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의 한 장면.
넷플릭스
해석은 각자 다르겠지만, 박동호에게서 통쾌함보다 불안함이나 불편함이 더 크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의 명분을 위해 치른 희생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돌풍>은 박동호의 입을 빌려 끊임없이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것이 정의라는 것에도 동의가 쉽지 않다. 사모펀드 부정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자행한 암살, 불법 선거, 거짓과 기만, 매수와 협박, 거래와 조작의 무게는 그가 '부정의'로 규정한 것들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사실 박동호를 휘몰아치게 한 감정은 정의감보다는 친구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에 가깝다.
"나는 국민을 믿지 않는다"는 고백처럼, 자신 외에는 무엇도 정의로울 수 없다는 독선과 독단은 독재 권력의 초입을 훨씬 넘어선 것이다. 우리 역사의 독재 권력 중 박동호와 비슷한 명분을 내세우지 않았던 이들이 있었던가? 극 중 박동호는 "불의한 자들의 지배를 견딜 수 없는 나를 위해" 이런 일들을 벌였다고 고백하지만, 그 '불의한 자'에 자신이 포함될 수 있음은 끝내 인정하지 않는다.
내일의 민주주의를 위해 오늘의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사고가 미화될 수는 없다. 그런 점에서 적을 옭아매기 위해 스스로 죽음으로써 자신의 죄에 대한 어떤 법적 처벌도 받지 않은 박동호의 성대한 장례식에서 '민주주의여 만세'로 끝나는 '타는 목마름으로'가 울려 퍼진 것은 또 하나의 기만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신뢰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항상 옳은 결정을 내릴 수 있거나, 죄지은 자를 기가 막히게 선별해 처벌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역시 사람의 몫이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고 하자가 많은 현실의 민주주의는 박동호와 같은 독단적 신념이 파국으로 이끄는 것을 막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다. 진실이 아니라 더 큰 거짓말만이 거짓을 이긴다는 박동호의 믿음이 지금의 참혹한 현실을 반영한 것일 수는 있어도, 현실의 민주주의를 더 낫게 만들지는 못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따라 하지 마시라
박동호의 죽음 뒤, 그의 기대처럼 세상은 조금 더 깨끗해졌을까? 정수진과 강상운이 사라져도, 제2의 정수진과 강상운은 끊임없이 나타날 것이다. 박동호의 목표는 부패를 청산할 새로운 세상의 구조를 만드는 것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정수진과 강상운에 대한 응징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위선과 부패의 씨앗을 너무 많이 뿌려 놓았다.
거짓과 기만, 음모와 조작, 공작과 협박이 판을 치는 현실을 바꾸기보다 그것을 활용했던 박동호의 유산은, 스스로를 선이라 믿고, 상대를 악이라 믿는 적대적 정치 구조에서 끊임없이 살아남아 반복될 것이다. 권모술수가 정치 능력으로 칭송받고, 온갖 종류의 부정의를 스스로 만든 명분으로 정당화하는 행태가 '박동호의 유지'라는 이름으로 반복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박동호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의를 통쾌하게 실현한 의인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외려, 자신에 대한 지나친 확신과 독단으로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유린한 괴물로 해석해야 한다. 그것이 현실 정치에 조금이라도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같은 검사 출신으로 권력을 가진 누군가가 박동호를 보고 감정이입을 심하게 해 따라 할까 두렵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따라 하진 마시라.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