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기념관을 온전히 담기 위해훙커오공원(현 루쉰공원) 안쪽에는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존재한다. 이날 취재팀은 윤 의사의 의거지를 드론 촬영을 통해 정확하게 밝혀냈다.
김종훈
생각해보면 나는 현장에서 참 많이 울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울었던 곳은 윤봉길 의사 의거지였다. 루쉰공원 내 매헌 기념관에서 윤 의사 관련 영상을 본 나는 눈물을 흘린 게 아니라 쏟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렸다. 제대로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다. 죄송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한 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의 무지가 너무 미웠다. 무엇보다 이제야 방문했다는 것에 대해 미안했다. 이날 존경을 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눈물을 흘리는 일뿐이었다. 윤봉길 의사를 결코 잊지 않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임정투어는 내 삶의 태도를 바꾸게 했다. 역사에 무지했던 나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쉽게 얻은 현재가 아니기에 임정 요인에게 느낀 죄송함이 진심이라면 앞으로 삶을 잘 버터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에게 비할 바 안 되지만 현재에 충실하며 기억하고 존경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살아낼 것이다.
3. 정교진(프로그램 연출, 촬영감독)
20박 21일 간의 중국 현지 취재와 그 결과를 온전히 담아내는 6편의 로드다큐, 그리고 책 한 권. 다큐 마감은 8월 중하순. 본격적인 일정에 들어가기 전, 타이트한 마감시한과 출간 계획을 들었을 땐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한번 명확하게 8월 데드라인을 확인하고 나서야 농담이 아닌 사실임을 실감했다.
20박 21일, 상하이부터 충칭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흔적들을 방문하면서 그 과정을 영상으로 세세하게 기록해야 했다. 나와 회사동료 두 명, 그리고 청년 여행가 한 명, 성격도 제각각인 4인이 모여 총 6000km의 거리를 이동하면서 벌어질 이야기들은 촬영·연출자의 입장에서는 결코 즐겁지 않았다.
출발 전 회의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갔지만 사실 나의 역할에 대해 감이 서질 않았다. 상황을 기록하는 사람으로 가야 할지 개입하여 함께 떠나는 사람으로 가야 할지부터 모호했다. 4명의 로드다큐를 온전히 보여주려면 그만큼의 카메라를 운용할 인력이 필요한 데 우리가 가진 예산상 불가능했다. 결국 나는 틈틈이 상황을 기록하며 최소한의 장면 연출을 위한 개입만 했다. 여정을 이어가며 스스로 정한 규칙이다.
청년여행가 최한솔씨는 유일하게 중국어가 가능한 사람이다. 중국 일정에서 필요한 모든 통역을 도맡아했다. 김혜주 기자는 자기 몸집만한 가방을 앞뒤로 메고 나와 함께 임정의 흔적들을 담아내야 했다. 그날 찍은 영상을 백업하는 일도 쉽지 않았는데 그 작업은 새벽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종훈 기자는 행여나 임정요인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않을까 밤잠 설치며 수십 번 내용을 재검토했다. 나 역시 1인 다역을 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여정 중 누구 하나 아픈 사람이 생기면 안 된다고 서로에게 당부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몸에 먼저 이상이 왔다.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자싱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에 입원한 정교진 감독, 폭우가 내려치는 상황 속에서도 일정 때문에 촬영을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달이 났다.
김종훈
비오는 날 촬영으로 인해 무리했던 탓인지 몸이 으스스했다. 나를 찾아온 증상이 잠시 지나치는 소나기이길 기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는 심각해졌다. 어느새 가만히 서있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팀원들은 전체 여정을 위해 차라리 병원에 입원할 것을 권했고 결국 임정 프로젝트 시작 5일 만에 몸살감기로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창피하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려했다. 잊혀져가는 임정의 역사를 취재할 임무를 생각하니 마음 편히 누울 수도 없었다. 링거를 맞는 내내 수없이 내 몸이 정상으로 돌아오길 기도했다. 그러지 않아도 부족한 시간인데 아프다고 이렇게 누워서 시간을 보낼 수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몸이 불편하더라도 마음만은 편하기 위해 다음 날 일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진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러한 다짐에는 약산 김원봉 선생이 큰 역할을 했다. 그의 이야기는 되뇔 때마다 가슴을 후벼 팠다.
처음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밀정>, <암살>이라는 두 영화 속이었다. 그의 젊은 시절은 정말 화려했고 대단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과 그가 살아온 흔적들은 고요하고 슬펐다.
당시 현상금 60만 원이 걸렸던 백범 김구 선생보다 더 많은 현상금(100만 원)이 걸렸을 만큼 일제에 큰 위협을 줬던 인물이었음에도 해방 이후 자발적으로 월북했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서의 공을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충칭 김원봉 장군 집터광복군 부사령을 했던 김원봉 장군이 살았던 충칭 집터. 지금은 폐업 중인 옷가게만 남은 상황이다.
김종훈
더욱 슬픈 건 그가 살았던 중국 현지의 집은 기념 장소가 아니라 시장 한가운데 허름한 옷가게로 쓰이고 있었다. 그마저도 폐업을 앞두고 있었다. 목숨을 걸어가며 일제로부터 해방을 위해 반평생 독립운동에 온몸을 바쳤지만 해방 후 일제 고등계 형사 출신인 노덕술에게 갖은 수모를 당했다. 이후에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야만 했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선생에 대한 재평가가 더 이상 늦춰지면 안 된다.
로드다큐 제작에 들어가면서 바빠지기 시작했다. 6TB라는 엄청난 분량의 영상을 보기 좋게 '요리'하는 작업은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 지금껏 내가 한 작업 중 최장시간 분량의 작품이다. 최장시간 분량만큼 최고 난이도일 것이다. 내 가족을 포함한 모든 지인들에게 영상과 책을 통해 내가 보고 느꼈던 것들을 공유하고 싶다.
4. 최한솔 (임정투어 첫 번째 참가자, 통역)
지난 4월 초 남미여행을 즐기고 있을 때 우연히 인터넷에서 임정투어에 함께할 1인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봤다. 평소 역사 공부에 흥미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독립운동가 유관순 열사에 관심이 있었던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지원서를 작성했다. 수일 후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렇게 김종훈, 정교진, 김혜주 기자를 만났다. 우연히 지원하게 되었지만 진심을 다해 내 의지와 능력을 어필했고 좋은 결과로 이어져 세 사람과 20박 21일을 동행하게 된 것이다.
출발 전 팀원들과 네 번의 만남을 가졌다. 부족하지만 최대한 노력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공부하면서 임정투어를 계획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출발 전에는 역사 답사를 간다는 생각에, 내가 중요한 일을 한다는 생각에 마냥 설레기만 했다. 다만 중국어를 할 줄 모르는 다른 팀원들을 대신해 통역을 도맡아야 한다는 점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나의 역할은 또렷해졌다. 중국에서 약 일 년 반 동안 생활했던 경험이 유용했다.
▲기차 안에서20박 21일 동안 6000km가 넘는 길을 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간이 갈수록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는 게 온전히 느껴졌다.
김종훈
같은 아시아권이어도 중국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다른 나라니까~'라는 생각을 하고 바라보아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들이 많았다.
매 순간 충격 받은 팀원들에게 "중국은 이런 문화가 있어서 그래요"라고 설명했다. 팀원들은 내 설명을 듣고서야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특히 문이 없는 화장실을 경험하고, 중앙선을 넘나드는 택시기사들의 운전 행태에 놀라고, 정해진 출발 시간보다 먼저 출발해 버리는 기차에 당황했다.
그러나 힘들어만 할 순 없었다.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고생한 만큼 '임정요원들도 이렇게, 아니 이것보다 훨씬 더 힘든 생활을 하셨겠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답사지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관광지도 아닌 그곳에 갈 때마다 방치된 역사의 현장들에 마음이 무거웠다. 이렇게 내가 왔다 간다고 변화가 있을까, 이미 늦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더 늦으면 찾는 사람 없이 잊혀질 수밖에 없다. 움직여야 변화한다는 말을 믿는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작은 움직임들이 생기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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