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를 앞둔 19일 서울의 한 물류센터에서 작업자들이 택배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자료사진.
연합뉴스
택배 일을 하면서 여러 번의 명절을 맞았다. 2015년 목회하면서 처음 시작했던 택배 일을 마무리했던 때가 설 명절을 마친 얼마 후였다. 택배 기사끼리는 설과 추석 명절을 한 번씩 치르고 나면 배울 만큼 배운 거라는 우스갯소리를 나눈다. 그만큼 명절 물량을 받아내는 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명절 물량이라고 다 똑같지는 않다. 설에는 주로 고기류가 많이 오간다. 갈비 세트는 물론이고 사골과 우족 등 종류도 다양하다. 요즘에는 신선도를 생각해 백화점이나 마트 제품이 아니라 정육점을 통해 직접 보내는 고기도 많다. 올해 명절 앞두고 며칠 동안 고기 배달 지원을 나갔다. 서울 금천구 독산동 우시장에서 직접 주문받아 포장한 고기 상자를 대량으로 싣고 가는 것이다.
예전에 독산동 우시장을 지나가 본적은 많지만 들어가 본 것은 처음이었다. 큰 상가 1층이 전부 통째로 받은 소와 돼지를 해체하고 주문대로 포장해 택배로 보내는 것이다. 입구부터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핏물들이 여기저기 고여있었다. 가게마다 돌아다니며 포장이 끝난 고기 상자를 가져와 송장을 붙이고 차에 싣는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가까운 도매점에 가서는 10kg짜리 갈비 세트를 적재함에 실을 수 있는 데까지 옮겨 싣는다. 틈틈이 송장도 붙여야 해서 짧은 시간 동안 제법 힘들고 신경도 쓰인다. 40대 젊은 택배 기사와 둘이 함께 했는데, 50대 후반인 내가 한 번에 쉴 새 없이 들어 올리는 걸 보더니 놀라워했다. 물론 나도 놀랐다. 반년 전부터 근육운동을 제법 열심히 한 효과가 나오는 것 같아 마음이 흡족했다.
술과 떡도 빠지지 않는다. 명절 상품은 포장도 참 예쁘고 탐스럽게 잘도 만들었다. 정신없이 옮기면서 감탄스러울 때가 있다. 눈앞에 온갖 산해진미들이 오가는 것을 보며 가끔 하나라도 펼쳐 먹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다. 사은품들은 주로 선물 세트를 이용한다. 포장만 봐도 대번 알 수 있는 식용유와 참치, 햄, 김 세트들이 푸짐하다.
기억에 남는 사은품은 한 협동조합에서 명절 때마다 보내는 종합선물 세트다. 명절 10여 일 전부터 한 기사당 거의 매일 10~20개가 쏟아진다. 문제는 조합원들에게 일괄적으로 보내는 것이라 주소가 정확하지 않은 게 제법 많다는 것이다. 주택 주소만 있고 층이나 호수가 없어 다시 탐문을 해야 한다. 전화를 받으면 좋은데 끝내 받지 않으면 집 앞까지 며칠씩 갔다가도 결국 못 찾고 반송하게 될 때는 골탕 먹은 것처럼 얄밉다. 단체주문 상품을 보낼 때 제발 층과 호수까지 제대로 기재하여 주시기를 당부드린다.
추석은 단연 햇곡식과 과일들이다. 사실 쌀 같은 곡물 부대는 무게는 좀 나가도 어깨에 올려놓기 편하고 수레에 싣기도 어렵지 않아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없는 고층 다세대 주택에 여러 포씩 갖고 올라가야 하는 경우는 전혀 다르다. 어느 가을에 10포가 넘는 쌀을 5층에 배송한 적이 있는데 그럴 때는 정신력으로 버텨야만 한다. 아무튼 명절을 앞두고 오는 특별물량은 거의 유통기한이 짧고 신선식품일 경우가 많아 당일배송이 원칙이기에 하나라도 빠지지 않도록 신경을 더 써야 한다.
기사들에게는 명절 기간이 여러모로 신경 쓰인다. 우선, 2~3주 전부터 물량이 대폭 늘어난다. 기사들은 대개 평소에도 만차로 출발할 때가 많아서, 명절 물량이 늘어날 때는 어차피 한 번에 다 싣지 못해 그날 갈 것과 조금 나중에 갈 것을 날마다 나누게 된다. 고객들도 의례 그러려니 생각해서 잘 기다려 준다. 명절 연휴가 임박하면 물량이 줄기 때문에 남은 물량은 그때 몰아서 배송하면 된다. 이런 판단을 적절하게 할 수 있는 게 짬밥이고 관록이다.
행복한 명절 되시기를
고생스럽기는 해도 명절에는 택배기사들도 설렘이 있다. 명절 상여금 같은 건 없지만, 회사에서 여러 선물을 마련해 나눠준다. 대개는 종합선물 세트다. 빈손으로 집에 가지 않는다는 건 항상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다. 명절이 시작하는 편안함은 말할 수 없지만, 하루 이틀 지날수록 또 다른 긴장감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쉬는 날만큼 배송하지 못한 물량도 쌓여가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처럼 개천절까지 포함해 휴일이 늘어나면 명절 후유증이 배로 커진다. 그래서 어느 기사는 명절만 앞두면 늘 "난 명절이 없으면 좋겠어, 쉬어도 쉬는 게 아냐, 쉬는 게 더 힘들어"라고 넋두리한다. 그래도 나는 고생할 때 하더라도 항상 쉬는 날이 좋다.
우리 가족은 명절마다 재래시장에서 장을 보며 칼국수나 자장면 사 먹는 걸 연례행사처럼 즐겼다. 벌써 10년 가까운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부모님 고향은 경기도이고 처가는 서울이라 어려서부터 명절 귀성 고생을 해본 적이 거의 없다. 결혼 후 명절 기간에 가끔 친척이나 누나네를 다니러 갈 때도 경기도라 고속도로에서 잠시 어려움 겪는 정도였으니 먼 고향에 10시간 걸려 다녀왔다는 소리를 들으면 아무 말도 못 한다.
사실 우리 택배 터미널에서 가장 고생하는 분은 청소원인 것 같다. 우리 터미널은 1990년대에 지은 지상 3층, 지하 3층, 총 6개 층 물류 전용 건물이다. 끊임없이 온갖 물량이 오가고 처리되고 폐기되기에 공기는 항상 탁하고 온갖 쓰레기가 끊임없이 나온다. 아침에 택배 물품 정리를 마치면 찢어진 포장 상자, 깨진 병, 기사들이 먹고 버린 온갖 음식물 포장지 등이 이곳저곳 귀퉁이와 쓰레기통을 가득 채운다.
이 많은 뒤처리를 6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성과 조금 더 들어 보이는 남성 두 분, 그리고 아르바이트 몇 분이 다 담당한다. 특히 그 두 분에게 늘 가장 미안하고 안쓰럽다. 특히 '여사님'은 화장실 청소도 거의 도맡아 한다. 우리 터미널은 크고 넓은 규모의 건물인데도 화장실은 오직 지상에만 있다. 거의 모든 일을 지하에서 진행하는 기사들 입장에 화장실이 '겨우 그것밖에' 안되지만 여사님께 '그렇게나 많다.'
변기는 자주 막히고 화장실 내 어디에나 버리고 간 이런저런 쓰레기들이 넘쳐난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나 복도, 화장실 등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여사님은 항상 불만이 많다. '사람들이 제집이면 이렇게 하겠냐', '왜 이렇게 더럽게 쓰냐', '변기에 왜 이상한 물건 집어넣어 막히게 하냐'고.
그분에게 항상 미안해 만날 때마다 인사드리고, 불만에 추임새를 섞어가며 잘 들어드린다. 사실 우리 기사들도 항상 험한 일을 하며 고객의 자그마한 배려를 기대하면서도 막상 터미널에서는 또 다른 갑이 되어 함부로 버리고 늘어놓고 뒤처리하지 않아 두 분을 아주 힘들게 한다. 다시 한번 입장 바꿔 생각하는 게 우리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그뿐 아니다. 지하 2층 구석 공간에는 재활용 박스로 만든 큰 성(城) 한 채가 세워져 있다. 청소하는 두 분이 매일 나오는 박스를 정리하고 쌓아 놓은 성이다. 우리 기사들은 가끔 그 성에서 도움을 받는다. 받은 물품 중 찢어지고, 부서지고, 너무 크거나 너무 작아 맞지 않은 포장이 보일 때마다 그 박스 성에 가면 가장 알맞은 것을 찾을 수 있다. 다시 감사드릴 뿐이다. 두 분에게도 연휴만큼이라도 푹 쉬시고, 대접받고, 행복한 명절 되시기를 진심으로 빌어본다.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야고보서 5장 7~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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