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5.25 19:15최종 업데이트 24.05.25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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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이승만 ⓒ 국가기록원


이승만이 임시정부에서도 탄핵되고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쫓겨난 원인 중 하나는 사고방식과 직책의 부조화다. 군주제 사고방식을 가진 그가 민주공화국 임시 대통령과 대통령직에 앉은 것이 화근이다.

독립운동가 대부분은 일본으로부터 주권을 되찾는 것뿐 아니라 일본과 판이한 정치체제를 세우는 것까지 열망했다. 그들이 1919년 3·1운동 직후에 대한'제'국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한 것이 그 실례다. 그들은 군주국 일본과 전혀 다른 민주공화국을 꿈꿨다.


신채호나 박열 같은 이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까지 꿈꿨다. 신채호는 1923년 1월에 김원봉의 의열단을 위해 써준 '의열단 선언'에서 "인류로써 인류를 압박치 못하며 사회로써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라고 천명했다. 그 꿈을 위해 그들은 독립운동에 생을 걸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했다면서도 사고방식이 독특했다. 1954년에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으로 종신집권의 길을 터놓은 것은 그가 민주공화정보다는 군주제에나 어울리는 인물임을 여실히 드러냈다. 양녕대군 16대손인 그는 조선왕조가 아닌 대한민국에서 군주의 꿈을 펼쳤다.

일왕은 스스로를 신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인간의 나라에서 신을 자처하며 숭배를 받았다. 신이 아닌데도 신을 자처하는 모습은 일본 내에서는 진지하게 보일지 몰라도 제3자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게 비쳐졌다. 이승만도 다를 바 없었다. 민주공화정이 선포된 나라에서 그는 군주의 길을 걸었다. 그런 이승만이 지지자들의 숭배를 받는 모습 역시 진지해 보이면서도 우스꽝스러웠다.

진지해 보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일왕 숭배와 이승만 숭배에 둘 다 참여한 세력이 한국 친일파들이다. 이들은 일왕에 대한 숭배에도 참여했고 이승만에 대한 숭배에도 참여했다. 지도자를 신격화하는 방식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을 반영하는 인물 중 하나가 총리 서리와 대법관을 지낸 백한성(白漢成)이다.

1899년에 충남 대덕에서 출생한 백한성은 대전 삼성학교 및 경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고교급인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해방 뒤에 경성제국대학과 함께 서울대 법대로 흡수될 경성법전을 졸업한 1923년에는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서기 겸 통역생이 됐다. 그런 뒤인 1930년에 31세 나이로 사법관후보고시에 합격하고 3년 뒤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했다.

그런 다음, 청진지법, 광주지법 순천지청, 대전지법 강경지청에 배치된 백한성은 굵직한 시국사건 재판에 참여했다. 일례로,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근무하던 1934년 11월, 상해(上海)한인반제동맹과 상해한인청년동맹을 조직하고 격문을 살포하는 등 반일투쟁을 전개하다가 체포된 전복동·김봉규·김순진 등의 재판에, 같은 해 12월 비밀결사 의열단의 단원으로 평안남도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이화순·노석성 등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고 <친일인명사전> 제2권 백한성 편은 설명한다.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숭배
 

백한성 ⓒ SBS


백한성 같은 일제 판사들의 임무는 일왕의 지배를 사법적으로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위와 같은 시국사건 재판의 궁극적 목적은 일왕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탄압을 합리화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백한성이 담당한 사건 중에는 꽤 우스꽝스러운 것이 있었다. 이수용(李守用) 사건이 그 일례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제4-8권에 따르면, 이 건은 목포지청에 근무할 때인 1943년 2월 13일에 일본인 재판장과 함께 다룬 형사소송이다.

재판의 대상이 될 사건이 벌어진 날은 1942년 10월 19일이다. 이날 전남 보성군 득량면의 비도농사주식회사 합숙소에서 십수 명이 연회를 벌였다. 위 보고서에 인용된 판결문에 의하면, 연회 주최자인 득량면장은 술잔이 많이 돈 뒤에 "무슨 일을 해도 (내가) 보성군 내에서 가장 걸출한 면장"이라며 자화자찬을 늘어놓았다.

거나하게 취해 있던 득량역장 이수용은 그 귀에 거슬렸다. "어째서 자만하는가?"라며 "본 석상에는 2대 전의 득량면장으로서 현재 도회 의원인 사람도 참석"했다는 말로 면장의 기를 꺾으려 했다. 전전(前前) 면장님도 와 계시는데 왜 이리 거만하냐고 힐난한 것이다.

면장은 역장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반격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 반격이 역장의 귀에 그럴싸했다. 역장 이수용은 태세를 바꿔 대번에 수용하며 맞장구를 쳤다.

면장이 한 말은 "전 면장도 면장의 직을 사임하면 일개 면민에 지나지 않으니 면내에서는 내가 가장 위대하다"였다. 만취 상태인 이수용은 그 말이 일리가 있었다. 그는 "그것은 그럴 것이다"라고 맞장구를 치며 "천황도 이양하면 보통 분이 된다"는 말을 툭 던졌다. 면 단위 이야기에 일왕을 소환한 것이다.

당시 일본인들의 감각으로 보면 득량역장이 일왕 히로히토의 양위를 거론했다는 대목보다 일왕도 보통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대목이 더 큰 문제였다. 일본 군국주의는 일왕을 신으로 간주했다. 그런 신이 보통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대목이 문제였다. 불경죄에 저촉된 이수용은 백한성이 참여한 재판부로부터 징역 6개월과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일왕도 왕위에서 내려오면 보통 인간이 된다는 취중 발언을 근거로 유죄가 선고됐다. 일본군국주의자들이 볼 때는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제3자들이 볼 때는 우스꽝스러운 장면이다. 백한성은 1929년부터 일본 녹봉을 받았다. 판사가 된 1933년부터는 녹봉의 무게가 달라졌다. 그런 친일재산을 축적하면서, 이처럼 부조리한 판결로 히로히토 숭배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한성은 진지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숭배를 히로히토뿐 아니라 이승만에게도 바쳤다. 비슷한 숭배를 대상만 바꿔 이어갔던 것이다.

일왕 들어낸 자리에 이승만을
 

1954년 12월 1일 자 <조선일보> "정부, 개헌안을 공포"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백한성은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에 의거한 국회 반민특위의 친일파 체포가 시작된 뒤인 1949년 2월 22일 법무부 차관 자격으로 국회 본회의에 출석했다. 이날 그는 친일파들의 편에 서서 반민법 개정 필요성을 설명했다.

그 뒤 서울고등법원장에 이어 대법관에 임명된 그는 이승만의 3선 개헌을 1년 앞둔 1953년 9월 대법관에 어울리지 않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됐다. 이승만 한 사람에 한해 3선 금지의 족쇄를 풀어주는 사사오입 개헌 1년 전에 치안 책임자가 됐던 것이다.

1952년에 개정된 헌법의 제98조는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헌법을 개정하도록 규정했다. 재적의원이 203명이고 그중 3분의 2는 135.33이므로 136명 이상이 찬성해야 헌법이 개정될 수 있었다.

그런데 1954년 11월 27일 국회 투표에서 나온 찬성표는 135표였다. 당연히 부결이므로 개헌안 부결이 국회에서 선포됐다. 그런데 이틀 뒤 국무회의는 개헌안 통과를 의결하고 공포했다. 사사오입 논리를 적용해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라는 기괴한 논리가 동원된 결과였다. 이때 개헌안의 국무회의 통과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가 백한성이다. 1954년 12월 1일 자 <조선일보>는 이렇게 전했다.

"정부에서는 29일 하오 3시 15분 경무대 관저에서 임시국무회의를 열고 국회에서 이송되어온 헌법개정안을 즉일 공포키로 의결하는 동시, 이 대통령의 서명과 백 국무총리서리 이하 국무위원의 부서를 완료하여 다음과 같이 공포하였다."

203명의 3분의 2는 136명인데도 '203명의 3분의 2는 135명'이라는 비과학적 논리를 동원해 이승만의 장기집권 가도를 뚫어주는 현장에 백한성이 있었다. 백한성을 비롯한 정권 관계자들에게는 진지한 일이었겠지만, 이런 식의 이승만 숭배는 누가 봐도 우스꽝스러웠다.

일왕에게 부조리하고도 맹목적인 충성을 바친 백한성은 동일한 충성을 이승만에게도 바쳤다. 인간과 자연의 본성에 어긋나는 두 개의 전체주의 체제를 그런 식으로 숭배했다.

그가 별다른 심리적 마찰 없이 비슷한 행위를 반복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정권 사이의 유사성에도 기인한다. 조선총독부 정권과 이승만 정권은 인적 구성 면에서 연속성을 띠었다. 두 시기의 공권력을 실무적으로 움직인 주체는 친일파들이다. 앞의 정권이나 뒤의 정권이나 별 차이가 없었기에 백한성이 일왕을 들어낸 자리에 이승만을 놓는 게 수월했으리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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