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2 20:08최종 업데이트 24.01.23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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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7일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국민과 함께하는 민생토론회 - 네번째, 상생의 금융, 기회의 사다리 확대'에서 참석자들의 발언을 듣고 있다. ⓒ 대통령실


"재벌기업, 대기업이 아니더라도 상장 기업, 웬만한 기업이 가업을 승계하거나 할 때 (주가가) 올라가면 가업 승계가 불가능하다. 상속세가 과도한 할증 과세라고 하는 데 대해 국민적 공감대가 필요하다."

지난 17일 민생토론회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상속세 축소를 시사하며 한 말이다. 대통령실이 나서서 국민의 공감이 필요하다며 한발 물러서기는 했지만, 정부의 상속세 축소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이미 진행 중인 유산세의 유산취득세 개편이나 가업상속 제도의 확대는 그 흐름에 있는 일들이다. 


정부의 주장은 상속세가 지나치게 과도해서 기업 승계에 부담을 주고 기업 경쟁력을 저하시키므로 축소 및 개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사실일까?

높은 상속세가 기업 도산 야기?

우선 교묘하게 기업의 부담과 기업소유주의 부담을 섞어 말하는 것부터 교정할 필요가 있다. 기업은 상속세를 전혀 내지 않는다. 상속세를 내는 것은 기업을 '한 가문'이라는 이유로 물려받는 오너의 후계자들이다.

"등골 휘는 상속세", "기업 경제활동 부담" 같은 상속세를 비난하기 위한 구호들은 은근슬쩍 주어를 생략하거나 왜곡해 상속세가 마치 기업의 부담인 것처럼 착오를 유도한다.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상속세가 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속세를 내는 소유주의 대처에 따라 간접적인 형태를 띤다. 대표적으로 승계 여부에 따른 영향이다. 

재계와 경제지들은 과도한 상속세로 기업 승계가 어렵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상 승계 실패 사례는 극히 드물다. 재벌 회장의 사망에는 으레 "상속세 부담 때문에 경영권 위협"이라는 주장들이 따라붙으나, 그것이 현실화된 사례가 있었던가? 

재계가 주장하는 '세계 최고의 상속세율'도 부를 물려주려는 재벌들의 의지에 방해가 되지는 못한다. 12조 원의 상속세가 발생한 삼성도, 5조 원어치 주식을 상속세로 물납한 넥슨도 승계는 무탈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사망했을 때 2600-2700억 원의 상속세 때문에 경영권 방어가 어려울 수 있다며 자제들을 걱정하는 기사와 논평이 줄을 이었지만, 상속은 순탄하게 이뤄졌다. 조 회장의 퇴직금만 상속세의 사분의 일 정도인 650억 원에 달했다는 사실은 이들을 걱정하는 것이 얼마나 무익한 일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오히려 지난 3년간 진행되었던 형제간 경영권 분쟁이 그룹의 가치를 떨어뜨렸다면 떨어뜨렸다고 할 일이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이후 변화한 대한민국 30대 재벌의 면모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30대 그룹 중에서 대우·쌍용·동아 등 11개 그룹이 해체되었는데, 이 중 상속세 문제로 해체된 그룹은 하나도 없다. 모두 경제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거나 경영진의 잘못된 판단, 무리한 차입 등이 원인이 된 결과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체된 모든 그룹은 '오너 경영'을 했고, 살아남은 모든 그룹 역시 '오너 경영'을 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 대기업의 공로도 소유주의 몫이었고 과오도 오롯이 그들의 탓이었다. 확실한 것은 높은 상속세는 변수가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2020년 5월 6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서울 서초동 삼성사옥에서 경영권 승계 및 노동조합 문제 등과 관련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있다. 이번 대국민 사과는 앞서 지난 2월 출범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가 삼성 최고 경영진에게 최우선으로 요구되는 준법의제로 Δ경영권 승계 Δ노동 Δ시민사회 소통 등을 언급하고 이에 대한 개선방안을 강구해 이 부회장이 국민들 앞에서 발표하라고 권고한 데 따른 것이다. ⓒ 공동취재사진

 
'혈족경영' 보호 가치?

'오너들이 부담된다' 수준이 아니라, 대한민국 기업들이 실제로 상속세 때문에 휘청인다는 현황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통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수시로 인용되는 게 중소기업중앙회의 설문조사 결과다. 노령 기업주의 절대다수가 가족 승계를 선호하고, 높은 상속세가 승계에 걸림돌이 된다고 응답한다는 것이다. 

이 결과는 대한민국 중소기업 오너들의 상속세에 대한 반감 이외에 설명해 주는 것이 없다. 납세에 대한 저항감은 세금정책의 고려사항일 수는 있어도 감세 근거는 되지 못한다.

최저임금위원회가 매년 노동자들에게 설문조사로 적정 최저임금을 물은 결과 다수의 응답이 시간당 1만 원을 넘긴 지 수년이 되었지만 재계는 임금동결이나 삭감을 고수하고, 여전히 최저임금은 1만 원에 미달한다. 노동자들에 대한 설문조사는 임금인상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기업인들에 대한 설문조사는 감세의 근거가 되어야 한다는 데 수긍할 수 있는가?

객관적으로 대한민국 상속세가 기업승계를 어렵게 만든다는 주장부터 동의하기 어렵지만, 설령 인정한다 해도 전체 시장효율성을 저해한다고 볼 수도 없다. 가족경영이 전문경영인 체제보다 우위라는 학술적 합의나 실증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장단이 있고 시장의 특성에 따라 선택될 수 있는 것이지, 대한민국처럼 가족기업이 득세하는 체제를 유지해야 한다고 단언하는 주장은 전국경제인연합회 등 이해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상속 과정에서 단기주의적 사모펀드에 팔려나가는 기업도 드물게 있을 수 있고 기술사냥을 목적으로 한 기업 인수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능한 혁신기업으로 변모할 기회도 얻을 수 있는 것이고 무능한 혈족경영의 폐해를 청산하는 계기가 되는 경우도 없지 않다. 한 기업의 입장이 아니라 시장 전체의 혁신성을 고려할 때 한 가문이 천년만년 기업을 지배하며 부를 축적하는 체제가 바람직한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기업 소유주의 자식이 온전히 기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자연법적 논거는 없다. 그것은 오너의 욕망일 뿐이지 헌법적 권리는 아니다. 기업의 부를 직접적으로 일군 노동자와 경영진·주주는 말할 것도 없고, 인프라를 구축하고 시장 질서를 형성하고 교육과 기술 등 지원을 아끼지 않은 지자체와 정부와 국민들도 권한이 없지 않다.

그렇게 퇴적된 대부분의 성과를 핏줄의 이름으로 몽땅 사유화하는 것이 정당한 경제 질서인지는 자문해 봐야 할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의 역사가 이러한 봉건성을 청산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가 아니었던가? 

대한민국 상속세는 중과세?

재계나 경제지는 상속세를 이제 중산층도 내는 세금이라며 '상속세의 공포'가 다수 대중에게도 드리워졌음을 강조해 여론을 조성하려 한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2022 국세통계연보(2021 귀속자료)상 전체 피상속건수는 34만4184건인데 과세건수는 1만2749건이다. 전체의 3.7%만 내는 세금이라는 뜻이다. 어떤 기준으로도 자산 상위 3.7%를 중산층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현 과표가 유지된다면 차차 과세대상이 넓어지기는 하겠지만, 그나마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 상위 20~30%가 내는 세금이 되려면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국민의 96.3%는 세금 한 푼 내지 않고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준다는 현실이다. 

어쨌거나 대한민국은 그 상위 3.7%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1년 기준 과세된 신고상속재산은 26.6조 원에 결정세액은 4.9조 원으로 세율은 19%에 그친다. 2021년 법인세 실효세율이 18%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대한민국은 상속으로 획득한 소득에 사업소득과 엇비슷하게 과세하고 있는 셈이다. 

인당 100억 원가량을 상속받은 최상위 상속세 납부 1245건에도 실질 세율은 29% 수준에 머문다(신고상속재산 12.4조 원, 결정세액 3.6조 원). 상속세 최고세율 적용 대상건이 756건임을 감안하면 1245건 중 61%에 명목최고세율(할증 포함 60%)이 적용되고 나머지에도 최소한 40% 이상의 명목세율이 적용되었다는 뜻이지만 실제 세율은 반토막이 났다. 공제와 감면, 세무상 각종 조정의 위력이다. 

100억 원을 상속받는데 29억 원을 세금으로 낸다는 것이 받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면 억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핏줄을 이유로 발생한 71억 원이라는 '횡재'를 사회가 그대로 용납해 준다는 점에서는 이 얼마나 관대한 처사라 할 일인가.

이중과세 주장은 세율 낮추기 위한 명분일 뿐
 

11월 24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강남우체국에서 직원들이 각 가정으로 전달될 종합부동산세 고지서 분류작업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상속세가 이중과세라서 철폐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떨까. 기사 댓글에서부터 명망 있는 교수에 이르기까지 이중과세 논리를 종부세·양도세·상속세·증여세·법인세 등등 마음에 들지 않는 세금을 비난하는 '맥가이버 칼'마냥 선택적으로 활용한다. 그 자체가 이중과세 주장의 우스꽝스러운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중과세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 조건부터가 불명확하긴 하지만, 현행 과세제도 하에서 엄밀히 이중과세를 없애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돈을 벌면 소득세를 내고 번 돈으로 집을 사면 취득세를 내며, 그 집에서 차액이 발생하면 양도소득세를 내고, 남은 이익을 자식에게 증여하면 증여세가 발생하며, 번 돈으로 흡연까지 하면 담배소비세에 부가가치세, 지방교육세까지 한방에 삼중과세를 당한다.

여기서 얼마나 정리를 해야 중복과세가 없는 아름다운 과세제도가 될 것인가. 전근대적인 인두세로 모든 세금을 통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주장할 셈인가.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이중과세 주장은 과세 체계에 대한 문제의식이라기보다는 세율을 낮추기 위한 명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스웨덴처럼 상속세를 폐지하고 자본이익세 형태의 과세로 단일화할 수도 있다. 소득세 중과를 감내하고 높은 금융투자소득세를 인정할 수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한 상속세 축소·폐지론자들은 상속세 축소를 위해 스웨덴 사례를 말하면서도 금투세는 금투세대로 폐지하고 다른 세금도 모조리 깎으려 든다. 

이들에게 세율 50%의 단일과세 또는 각 세율 1%의 십중과세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택할까? 단 한 명도 전자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이중과세는 전혀 논점이 아니다. 사회의 필요나 특성에 따라 단일과세도 중복과세도 가능하다. 본질은 누가 얼마나 어떻게 부담하는가를 둘러싼 투쟁이다. 

2022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상위 20%의 자산은 하위 20%의 64배에 달한다. 이미 존재하는 격차도 거대하지만, 세대를 거듭할수록 상속과 증여를 통해 격차는 더욱 벌어질 것이다. 대한민국은 태어난 곳이 인생의 모든 가능성을 제약하고 결정하는 사회로 이행 중이다. 상속세 와해까지 시도하는 윤석열 정부는 대체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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