광구 고래V 구조에서 발견"됐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2004년 7월 11일 가스 생산을 개시하여 국내 대륙붕에서 생산된 가스가 울산·경남 지역에 공급되기 시작하였다"고 설명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왜?
 

경북 포항 영일만 일대에 최대 140억배럴 규모의 석유·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한 미국 액트지오(Act-Geo)의 비토르 아브레우(Vitor Abreu) 박사가 5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터미널을 통해 입국하고 있다. 석유공사는 아브레우 박사가 동해 심해 광구의 유망성 평가와 관련한 공사 측의 자문요청에 따라 방한하며 일정 중 기자회견을 열어 광구평가와 관련해 설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하지만 엄청난 국력을 쏟아붓고 국민적 기대감을 일으킨 것을 감안하면, 박 정권의 대륙붕 개발은 실패작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영일만 석유를 발표한 지 얼마 안 가 꼬리를 내린 것은 그 같은 실패가 성급하고 불충분한 준비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박정희의 영일만 석유 발언을 보도한 1976년 1월 16일자 <매일경제> 톱기사는 "석유의 부존 가능성에 대해 국가원수가 이를 확인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앞으로 4, 5개월 후 역사적인 전기가 도래할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했다. 

이때는 박정희가 집권한 지 15년 뒤였다. 대통령의 공식 발표가 어떤 의미를 띠는지를 박정희가 몰랐을 리 없는 시점이다. 이런 시점인데도 별 근거 없이 대국민 발표를 했다. 이 같은 가벼운 처신이 대륙붕 사업 실패의 한 가지 요인이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최근까지 한국 대륙붕의 석유 부존 가능성을 가장 집중적으로 연구한 기업은 호주 최대의 석유개발회사인 우드사이드다. 2007년부터 탐사에 착수한 우드사이드는 2023년에 가망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려 15년간이나 한국 대륙붕을 조사한 우드사이드가 한국에서 철수한 모습, 윤 대통령이 별다른 확신도 주지 못하면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를 운운하는 모습. 이 두 모습은 윤 정권의 대륙붕 개발이 박 정권의 재판이 될 가능성을 우려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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