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06 16:00최종 업데이트 23.04.06 16:02
  • 본문듣기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가 그린 <대장간>. ⓒ 자료사진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白南準, 1932~2006)의 예술론은 간단명료하면서 해학적이다. 인생은 싱거운 것인데, 이 인생을 짭짤하고도 재미있게 만드는 게 예술이라고 백남준은 이야기했다. 심심하지 않게 간을 맞추면서 재미를 줄 수 있는 예술,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백남준의 얘기에 딱 맞는 예술 장르를 꼽으라면 비디오 아트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 전통의 풍속화를 앞에 두고 싶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 김득신(金得臣, 1754~1822), 신윤복(申潤福, 1758~?) 등 3대 풍속화가들이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로 일컬어지는 영·정조 때 예술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우리 그림도 이렇게 해학적일 수 있구나 하고 놀랄 만큼 그들의 그림은 재미있는 소재와 구성으로 지금까지도 보는 이들의 배꼽을 빼놓고 있다. 조선 말기, 그러니까 개항기에는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풍속화가 외국인 수집가들에게까지 인기가 높았다.


무심코 스쳐 지나기 쉬운 우리네 삶의 현장을 애정 어린 눈으로 깊이 들여다보고 거기에서 해학적 포인트를 잡아 예술로 승화시킨 풍속화. 이 풍속화가들의 눈을 통해 대장간 모습도 화폭에 담겼다. 김홍도, 김득신, 김준근 등의 대장간 그림 몇 점이 우리에게 아주 오래 전의 대장장이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김홍도의 작품 2점, 김득신의 1점, 그리고 김준근의 2점, 이렇게 5점의 대장간 그림을 놓고 옛 대장간과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대장장이와 대장간의 역사는 그야말로 유구한데 그 대장간을 시각 자료로 남긴 경우는 이렇듯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몇 안 되는 조선의 풍속화 속 대장간 작품이 특별히 소중한 이유이다.

조선화가, 김홍도·김득신·김준근의 '대장간'
 

조선시대 화가 김홍도가 그린 <대장간>. 메질꾼의 메질 모습에서 흥이 넘친다. 일꾼들 누구나 힘겨워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작품에 드러난다. ⓒ 자료사진

 
단원(檀園) 김홍도.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화가다. 특히 풍속화에 능했다. 그의 작품이 있었기에 18세기 후반 우리 사회의 면면을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서민들의 삶의 풍경이 동영상처럼 생생하다.

보물 제527호로 지정된 《단원풍속도첩》에 김홍도의 풍속화 25점이 실려 있다. 기와 이기, 주막, 빨래터, 자리 짜기, 벼 타작, 점심, 대장간, 논갈이, 서당, 무동(舞童), 점괘, 고누놀이, 씨름, 그림 감상, 길쌈, 담배 썰기, 편자 박기, 활쏘기, 우물가, 고기잡이, 장터길, 나룻배, 신행, 노중상봉, 행상 등이 작품의 주제다.

<대장간>에는 어른 키보다 높은 화로가 서 있고, 둥그런 모루가 놓여 있다. 대장간의 기본 작업 환경은 의외로 간단하다. 작품에는 5명이 등장하는데, 앉아서 집게를 들고 불에 달궈진 쇳덩이를 이리저리 뒤집는 대장이 화로 옆에 있고, 메질꾼 2명은 엇갈려 메질을 한다. 화로의 옆쪽이면서 대장의 뒤편에서는 어린 총각이 발을 굴러 풀무질을 한다. 그리고 지게를 벗어 놓은 젊은이가 숫돌에 낫을 갈고 있다.

대장간에서 일하는 4명은 모두 고깔처럼 보이는 흰색 모자를 쓰고 있다. 메질꾼 2명과 낫 가는 젊은이는 짚신을 신었는데, 대장은 짚신이 아니라 가죽신인 모양이다. 화면에 잡히지는 않았지만 풀무질하는 총각도 짚신일 게 뻔하다. 낫 가는 젊은이 옆에는 깨진 도자기가 놓여 있다. 숫돌에 끼얹을 물을 담는 용도다. 낫은 가느다란 모양새로 보아 굵은 나무를 쳐 내는 데 쓰기보다는 풀이나 벼를 베는 데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김홍도는 대장간 모습을 병풍 그림에도 그려 넣었다. 1778년에 여덟 폭짜리 <행려풍속도(行旅風俗圖)>를 그렸다. 그중에 <노변야로(路邊冶爐)>, 즉 길가의 대장간이 있다. 제목을 대장간으로 잡았으면서도 정작 화면의 중앙은 초가집 주막이 차지하고 있다. 주막 앞뜰에는 앉아서 밥을 먹는 젊은 과객이 있고 커다란 버드나무의 풍성한 가지는 주막의 지붕까지 가린다. 

과객에게 밥상을 내주고 방안에 들어앉은 아낙은 나그네의 밥 먹는 모습을 지켜본다. 나무 밑에는 2명의 어른이 쉬고 있고, 그 주막 마당의 귀퉁이를 대장간이 차지하고 있다. 키 낮은 화로와 모루를 가운데 두고 대장과 메질꾼 2명이 작업 중이다. 메질꾼들은 웃통을 벗어젖혔고 반바지 차림에 맨발이다. 풀무꾼은 발을 굴러 화로에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그 한쪽에서는 지게를 벗어 놓고 낫을 가는 동네 사람도 있다. 사람이 많이 찾는 사통팔달의 공간인 주막과 메질 소리가 요란한 대장간이 같은 터를 차지하고 있다. 주막이 주업이고 대장간은 부업이었을 것만 같다. 그러면, 주막집 여주인과 대장간 대장은 부부 사이일까. 그림을 보고 있자니 문뜩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이 병풍 그림마다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이 감상평을 남겼는데, <노변야로>에는 '무논에 해오라기가 날고 키 큰 버드나무에는 시원한 바람이 분다. 대장간에서는 쇠를 두드리고, 나그네는 밥을 사 먹는다. 시골 주막거리의 쓸쓸한 풍경이 한적한 맛을 느끼게 한다'고 적었다.

김홍도와 김득신의 <대장간> 닮은 점과 다른 점
 

조선시대 화가 김득신이 그린 <대장간>. 대장장이가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응시하고 있다. ⓒ 자료사진

 
긍재(兢齋) 김득신은 김홍도의 화풍을 가장 잘 이었다고 평가된다.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학미에서는 오히려 김홍도를 뛰어넘었다고 보는 전문가들도 있다. 원래 제목이 <야장단련(冶匠鍛鍊)>인 김득신의 <대장간>은 김홍도 <대장간>과 판박이이다. 위로 길쭉한 화로의 모양이며 모루의 위치 등 대장간 모습이 김홍도의 그것과 영락없이 닮았다. 누가 봐도 같은 대장간이다.

김득신은 김홍도 대장간에 없는 지붕이나 기둥 같은 배경을 추가했고, 김홍도가 그려 넣었던 낫 가는 젊은이는 뺐다. 다만 숫돌은 물통 옆에 그대로 두었다. 김득신 작품에서는 집게를 잡은 대장이 더 젊어졌다. 메질꾼 한 명은 웃통을 벗었고, 다른 한 명은 앞섶을 풀어헤쳤다.

김홍도 <대장간>과 김득신 <대장간>의 다른 점을 하나 더 꼽자면 대장의 시선이다. 김홍도 작품에서는 모두가 자기 일에 열중이다. 풀무꾼이며 메질꾼이며, 대장이며 모두가 붉은 쇳덩이가 올려진 모루 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김득신 작품에선 집게를 잡은 대장이 얼굴을 돌려 그림을 그리는 이를 쳐다보면서 입꼬리 한쪽을 살짝 올리며 웃고 있다. 마치 "이 장면 괜찮아?"라고 되묻는 듯하다. 섬뜩할 정도로 해학미가 물씬하다.

조선 최고 수준의 풍속화는 김홍도와 김득신의 붓끝에서 나왔건만 그 공을 온전히 풍속화가들에게만 돌려서는 안 된다. 조선의 풍속화 전성시대를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임금 정조(재위 1776~1800)였다. 그림에도 능했던 정조는 궁중 화원들을 특별히 관리했다. 그들에게 풍속화의 주제까지 따로 정해 줄 정도였으며, '모두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요구했다. 김홍도와 김득신의 손에서 익살 넘치는 작품이 쏟아진 근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기산 김준근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풍속을 해외에 널리 알린 화가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미스터리이다. 언제 어디서 태어나고 언제 세상을 떴는지 밝혀져 있지 않다.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살았는지도 제대로 드러나 있지 않다.

김준근은 부산, 원산, 제물포 등 개항장을 무대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곳에서 외국인들에게 풍속화를 그려 판매했다. 그의 작품은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다. 2003년에 번역 출판된 『箕山(기산) 한국의 옛 그림 : 풍경과 민속』이란 책에 따르면, 김준근의 그림을 소장한 외국의 기관은 미국의 스미소니언박물관, 독일의 함부르크민속박물관, 뮌헨민속박물관, 동베를린미술관, 오스트리아 비인민속박물관, 네덜란드의 라이덴국립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영국도서관, 덴마크 국립박물관,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 동양박물관, 프랑스 국립기메박물관 등으로 무척 다양하다.

김준근의 작품, 외국 박물관에 많은 까닭
 

조선시대 화가 김준근이 그린 <대장간>. ⓒ 자료사진

 
김준근의 작품이 미국과 유럽 각국의 박물관에 많이 가 있는 것은 당시 서구에서는 미지의 나라인 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의 민속자료를 경쟁적으로 수집했기 때문이다. 『箕山 한국의 옛 그림』에 실린 작품은 개항기 조선의 외교 고문 등을 지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1901))의 소장품이었다고 한다. 묄렌도르프는 1882년부터 1885년까지 조선의 외교와 통상 정책의 실권자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목인덕(穆麟德)이란 이름을 썼다.

『箕山 한국의 옛 그림』은 1946년 베를린 훔볼트대학 한국학과장을 역임한 독일의 대표적인 한국학 전문가 하인리히 F.J. 융커(Heinrich F.J. Junker) 교수가 썼으며 1958년 동독에서 출판되었다. 우리말로 번역된 이 책에는 김광언 전 인하대 교수의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의 풍속도 해제>란 글도 실려 있어 김준근의 작품 현황과 그의 그림 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이 책 표지 그림이 김준근의 <대장간>이다. 책에 수록한 작품 44점 속에는 들어있지 않은 그림이다. 이 <대장간>에는 등장인물이 6명이다. 집게를 잡은 대장과 메질꾼 2명, 풀무꾼 1명 등 4명의 대장간 일꾼이 있고, 낫을 가는 사람과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이가 한 명 더 있다. 여전히 풀무꾼은 서서 발을 굴러 화로에 바람을 넣는다.

이 작품 속 낫 가는 장면이 김홍도의 그것과는 좀 다르다. 낫을 숫돌에 가는데 두 자루다. 그런데 둘 다 손잡이가 빠져 있다. 그 빠진 자루는 바닥에 따로 그렸다. 구경하는 사람은 낫 가는 사람과 같은 복장이다. 갓이며 바지 색깔까지 똑같다. 어깨에 짊어진 바랑에 나무 자루 2개가 삐져나와 있다. 자루의 정체가 궁금하다. 여러 대장간 그림 중 집게를 쥔 대장이 망치질까지 하는 모습은 김준근의 바로 이 작품에서 보이는 장면이다.

김준근의 다른 <대장간> 그림을 보자. 이 그림은 문화재청이 숭례문 복구 과정에서 펴낸 <숭례문 대장간>이란 작은 책자에도 실었다. 이 책자에 김홍도, 김득신, 김준근의 대장간 그림을 소개하고, 1920년대 대장간 사진과 해방 직후 대장간 사진까지 더했다. 다섯 개의 장면으로 우리 대장간의 시대적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 실린 김준근의 <대장간>에서는 풀무가 손풀무로 바뀌어 있다. 그의 다른 <대장간> 작품에서는 발 풀무였는데 말이다. 김준근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발 풀무와 손풀무가 공존했다는 얘기다. 대장간에서 풀무가 변화했다는 것은 자동차의 구동 방식이 전기 배터리로 바뀐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대장간 풀무는 발 풀무에서 손풀무로, 그리고 요즘처럼 전기 모터 송풍기로 변화해 왔다.

김홍도, 김득신, 김준근 같은 풍속화가들의 화폭에 담긴 대장간 그림은 당시 대장간의 구조와 작업 도구, 인력 배치, 일꾼들의 복식까지도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연구 가치가 크다.

고야의 <대장간>에 등장하는 대장장이
 

서양 화가 고야가 그린 <대장간>. ⓒ 자료사진

 
대장장이가 그림이 되어 그 모습을 맨 처음 드러낸 것은 고구려 벽화에서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集安)의 오회분 4호묘에 대장장이 그림이 천연색으로 그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이 무덤이 6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그림은 무덤의 주인을 위한 대장장이 신을 묘사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대장장이가 둥그런 모루 위에 불에 단 쇳덩이를 올려놓고 앉은 채로 망치질하는 모습이다. 왼손에는 집게, 오른손에 망치를 든 것으로 보아 오른손잡이이다. 무덤 널방의 고임 벽에 그려져 있다. 검은색 모루 앞에는 나무도 심어 놓아 신비감을 준다. 

모루와 대장장이를 보호하듯 지붕처럼 둥그렇게 휘어 있다. 당시 대장장이는 사람들이 도구를 사용해 농사를 짓고, 짐승을 잡고 키우며, 전쟁을 벌이고, 건축물을 짓는 데 있어서 절대적인 존재였다. 신비로운 능력자였던 거다. 숭배의 대상이었음은 당연하다.

대장장이 신 바로 옆면에는 수레바퀴의 신을 그렸다. 16개의 바큇살이 있는 커다란 수레바퀴를 망치로 내려치는 장면이다. 바퀴가 장인의 얼굴 높이에 달할 정도로 크다. 역시 수레바퀴 앞에는 대장장이 그림과 마찬가지로 둥그렇게 휘어 있는 나무가 서 있다. 오회분 4호묘의 대장장이와 수레바퀴 장인은 많이 닮았다. 옷이며 신발이며 머리 모양까지도 비슷하다. 모델이 같은 사람일 수도 있겠고, 협업하는 관계일 수도 있겠거니 싶다.

서양에도 대장간 그림이 있다. 18~19세기 스페인 화단을 대표하는 고야(Francisco Goya, 1746~1828)의 <대장간>이 유명하다. 고야는 김홍도와 나이가 한 살 차이로 엇비슷하다. 둘 다 왕실에서 일한 궁정화가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공교롭게도 둘 다 대장간 풍경을 작품에 담았는데, 그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고야의 <대장간>에는 3명의 대장장이가 등장하고, 커다란 모루 위에 붉게 달궈진 철판을 올려놓고 있다. 얼굴만 조금 보이는 흰 머리의 어른이 대장으로 보인다. 해머를 든 사람은 1명뿐이다. 쇳덩이를 붙들고 있는 사람이 2명이다.

고야의 작품 속 대장간은 분위기가 어둡다. 해머를 들었든, 철판을 쥐고 있든, 일꾼들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표정이나 동작에서 흥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김홍도의 대장장이들은 몸짓이 가볍고 흥이 묻어난다. 메질에서 리듬감이 느껴지고 힘든 기색이라고는 없다. 

<대장간>을 비롯한 고야의 후반기 작품이 어두운 것은 그가 살았던 당시 시대 분위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나폴레옹 전쟁과 스페인 내부 혼란 등이 그의 작품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는 거다.

풍속화에 해학을 담아낸 김홍도나 김득신이 지금 우리 사회를 바라본다면, 그들의 화폭에는 어떤 장면이 담길까. 편의점에서 컵라면에 삼각김밥을 먹는 모습일까. 한밤중 골목골목을 돌면서 쓰레기를 처리하는 청소 노동자들일까. 입주민들에게 치이는 아파트 경비원의 처지일까. 농촌의 일터나 도시 공사판의 외국인 노동자들일까. 사람 대신 기계가 일하는 자동화 시스템일까. 그 속에 리듬감과 흥은 얼마나 묻어날까.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