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구역 배송 위해 뽑은 지도 10장
구교형
버거움과 지루함의 고비를 견뎌야
역시 복잡한 미로 같은 골목에서는 조금 헤맸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돌아온 것을 보고 회사 동료들이 칭찬을 해주었다. 하루하루 경험이 쌓이면서 며칠 만에 내 구역처럼 익숙해지니 계속 만나는 분에게는 인사도 나눌 만큼 여유가 생겼다. 이럴 때는 나 스스로 참 대견하게 느껴진다. 어느새 나도 택배에 관록이 붙은 것 같아 뿌듯하다.
말만 들으면 알아듣기 힘들겠지만, 사실 어디든 동네와 길의 특징만 알면 길 찾기와 배송은 크게 어렵지 않다. 더구나 실수도 약이 된다. 길 찾기가 어려워 헤매거나 틀리면 오히려 더 기억에 깊이 남아 나중에는 더 쉽게 길을 찾고 일을 익힐 수 있다. 정말 공부와 똑같다.
지역과 동네마다 도로명의 특징과 패턴을 익히고, 일방통행은 없는지 살피고, 어디쯤 주차할 것인지만 판단하면 어디든 무난히 배송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초보 때는 배송이 어려워 그만두고 싶지만, 오래 하면 너무 단조롭게 느껴져 그만두고 싶어진다. 그런 버거움과 지루함의 고비를 견뎌야 비로소 택배기사로 자리 잡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처음 입사하면 회사에서는 바로 자기 구역을 배정해 주지 않고 상당 기간 여기저기 돌린다. 가만 보니 몇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택배기사를 지원했지만 정말 해보겠다는 각오로 뛰어든 사람인지, 아니면 여차하면 그만둘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것이다. 여차하면 그만둘 사람에게 바로 담당구역을 줬다가 그만두면 회사는 물론 고객도 골탕 먹는 일이 간혹 생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적지 않다.
나는 점장의 부탁으로 처음 택배 일을 시작하는 분을 데리고 훈련 조교 같은 일을 몇 번 해봤다. 그럴 때면 나도 새로 일할 분과 함께 하면서 그가 어떤 각오로 오는지를 확인해 본다. 분명히 열심히 할 마음이라고 해서 굉장히 상세하게 택배 일과 해당 지역의 성격과 특징, 주의할 점 등을 설명해 주었다.
일을 마치고도 일부러 전체 구역을 한 번 더 돌아보며 다시 설명해 주고 전체 지역을 그림으로 그려주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다시 연락해도 좋다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저런 불만을 쏟아놓다가 갑자기 사라진다.
또한, 담당 지역을 바로 정하지 않는 이유는 여기저기 다녀보며 그에게 가장 알맞은 구역을 물색하는 의미도 있다. 불필요해 보이는 이 과정이 같은 대리점 택배기사로의 기본을 다지는 데도 참 좋다. 우리는 여러 곳을 다녀보며 꼭 자기 지역이 아니어도 다른 기사들의 배송지가 어디 있고 상황이 어떤지 제법 많이 안다. 그래서 대신 투입되어야 하는 특별한 경우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게 된다.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좁은 골목의 최강자 다마스
구교형
기본적으로 공유해야 할 것 외에는 택배기사마다 일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나처럼 경력이 오래되지 않은 기사는 물품을 받는 즉시 자기가 보기 편한 대로 굵은 매직으로 주소를 다시 쓴다. 그걸 보고 가는 곳마다 물건을 쉽게 찾아낸다. 그런데 주소를 다시 쓰지 않고 송장 주소만 보고 배송하는 기사들도 제법 많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 지하 분류장 불빛이 어두워 식별하기도 어렵고 분류만 잘해놓으면 배송지에서 찾아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서 굳이 주소를 다시 쓰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아직 그 정도의 자신은 없다.
주소를 다시 쓴다고 해도 쉬운 도로명 주소를 적는 게 일반적이지만 어떤 기사는 굳이 예전 번지 주소를 적기도 한다. 대개 그런 기사는 그 지역배송 경력이 길어 도로명 주소가 도입되기 전의 번지 주소로 길을 익혔기에 굳이 도로명을 다시 외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처럼 경력이 부족한 기사는 그저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배송 기사에 따라 보병형과 포병형이 있다. 예전 군대에서 행군이나 훈련이 있을 때 보병은 대부분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걷지만 포병은 '몇 보 이상은 승차'라며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배송 기사도 그와 비슷하다.
나는 매우 보병형이다. 자꾸 차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한적한 곳에 차를 세워놓고 한 골목을 다 돌만큼 많은 물건을 한 번에 내려 수레에 실어 배송하는 편이다. 차량에 오르내리고 적재함 문을 자주 여닫는 것보다 걷는 게 편하게 느껴져서다.
내가 일하는 곳의 점장은 대표적인 포병형이다. 그는 어차피 자기 배송지를 갖지 않고 때마다 필요한 곳에 지원사격을 나가기 때문에 경승합차인 다마스를 이용한다. 나도 그 차를 이용한 적이 있어 잘 알지만 다마스는 구로동처럼 좁은 옛날 골목이 많은 동네에 최적이다.
'저 정도는 어려울 텐데'라고 여길만한 좁은 골목도 다마스로 파고들어 몇 보 이상이면 무조건 차로 움직인다. 동승해 보면 다마스는 거의 그의 몸이 되어 함께 움직인다. 못 가는 곳이 없다. 베테랑의 관록이다.
모든 일이 그렇듯 택배 일도 내 일이라 생각하고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익숙해지고 자기에게 의미가 더해지는 것 같다. 오늘도 똑같은 그 일을 충실하게 반복하는 독자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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