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asted Coffee b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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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들은 국가가 독점하는 커피를 소비하기보다는 거래가 자유로운 커피 대용품을 찾기 시작했다. 말린 무화과, 보리, 밀, 옥수수 등이 등장했다. 가장 인기가 있었던 커피 대용품은 치커리였다. 훗날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 시절 프랑스에서도 유행했던 것이 바로 치커리 커피였다. 커피 역사에 대용 커피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문제는 국가가 커피 사업 독점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불법 커피 유통을 막는 데 쓴 지출이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대왕 칭호를 받은 절대군주였지만 이미 생활 음료로 자리를 잡게 된 커피의 소비를 막을 방법도, 커피를 통해 국가 재정을 풍족하게 할 유효한 방법도 찾지 못했다.
1786년 프리드리히 대왕의 사망과 함께 커피에 부과하였던 높은 세금은 낮춰졌고, 로스팅한 커피만 유통을 허용하는 법령도 철폐되었다. 이후 산업화의 진전에 따라 커피는 모든 시민들이 즐기는 음료로 발전했다. 공장에서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맥주나 음식을 대신할 수 있는 커피는 크게 환영을 받았다. 부인들이 모여서 잡담을 하며 커피를 마시는 카페클라츠(kaffee klatsch) 문화가 생겨나 독일 지역은 점차 커피 대량 소비국으로서의 이미지를 얻게 되었다.
같은 세기 후반에 커피에 깊이 빠졌던 음악가로 베토벤을 빼놓을 수 없다. 독일의 본과 오스트리아의 빈을 왕복하며 지냈던 베토벤은 정확히 60개의 커피콩을 갈아서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셨다고 한다. 로스팅한 커피 60개의 무게는 7g 정도 된다. 요즘의 커피 과학자들이나 바리스타들이 추천하는 커피 1잔 추출에 필요한 원두의 양보다는 조금 부족하지만 크게 차이는 없다.
제과점
18세기 이후 커피 무역을 독점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로 인한 커피 부족으로 힘들어하면서도 독일 사람들은 구입하기 쉬운 차를 마시지는 않았다. 치커리 커피를 마실지언정 차에 빠지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패배와 함께 대륙 봉쇄령이 해제되고 차의 나라 영국의 물품과 문화가 대륙으로 다시 흘러들어 왔지만 차 문화가 그것에 비례해 유럽 대륙에 퍼지지는 않았다.
19세기 중반 유럽 대륙으로 들어오는 커피 수입 양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던 곳이 함부르크 항이었다. 그러나 파리나 빈의 거리 모습과 달리 프로이센의 중심지였던 베를린에는 카페가 많지 않았다. 카페보다는 술집과 레스토랑이 많았다.
그렇다면 함부르크 항을 통해 수입된 그 많은 커피는 누가 소비를 하였을까? 바로 가정주부들이었다. 계속되는 전쟁,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공장들, 의무 교육 제도로 생겨나기 시작한 공립학교들에 남편과 아이들을 보낸 시민계급의 여성들은 집안일을 마치고 친구 집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며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혼란한 시대를 건너고 있었다.
이때 커피가 소비되는 새로운 장소로 등장한 것이 제과점이었다. 독일에서 빵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게 된 것에는 19세기에 시작된 커피와의 컬래버레이션(collaboration)이 있었다. 모든 곳을 남성에게 내어 준 독일 여성들이 지배하는 영역이 바로 빵이 있는 제과점이었던 것이다.
1896년 9월 우리나라 <독립신문>에 게재된 최초의 커피 광고가 독일계 상인 콜샤크에 의해 이루어졌고, 그의 영향을 받은 조선인 윤용주가 1899년 8월 <독립신문>에 제과점에서 파는 커피 광고를 게재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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