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8 11:33최종 업데이트 24.03.18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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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산노동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 배성민


2022년 가을 영어를 가르치는 이주노동자들이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에 가입했다. 보통 한국에서 '이주노동자'라고 하면 건설, 제조업, 농업 등에 종사하는 동남아시아 노동자로 생각한다. 미국, 영국 등 제1세계 강사 노동자들 또한 한국에 취업비자를 받고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 분위기가 미국 사람에 대해 관대한 편이다. 당연히 노동조건도 다른 이주노동자보다 낫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의 근로계약서를 보고 처참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그들이 특권을 가진 계급이 아닌 노동자였기 때문에 열악한 노동조건은 다를 바 없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강제 연차휴가 문제였다.


A학원 대표는 영어 강사 노동자 근로계약서에 '회사에서 지정한 쉬는 날을 연차로 처리할 것'이라고 명시하고 연차휴가를 자유롭게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학원 데이'라는 명목으로 월 20일을 의무적으로 일하게 하고 나머지 평일은 휴가를 부여했다. 하지만 유급 휴가는 아니었다. 법정 공휴일을 제외하고 나머지 20일을 초과하는 평일에 대해 연차휴가를 강제로 쓰게 하였다.

근로기준법 제46조에 '사용자의 귀책 사유로 휴업을 하는 경우에는 그 근로자에게 평균임금의 100분의 70 이상의 수당을 지급하여야 한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용자는 노동자에게 휴업수당을 지급해야 했지만 오히려 연차휴가를 강제로 사용하게 했다.

2022년 11월 외국인 영어 강사 노동자들은 연차 유급휴가 지급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부산고용노동청 동부지청에 제출했고, 2023년 6월 인정받아 체불 임금을 지급받았다. 노동자 근로계약서에 개별 합의가 있더라도 '학원 데이'에 강제로 노동자의 연차를 사용하게 할 수 없다고 노동청에서 판단한 것이다.

2021년 대법원 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연차휴가를 국가공휴일과 명절 등으로 대체한 사용자에 대해 벌금 200만 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개별 노동자의 합의로는 연차휴가를 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근로자대표의 서면 합의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근로기준법 24조 3항에서는 근로자대표를 '사업 또는 사업장에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그 노동조합, 없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과반수를 대표하는 자'로 규정하고 있다. 근로기준법 제62조에 '사용자는 근로자대표와의 서면 합의에 따라 연차유급휴가일을 갈음하여 특정한 근로일에 근로자를 휴무시킬 수 있다'라고 되어 있다. 즉 노동자 과반 이상이 동의하여 근로자대표를 선출하면 사용자가 지정하는 휴일에 연차로 대체할 수 있다.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해
 

부산노동청 상생지도과에서 면담을 하고 있다. ⓒ 배성민


A학원은 연차유급휴가 체불임금을 지급한 직후 근로자대표를 뽑았다. 하지만 근로자대표 선출과 관련해 이주노동자에게만 공지하지 않았다. 이주노동자를 제외하고 한국 강사와 스태프의 서명을 통해 근로자대표를 선출했다. 근로자 대표가 선출되고도 이주노동자들은 누가 당선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A학원을 퇴사한 조합원이 강제 연차휴가에 대해 노동청에 임금체불 사건을 다시 제기했을 때 알게 되었다.

사용자는 이주노동자들에게 근로자대표 선출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았지만 노동청은 과반 이상의 노동자가 근로자대표를 선출했기 때문에 합법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조합원들은 두 번째 진정서를 취하할 수밖에 없었다.

2020년 10월 16일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근로자대표제도 개선에 관한 노사정 합의'에 따라 근로자대표 선출 과정의 민주성을 보강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하지만 근로자대표 선출 과정의 투명성이 보강되는 법 개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민주주의 사회의 모든 선거는 투명해야 한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 선거가 있으면 정부에서 선거권을 가진 국민에게 여러 차례 투표일과 후보를 알려준다. 만약 투표일과 후보를 일부 국민들에게만 공지한다면 선거는 무산될 것이다. 하지만 근로자대표 선거는 공개적으로 공지를 하지 않아도, 일부 노동자가 배제되어도 법령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다.

A학원의 사례처럼 선거 공고도 하지 않고 일부 노동자의 서면 동의로 근로자대표 선출이 가능하다. 사용자의 의견에 반대하지 않는 노동자 50%가 서면으로 동의하면 나머지 50%는 배제해도 합법이다. 법 개정이 시급한 상황이다.

지난 1월 31일 영어 강사 이주노동자들은 연차유급휴가 문제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고 노동청 관계자들을 면담했다. 노동청 관계자들 또한 근로자대표의 선출 과정에 대한 법 개정에 공감했고 개별 근로계약서에 연차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는 부분은 근로감독을 통해 시정하도록 약속했다. 

2023년 3월 직장갑질119라는 단체에서 직장인 1000명 대상으로 연차휴가 사용 휴무에 대해 물었다. 10명 중 8명은 연차휴가를 다 사용하지 못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연차 휴가를 쓰지 못하는 분위기는 한국 사회에서 인종을 떠나 모두 똑같다.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부산본부 영어 강사 이주노동자들은 지난 2월 18일 외국어교육지회 창립총회를 열고 외국어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외국어교육지회 노동자의 활동은 단순히 이주노동자 권리를 확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연차 휴가 문제와 같이 모든 노동자들의 권리를 확장하기 위한 보편적 투쟁이다.
덧붙이는 글 기자는 전국민주일반노동조합 사무국장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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