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서점에 전시된 <프랑스 요리의 기술> 50주년 기념판, 1961년에 출간된 이 책은 아직도 사랑받는 미국인의 스테디셀러입니다.
류동협
가공한 음식에 넌덜머리가 난 미국인들에게 줄리아 차일드는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이전에도 텔레비전 요리사가 있었지만 차일드는 등장부터 남달랐습니다. 그녀가 처음 방송을 탄 건 요리 프로그램이 아니었고 저자를 초대해 대화를 나누는 서평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61년 출간한 <프랑스 요리의 기술>이 베스트셀러가 되자 보스턴 공영방송 WGBH는 프로그램 게스트로 저자인 줄리아 차일드를 초대했습니다. 차일드는 지루하게 책 이야기만 하고 싶지 않아 주방용품과 요리 재료를 가져가 카메라 앞에서 직접 오믈렛을 요리했습니다. 책으로 장식된 스튜디오는 순식간에 음식 냄새 가득한 부엌이 되었고 사회자와 맛있게 나눠 먹었습니다.
방송이 나가자 27통의 편지가 왔고 차일드의 요리 방송을 더 보고 싶다는 요청이 쇄도했습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바로 파일럿 프로그램 제작에 들어갔고 미국 전역으로 방송되면서 전설적인 요리사가 탄생했습니다.
차일드는 여느 요리사와 달리 독특했습니다. 188cm 큰 키를 가진 차일드가 중저음의 하이톤으로 스튜디오가 울리도록 말하면 그냥 지나치기 쉽지 않았습니다. 차일드는 차분하고 밋밋하게 요리하지 않았습니다. 감자와 닭고기를 팬 밖으로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도 모른다"는 농담을 던지며 극적인 요리쇼를 마무리했습니다.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차일드의 솔직한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누구나 실수하며 요리를 배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미국인에게 프랑스 요리는 고상하고 어려운 음식이었지만 차일드는 쉽게 다가갈 수 있게 도왔습니다.
가장 유명한 요리 선생님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차일드는 요리 만학도였습니다. 프랑스 요리학교 르 코르동 블루에서 정식으로 요리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37살이었고, <프렌치 셰프> 방송을 시작한 것은 50살이었습니다. 늦게 시작했지만 요리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진지했습니다.
차일드는 요리책이나 잡지에 실린 다른 레시피로 직접 만들어 보고 제대로 되지 않으면 항의하거나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시몬 베크, 루이제트 베르톨과 공저한 책 <프랑스 요리의 기술> 요리법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몇 번이나 다듬었습니다. 프랑스 음식 재료도 미국 슈퍼마켓에 구할 수 있는 걸로 바꿨습니다. 엄청난 노력을 거쳐 책이 나오기까지 무려 9년이나 걸렸습니다.
차일드는 요리 방송인으로 성공한 후에도 자신이 셰프가 아닌 평범한 가정 요리사로 불리는 걸 좋아했습니다. 물론 차일드의 짧은 경험과 성별을 이유로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1960년대 호텔이나 식당의 셰프는 거의 남성이 독차지하는 직업이었으나 변화의 물결은 미국 가정으로 몰려가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가정주부가 아닌 요리사
줄리아 차일드가 텔레비전에서 빛을 보던 시기에 미국 여성은 가정에만 머물지 않고 직업 전선에 뛰어듭니다. 1960년에 자녀를 둔 여성의 40%가 직업을 갖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들은 전문직보다는 비서, 공장, 서비스업 등 파트타임 업종에 종사했지만, 여성의 사회참여가 활발했던 건 사실입니다.
차일드의 방송이 시작된 1963년에 페미니스트 베티 프리단이 <여성의 신비>를 출간했습니다. 가정주부로 한정된 전통적 여성상을 재정의하면서 30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가 되어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프리단은 전쟁 중 남성을 대신해 사회활동을 하던 여성들이 다시 가정이란 '안전한 포로수용소'로 돌아와 자아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했습니다.
줄리아 차일드가 부엌을 가정의 중심으로 두었다면, 베티 프리단은 여성의 자아 찾기와 사회적 삶을 강조했습니다. 차일드는 페미니즘에 도움 되지 않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반페미니즘의 아이콘이었을까요? HBO 드라마 <줄리아>에서 프리단이 차일드를 만나 그녀의 쇼를 강하게 비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실제로 그런 대화가 있었는지 확인되지 않지만, 같은 학교 동문이었기 때문에 만났을 확률도 낮지 않습니다.
차일드는 시청자를 가정주부라고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여자나 남자를 구별하지 않고 누구나 요리의 즐거움을 배울 수 있다고 했고 요리가 하찮은 집안일이 아니라 즐거움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웠습니다. 차일드의 부엌에선 남자도 환영받았고 팬레터를 보낸 팬의 상당수는 남성이었습니다. 위스콘신주 루신에 사는 짐 킷차크는 "두 아이의 아버지인 저에게 근사한 음식을 준비하고 즐길 방법을 알려주셨다"고 기뻐했습니다.
차일드는 방송계에 진출해 사회 활동에 참여했습니다. 요리와 가정을 강조했지만 사회 활동의 중요성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주로 남성 요리사의 영역으로 여겨지던 직업에 샛별처럼 등장한 차일드는 많은 여성 요리사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음식과 요리사 문화를 주도

▲미 공영방송 WGBH에서 방송한 <프렌치 셰프>는 요리 방송의 장르를 개척하고 줄리아 차일드가 국민 요리사로 알려지게 된 프로그램입니다.
WGBH
고든 램지, 볼프강 퍽, 제이미 올리버 등 '스타 셰프' 문화를 가장 먼저 선보였던 사람이 줄리아 차일드였습니다. 1960년대 초반 텔레비전을 보유한 미국 가정이 이미 90%를 넘었습니다. 라디오가 가고 텔레비전이 주도권을 잡던 시기에 프로그램을 시작한 차일드의 영향력은 치솟았습니다. 스타 셰프가 되었지만 식품이나 주방용품 광고에는 관심이 없었고 진심으로 관심 있는 건 요리와 음식 문화였습니다.
차일드는 누구보다 음식을 사랑했고 요리의 즐거움을 알리는 데 열성적이었습니다. 1981년 캘리포니아 와인 생산자 로버트 몬다비와 함께 공동 설립한 미국와인음식재단은 비영리단체로 신진 요리사들을 후원하고 음식과 요리 문화를 신장하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초등학생들을 초대해 음식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알려주는 일이 이 단체의 주요 행사로 유명합니다.
1995년 차일드는 자신의 이름을 딴 자선재단을 만들어 요리사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올해는 9번째 수상자로 션 셔먼 셰프와 미니애폴리스에서 원주민 음식을 알리고 교육하는 단체에 5만 달러를 후원했습니다. 미국에 프랑스 음식을 알렸던 것처럼 다양한 음식 문화를 소개하고 교육하는 일이 평생 관심사였습니다.
차일드는 새로운 후배 요리사를 알리는 일에도 열심이었습니다. 그녀가 진행한 방송 <마스타 셰프들과 요리하기>에서 소개한 인물로 에머릴 라가시, 자끄 페펭, 알리스 워터스 등 유명 요리사가 있습니다. 차일드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후배 요리사의 요리와 더불어 이민자 문화, 미국 지방 음식을 배우는 교육의 장을 마련해줬습니다.
이 방송에 출연했던 셰프 제레마이어 타워는 "주방이나 부엌에서 요리하는 두려움을 떨쳐버리게 해준 것"을 차일드의 업적으로 꼽았습니다. 주방에서 일어나는 어떤 실수에도 주눅 들지 않았던 차일드의 정신은 많은 셰프와 미국인에게 용기를 줬습니다. 요리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좌절이나 실수도 여과 없이 보여줬던 차일드의 용기가 미국인들에게 감동을 안겨줬습니다.
차일드의 요리책을 읽고 차일드의 방송을 보고 요리에 도전하는 미국인이 아직도 생겨나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가공 음식의 무덤에서 요리의 즐거움을 가르친 스승으로, 실패를 이겨낸 용기 있는 인간으로, 남성 셰프 세계에 과감히 도전한 여성으로, 함께 즐기는 음식 문화를 알려준 만능 엔터테이너로, 줄리아 차일드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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