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15 10:36최종 업데이트 24.03.1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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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이 4일 국회 소통관에서 야권 비례대표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의 비례대표 후보 지원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거대 양당이 공천 논란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시점에, 국민후보 논란까지 불이 붙었다. 보수언론은 국민후보 여성 1, 2위로 선발된 후보에 대해 남북 교류 민간 단체의 회원이라거나 사드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전가의 보도인 종북 논란을 다시 꺼내 들었다.

더불어민주연합의 최대 주주인 더불어민주당의 비토로 여성 후보 1, 2순위가 모두 자진사퇴한 데 이어, 남성 2순위로 선출된 임태훈 전 군인권센터 소장의 후보 자격 박탈 문제까지 이어졌다. 독립기구인 심사위원회가 추천한 4인의 후보 중 3인이 사실상 민주당의 반대로 사퇴하거나 자격을 박탈당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합법화된 양심적 병역 거부가 병역 기피?

자진사퇴한 두 후보의 문제는 접어 두더라도, 임태훈 전 소장의 문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임태훈 전 소장은 2004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했고, 병역법 위반으로 1년 4개월을 복무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그를 양심수로 선정했고, 그는 출소 후 2009년 군인권센터를 설립해 군 인권 개선에 헌신했다.


헌법재판소가 2018년 6월, 대체복무제가 없는 병역법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양심적 병역거부 합법화의 길이 열렸다. 국회 역시 이에 호응해 2019년 12월 병역법을 개정했다. 이후 임 전 소장은 해병대, 국방부, 병무청, 법무부, 국가인권위원회 등 각종 정부 기관 위원회의 위원으로 일했고, 2018년에는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민주당의 정신적 기둥 중 하나이자,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고 김근태 의원을 기리는 김근태 재단에서는 불과 한 달 전인 2월 14일, '민주주의자 김근태상' 수상자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과 함께 군인권센터를 공동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당시 군인권센터의 수상 이유로는 "인권과 민주주의가 쉽게 무시되는 군 현실을 바로 잡고, 군의 특성과 인권의 보편성을 조화시키는 노력"을 들었다.

병역거부와 옥살이, 이후 이십 년간의 꾸준한 군 인권 개선 노력이 한 순간에 후보 자격을 박탈한 '병역 기피'로 퉁 쳐진 것이다.

후보 자격 박탈 논란의 세 가지 결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등 참석자들이 지난 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더불어민주연합 중앙당 창당대회에서 맞잡은 손을 들어올리고 있다. 왼쪽부터 윤희숙 진보당 대표, 이재명 대표, 더불어민주연합 윤영덕, 백승아 공동대표, 용혜인 새진보연합 상임대표. ⓒ 공동취재사진

 
임태훈 전 소장의 사퇴 여부와 무관하게 이번 사태가 불러올 파장은 쉽게 지나치기 어렵다.

첫째, 더불어민주연합은 더불어민주당과 진보당, 새진보연합 간 가치 중심의 선거연합으로, 국민의힘의 위성정당과는 다르다는 논리를 지속해서 펼쳐 왔다. 그러나 이번 후보 자격 박탈로 민주당의 입맛에 맞는 후보만 골라내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관철하면서, 사실상 더불어민주연합이 민주당의 위성정당임을 자인하는 결과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세 정당의 2월 21일 합의문 마지막 9항엔 모든 비례대표 후보자를 '국민 눈높이'에서 철저히 검증할 것을 명시해 놓고 있다. 그러나 국민후보의 공개오디션은 36명의 심사위원 이외에도 여론조사 기관에서 성별과 나이, 지역, 지지 정당을 고려해 무작위로 선발한 100명의 국민심사단의 숙의와 문자 투표로 진행된 것으로, 한 정당의 공천관리위원회보다 훨씬 더 국민 눈높이에 가깝다.

심사 기준이나 심사위원과 국민심사단 간의 배점, 문자 투표 비율 등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국민 숙의로 짜인 공개오디션에서 선발한 4인 중 3인의 후보가 민주당의 압박으로 사퇴, 또는 후보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것은 국민의 눈높이가 아니라 민주당의 입맛이 기준이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임 전 소장의 병역거부 사실은 공개오디션 심사 자료에 이미 다 공개된 내용이다.

둘째, 이번 결정은 야권 연대에도 대단히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미 위성정당과 변칙 선거 논란 속에 시민사회는 혼란과 논란에 빠져 있다. 윤석열 정부의 폭정에 저항하기 위한 가치 연합이나 정책연합이라는 항변은 민주당 주도의 이번 결정으로 크게 힘을 잃을 처지에 놓였다. 명분은 사라지고 실리 연합의 성격만 남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여러 논란과 비판을 감수하며 야권 연대를 추진한 연합정치시민회의를 비롯해 진보당과 새진보연합 등 비례정당 참여 세력의 입지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후보 자격 결정에 시민사회는 물론, 진보당과 새진보연합 역시 의미 있는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오히려 야권 연대를 주장한 이들은 이번 후보 자격 박탈 결정에 심한 모욕감과 굴욕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문제는 단지 후보 한 명의 자격 박탈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며, 총선만의 사안도 아니다. 차기 대선까지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셋째, 이번 사태는 적대 정치의 한계, 즉 특정 대상을 반대하기 위해 결집한 정치의 한계를 그대로 노출했다. 적대 정치는 내부의 차이를 극복하고 광범위한 세력을 모을 수는 있으나, 적대 해소 이후의 방향을 보장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적과 최대한의 연대를 기치로 하는 적대 정치는, 그래서 적대적 공간에서의 열망이 적대의 해소 후 절망으로 쉽게 전환된다.

이번 후보 자격 박탈 사태는 힘이 뒷받침되지 않은 연대의 당연한 결과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윤석열 정부의 폭정을 넘어선 세상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병역 기피로 치부하는 20년 전 사고방식이 여전히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굳이 왜 넘어서려 하는가? 정치공학적 표 계산만이 중요하게 간주하는 정치라면, 과연 지금보다 나을 것이란 보장이 어디 있는가?

쟁점다운 쟁점 없는 선거, 이대로 갈 것인가?
 

윤영덕 더불어민주연합 공동대표가 지난 14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비례대표 후보자 면접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싸우는 정치가 신물이 난다고 하지만, 사실 적대는 정치의 본질에 가깝다. 정치적인 것이란 누가 동지이고, 누가 적인지를 구분하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문제는 싸운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두고 싸우는가에 있다. 역대 어느 선거보다 비난과 혐오, 적대가 난무하고 있지만, 실상 우리 삶에 중요한 의제들은 쟁점으로 등장하지 않고 있다. 지엽적인 말실수와 트집 잡기, 파상적인 공세만이 정치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

우리의 미래를 희망하는 싸움이 아니라면, 파당적 실리와 협소한 이해관계 외에 무엇이 남는가? 그래서 제대로 된 심판의 정치는 대안을 품은 적대여야 한다. 이번 후보 자격 박탈 사건이 드러낸 야권 정치의 한계는 공학적 선거 승리를 위해 대안의 가능성을 제거할 수도 있다는 매우 위험한 발상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일단 국민후보 추천 심사위원회는 임태훈 후보를 더불어민주연합에 재추천했다. 기회는 남아 있다. 그것으로 잃어버린 신뢰가 회복될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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