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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학자가 알려주는, 놀라운 식물의 세계

[서평] 신혜우의 '식물학자의 노트'를 읽고

등록 2021.05.25 10:05수정 2021.05.25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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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물학자의 노트

식물학자의 노트 ⓒ 김영사


화살나무 꽃을 보았다. 5월의 꽃이다. 화살나무 꽃은 이름이 풍기는 기세와는 다르게 일부러 찾아봐야 할 정도로 작았고, 연한 녹색을 띠고 있어 강렬하지도 않았다. 문득 '줄기와 가지에 뻣뻣한 날개를 지닌 화살나무에도 꽃이 있구나' 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다.
 
 화살나무 꽃

화살나무 꽃 ⓒ 박태신

 
사실 요즘 이전보다 내 주변의 식물들에게 관심을 더 갖고 있다. 그러다 화살나무 꽃도 처음 보게 된 것인데, 올 4월 말에 출간된 <식물학자의 노트>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다. 책 표지에 연한 느낌의 산수국 세밀화가 실려 있는데 이 그림을 나는 직접 눈으로 보았다. 4월 초 우연히 알게 돼 찾아간 식물 세밀화 전시회에서였다.

그때 세밀화를 그린 장본인이 식물학자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식물학자의 노트>의 저자 신혜우님의 풀어 쓴 직함은 '그림 그리는 식물학자, 식물을 그리는 화가'다. 책도 쓰고 그림도 그리는 분이니 이제부터는 신혜우 작가라고 칭하겠다.


식물학자가 천천히 보여주는 '신세계'
 
 『식물학자의 노트』 중. 왼쪽 그림은 변산바람꽃이다. 맨 위 흰색 꽃잎처럼 보이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식물학자의 노트』 중. 왼쪽 그림은 변산바람꽃이다. 맨 위 흰색 꽃잎처럼 보이는 것이 꽃잎이 아니라 꽃받침이라는 사실이 흥미롭다. ⓒ 박태신

 
전시회에선 그림이 주역이라면 <식물학자의 노트>는 작가의 글과 그림이 콤비를 이뤄 만들어진 또 하나의 아름다운 작품이다. 프롤로그를 포함해 32편의 글을 차근차근 읽었다. 신혜우 작가는 경어체로 세세하고 친절하게 식물들의 세상을 설명하고 있다. 전문용어가 나오면 밑에 풀이를 넣어 식물이라는 세상의 진면목을 하나씩 소개하고 있다.

식물은 늘 근처에 있지만, 이 책은 식물이라는 세계를 다시 보게 해주었다. 편견이 깨지는 수준이 아니라 그냥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이다. 아무리 쉽게 설명하고 싶어도 전문적 내용을 피할 수 없는데 작가는 그걸 적절히 섞어 이어놓았다.

"소나무 같이 잎이 바늘 같은 침엽수나 동백나무 같이 1년 내내 푸르른 상록수에서도 낙엽이 집니다… 낙엽활엽수와 달리 침엽수와 상록수는 1년 내내 조금씩 계속해서 잎을 떨어뜨립니다"(58쪽)라고 하고서, 잎이 분리되는 자리인 '탈리대'와 잎이 떨어진 곳의 흔적인 '엽흔'을 설명하는 식이다. 놀랍게도 이 글을 쓰던 날 오전 산책 중에 나는 이 봄날에 누렇게 물들어 떨어진 침엽수 낙엽을 보았다.

흥미로운 내용들이 부지기수다.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인 '부평초' 인생의 부평초가 개구리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한탄조가 들어가야 할 개구리밥의 삶을 작가는 독특하고 탄탄하다고 표현한다. 육상식물이 수생식물로 적응한 개구리밥이 무척이나 치밀하게 진화했기 때문이다.

"잎과 줄기로 분화하지 않고, 작고 간단한 형태로 (물 위에서) 부유하며 사는 개구리밥은 땅에 고정된 다른 식물과는 분명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했습니다"(74쪽)라고 덧붙이면서 독자에게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용기를 독려한다.


자신의 자리를 옮길 수 없어 외부환경에 좌지우지되곤 하는 식물은 그러나 이 책에서 그 어떤 호모 사피엔스보다 능동형의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다음과 같은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날이 추워지고 햇빛이 줄어드는 가을, 겨울 동안 나무들은 나뭇잎을 가지고 있을지, 떨어뜨릴지 선택합니다"(58쪽), "꽃가루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지만 (씨앗을 맺기 위한) 자신의 임무를 위해 견고하고 완벽하게 준비합니다"(47쪽), "(여러 식물들) 잎의 다양한 형태와 개수는 각 식물의 생존을 위해 맞춤옷처럼 재단된 것"(121쪽), "뿌리는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는 것, 식물의 생존에 유리한 선택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결정한다"(223쪽).


그러니까 그저 외부환경에 맞춰 진화한 것이라기보다 그걸 넘어 악조건을 극복하려고 미리 계획을 세우고 설계를 하는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게 식물 각 기관의 기능은 최적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능동형의 서술은 "식물 연구는 식물의 입장에서 그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를 이해하고 배우는 과정"(8쪽)의 결과물인 것이다. 또 "(식물은) 한 자리에 서 있지만 지구를 점령한 억센 몽상가들이니까요"(6쪽)라고도 한다. 그래서 내게 신혜우 작가는 '식물 대변인', '식물 변호사' 같다.
  
신혜우 작가의 산수국 그림 4월 전시회에서 찍었다. 독특하게도 원형 형태로 그림을 그렸다.

신혜우 작가의 산수국 그림 4월 전시회에서 찍었다. 독특하게도 원형 형태로 그림을 그렸다. ⓒ 박태신

 
그런데 이런 글들이 설득력 있게 느껴지는 것은 신혜우 작가의 세밀화가 뒷받침을 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변산바람꽃, 방가지똥, 참나무겨우살이, 녹나무, 생강나무 등 각 꼭지마다 글을 대표하는 식물의 그림이 전체 또는 부분으로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작가의 고백에 따르면 식물의 '초상화'다.

어려워서 궁금증을 갖고 살펴보아야 할 세잔의 정물화 같은 그림이 아니라 식물의 "진화, 생태, 형태를 보여"주는 초상화인 것이다. '식물학적 도해'이기도 하기에 명확해야 하고 그래서 작가의 그림엔 과학과 긴 시간이 들어 있다. 이 책의 표지 그림인 산수국의 원본 그림을 전시회에서 보았는데, 그 그림에는 뿌리, 잎, 줄기 등 원형 모습이 한가운데 있고 꽃눈과 꽃봉오리 상태를 비롯해 개화, 만개, 시듦 등 꽃의 일생을 나타낸 작은 그림들이 세세하게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데 1년 길게는 3년이 걸린다고 했다.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그런 작가에게 고집스런 결기도 보인다. 물론 나만의 추측인데, 한 권의 책을 오로지 자신의 작품으로만 수를 놓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이 책엔 다른 이의 참고 그림이나 표본, 사진을 전혀 넣지 않았다. 본문에 다른 식물학자의 작업과, 특정 식물, 식물 탐사 작업을 글로 설명하고 책 뒤에 참고문헌 소개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그림 완성에 오랜 수고가 필요하지만, 일관성을 유지하고 독자성을 발휘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찬찬히 읽다 보면 <식물학자의 노트>는 마치 장편의 식물 생존사(史) 같다. 거친 환경을 극복해내는 이야기가 무수히 나오기 때문이다. 한 번은 쭉, 한 번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다. 덕분에 식물의 세계와 좀 더 친근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이민 가려는 사람이 그 나라의 언어, 문화, 생활방식을 배워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전문가가 될 것은 아니니 그림이 '최종병기'인 전문가 덕으로 식물과 친해지고 식물을 사랑하면 될 것 같다. 바로 그 점이 작가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가는 이런 바람도 품는다. "<식물학자의 노트>를 통해 식물이 가지는 강한 생존력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라고.
덧붙이는 글 신혜우 작가의 4월 전시회 감상 글 : https://brunch.co.kr/@brunocloud/56

식물학자의 노트 - 식물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신혜우 (지은이),
김영사, 2021


#신혜우 #식물학자의 노트 #세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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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어 번역가이자, 산문 쓰기를 즐기는 자칭 낭만주의자입니다. ‘오마이뉴스’에 여행, 책 소개, 전시 평 등의 글을 썼습니다. 『보따니스트』 등 다섯 권의 번역서가 있고, 다음 ‘브런치’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https://brunch.co.kr/@brunoclo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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