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팹 위치. 특정 지역에 치우치지 않고 여러 나라에 팹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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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계 최대·최고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고 말하는 건, 역으로 생각하면 세계 어느 나라도 그런 식의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일부러 조성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하는 겁니다.
미국에 있는 팹리스 회사 엔비디아가 설계한 반도체를 지구 반대편 대만에 있는 TSMC가 제조하는 첨단 21세기에 국내 반도체 회사들 모두를 같은 지역에 모아 놓으면 뭔가 더 소통도 잘되지 않을까 하는 20세기적 생각을 하는 정부 관료들이 있다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수도권에 반도체 클러스터라는 이름으로 반도체 팹을 모아 놓으면 그 자체로 리스크 관리에 불리할 뿐 아니라 전력 공급에도 큰 어려움이 따릅니다. 산업부는 LNG 발전을 통해 초기 전력을 공급하고 이후 부족분은 동해안의 원자력 발전과 호남의 재생에너지를 송전설비를 이용해서 끌어오겠다고 밝혔습니다.
LNG나 원자력 발전이 RE100에 해당되지 않아서 그 전력을 받아서 반도체를 만들면 외국에 수출이 어렵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했으니 반복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수도권에 위치한 반도체 팹들이 사용할 그 많은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동해안 지역과 호남 전체가 송전탑으로 뒤덮이게 될 것입니다. 이게 무슨 낭비입니까?
재생에너지가 있는 지방에 반도체 팹을 짓자
호남에 이미 재생에너지 발전 시설이 있고, 거기서 생산된 전력을 호남에서 다 소비하지 못해 남아돌고 있습니다. 전기가 있는 곳에 팹을 지으면 될 일입니다. 전력공급 문제뿐만 아니라 RE100까지 만족시킬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입니다.
수도권에서 먼 지방에 반도체 팹을 지으면 고급 인력이 가려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지방의 청년들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이유는 거기가 수도권이라서가 아니라 지방에는 일자리가 없고 수도권에만 일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모여들고, 그래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그래서 집값이 오르고, 그래서 출산율이 떨어진다는 게 한국은행 보고서의 결론입니다.
반도체 팹이 있으면 거기에 고급 인력이 모입니다. 유럽 대륙에서 멀리 떨어진 인구 500만의 섬나라 아일랜드에 인텔의 팹이, 남태평양 보르네오섬에 XFAB의 팹이, 일본 최북단의 추운 섬 홋카이도에 라피더스의 팹이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이유입니다.
▲346만명의 일자리와 650조원의 생산 유발 효과. 이게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에서 발휘되면 왜 안되는 건지 묻고 싶습니다.
산업부
새로 만들어진다는 346만 명의 일자리는 믿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반도체 팹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의 정규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 10분의 1인 34만 명, 아니 100분의 1인 3만 4천 명이라고 해도 청년들이 큰 기대를 할 양질의 일자리가 맞습니다. 그런 양질의 일자리가 지방에 있다면 청년들이 굳이 고향을 떠나 복잡하고 경쟁 치열한 수도권으로 몰려갈 이유가 없습니다.
기업들이 수도권의 입지 좋은 곳에 공장을 가지겠다는 욕심은 이해가 됩니다. 그래서 정부의 역할이 필요한 겁니다. 수도권의 과도한 제조업 집중을 억제하기 위해 1994년부터 수도권정비계획법에 수도권 공장 총량제를 도입해 공장의 신·증설을 억제해 왔습니다. 그런데 반도체 클러스터에 예외를 허용한다면 수도권 집중과 난개발은 더욱더 심해질 것입니다. 대통령님 취임 이후 모든 게 거꾸로 가는 시절이긴 하지만 이건 거꾸로 가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는 초저출산입니다. 이에 대한 확실한 해법이 수도권 집중 완화와 함께 청년층에게 양질의 일자리와 저렴한 주거환경을 마련해 주는 거라는 게 한국은행의 분석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에겐 이미 반도체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수도권에 조성한다는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를 백지화하고 지방에 반도체 팹이 내려갈 수 있도록 다시 조율하세요. 그러면 "인구학에서 거의 불가능한 숫자"로 여겨졌던 0점대의 출산율을 1점대로 다시 끌어 올릴 수 있습니다. 그게 대통령님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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