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이후 ASML의 지역별 연간 매출액 변화. 반도체 갈등과 상관없이 중국향 수출은 매년 늘었습니다. 특히 2023년 매출은 크게 뛰었습니다.
이봉렬
1위는 언제나 그랬듯 80억 유로(11조 5617억 원)의 장비를 구매한 대만입니다. 2위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72억 유로(10조 4055억 원)의 중국입니다. 한국은 69억 유로(9조 9719억 원)로 3위, 미국은 우리의 절반도 안 되는 31억 유로(4조 4801억 원)로 4위, 요즘 우리 언론으로부터 반도체로 부활한다는 칭찬을 듣고 있는 일본은 우리의 10분의 1도 안 되는 6억 유로(8671억 원)로 5위입니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은 ASML에 늘 세 번째로 큰 고객이었습니다. 미·중 반도체 갈등과 상관없이 중국의 ASML 장비 구매액은 2020년 이후 매년 증가했습니다. 최신 노광장비인 EUV는 미국의 압력으로 사지 못하고 있지만, 그 전 세대인 DUV 장비는 생산되는 대로 매집을 했습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까지는 공급 물량이 충분하지 못해 중국이 달라는 대로 다 공급하지 못했지만 2023년에는 DUV 장비 생산이 늘어 중국으로의 수출이 크게 늘었다고 합니다. ASML은 중국 덕분에 장사를 제대로 잘했습니다. 2022년 대중국 수출액이 29억 유로(4조 1911억 원)였는데 2023년 72억 유로(10조 4055억 원)로 250%나 증가해 이제는 한국을 제치고 두 번째로 큰 고객이 되었습니다. 같은 기간 한국은 조금 느는 데 그쳤고, 대만은 오히려 조금 줄었습니다.
그럼, 미국이나 일본의 반도체 장비 기업들은 어떨까요? 미국의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인 AMAT의 최대 고객은 중국입니다. 한국이나 대만보다 중국에 더 많은 장비를 판매합니다. 2022년 대비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액은 거의 변함이 없습니다. 지난해 7월 떠들썩하게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제를 발표한 일본의 경우 대표적인 반도체 장비 기업인 TEL도 중국이 가장 큰 고객입니다.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 중에도 2022년 대비 판매가 6.9% 줄어드는 데 그쳤습니다.
대통령님은 미국, 일본, 네덜란드 등과 반도체 동맹을 맺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동맹이라는 건 그 반대편에 적국을 상정한 것이고, 대통령님은 틈나는 대로 그 적국이 중국이라고 밝히지 않았습니까? 반도체 전쟁 중에도 우리 반도체 동맹의 대표적인 반도체장비 업체들은 대중국 수출을 크게 늘리거나, 변함없거나, 줄어도 조금 줄었을 뿐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는 어떨까요? 우리나라는 앞서 소개한 동맹국 회사 규모의 반도체 장비 기업이 없으니, 반도체 장비 전체 수출액을 살펴보죠. 한국무역협회 중국무역통계를 보면 우리나라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은 전년 대비 23.9%가 줄어서 중국 내 시장점유율이 3.2%포인트나 줄었습니다. 반도체 동맹국 중 우리 기업의 타격이 가장 심각한 겁니다.
여기서 하나 더 눈여겨봐야 할 게 있습니다. 중국 세관의 통계에 따르면, 2023년 반도체 장비의 수입액은 전년 대비 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중국의 수입이 줄어 우리의 수출이 따라 줄어든 게 아니라 중국이 수입을 늘렸음에도 우리나라의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은 오히려 줄어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