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이런 설렁탕 집이 있었어?

[서평] 주영하의 <식탁 위의 한국사>

등록 2013.09.21 15:53수정 2013.09.21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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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겉그림 〈식탁 위의 한국사〉 ⓒ 휴머니스트

모름지기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던가? 가난했던 시절엔 그랬을 것이다. 보릿고개로 못 먹고 못 살던 시절엔 '진지드셨습니까?'가 인사말이었으니 말이다. 일한합방과 해방 뒤, 미국산 밀가루가 들어오면서부터는 더 이상 한국인은 밥심으로 살지 않는다. 밥만 먹고 살지 않고 자장면과 냉면과 그 밖에 햄버거로 산다.

음식인문학자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인 주영하의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그 면모를 하나하나 추적해 볼 수 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지난 100년간 한국인의 식탁에 오른 메뉴를 통해 한국의 음식문화사를 엿보도록 한다. 장국밥과 설렁탕에서부터 순대와 어묵과 김밥 그리고 자장면과 맥주와 치킨까지 음식 속에 깃든 문화사를 뽑아낸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쇠고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물론 누구나 손쉽게 맛볼 수 있는 고기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것을 다루는 사람을 '백정'이라 하여 함께 하길 꺼려했다. 그런데 그 당시의 백정들이 만들어 팔던 설렁탕 맛은 그 누구도 부인치 못할 일품이었단다. 그러니 암암리에 그 맛을 본 지체 놓은 사람들은 배달까지 시켜서 그걸 맛보았다고 한다.

문제는 해방 이후였단다. 그 무렵 미국에서 들어 온 분유가 설렁탕집을 뒤흔들었단다. 당시 설렁탕집들이 그 국물을 유백색으로 맞추기 위해 분말을 넣었다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었단다. 많은 음식점들이 설렁탕의 양을 불리기 위해 물을 타고 부족한 국물 맛은 화학조미료를 넣어 조리했단다. 그때도 양심이 어긋난 사람들이 많았던 걸까? 더 심각한 것은 군화제작용으로 수입한 쇠가죽 안쪽에 붙은 고기조각을 떼내어 설렁탕에 넣는 일도 일심았다는 데 있단다.

"주인 아주머니는 밤새도록 200명이면 200명, 300명이면 300명 정도 먹을 양의 설렁탕만 만들었지. 사람이 많이 온다고 해서, 혹은 물건이 없다고 해서, 그냥 물 붓고 미원(화학조미료) 넣고 끓이는 법이 절대 없어. 물건이 없으면 '떨어졌습니다. 다 팔았습니다' 하지, '기다리십시오' 해서 다시 어떻게 만들어서 주는 법이 없었어. 그래서 그때 '이 음식점 빼 놓고는 거의 다 우유를 집어넣었을 것이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어."(88쪽)

1970년대 안양역 주변에서 설렁탕집으로 이름난 음식점 한 곳을 두고서 하는 말이다. 그만큼 주영하 교수가 발로 뛰면서 그 역사를 뽑아낸 것인데, 그 당시의 다른 설렁탕집과는 정말로 다른 설렁탕집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정성으로 설렁탕집을 운영해서 그런지, 서울을 비롯해 수원이나 그 일대에서 그 설렁탕을 모르는 사람은 간첩일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서 먹었던 청진동 해장국에 관한 유래도 이 책에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본래 청진동 해장국은 '술국'이었다고 한다. 그때는 서울의 성 안으로 나무를 져다 팔던 나무꾼들을 상대로 대포 한 잔에 술국을 판매했다고 한다. 거기에서 유래된 게 청진동 해장국인데, 당시의 술국은 쇠뼈에 내장을 넣고 시금치와 콩나물을 곁들여 끓인 술안주였단다. 다만 1960년대 이후부터서 술국이 술안주 음식이 아니라 술을 마신 뒤 숙취를 푸는 음식으로 바뀌었단다.


"바지락칼국수가 음식점 메뉴가 된 데에는 1960년대 대부도에 있던 염전의 역할이 컸다. 지금은 염전이 다 문을 닫았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염전 사업이 활발했다. 바지락칼국수는 염전에서 일하던 염부들이 간편하게 한 끼를 해결하기 좋은 메뉴였다. 또한 1980년대 후반에 제부도 방조제 공사가 시작되면서 바지락칼국수는 건설 현장 인부들 사이에서도 인기 있는 메뉴가 되었다"(475쪽)

이른바 미국의 원조 밀가루가 국내에 들어오면서 유행한 바지락칼국수에 관한 이야기다. 그 전에는 대부도에서 밀농사를 짓지 않았고, 그 때문에 밀국수를 먹기조차 힘들었는데, 그 무렵에 들어 온 밀가루로 인해 바지락을 넣어 먹던 칼국수가 엄청난 인기를 끓었다는 것이다.

언론인 손석희씨와 브리지드 바르트 사이에 붙었던 개고기 논쟁. 그래서 손석희 씨가 대승을 거뒀던 보신탕 이야기. 이 책에서는 본래 보신탕 이름이 개장국이었음을 밝힌다. 물론 식민지 시절 일본인들이 개고기를 싫어해서 개장국과 보신탕이란 이름을 반씩 혼용해 썼는데, 이승만 정권부터 보신탕이란 말을 굳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1880년 강화도 조약 시절부터 1990년대의 도시구축 완성 단계까지, 모두 다섯 차례의 음식문화 분기점이 있음을 밝힌다. 그 단계마다 한반도 음식문화와 소비문화는 차츰차츰 변모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1988년에 치른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 음식은 점차 세계화되었다고 한다. 바꿔 말해 그때부터 한국음식이 대상화되고 타자화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식탁 위의 한국사 -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주영하 지음,
휴머니스트, 2013


#설렁탕 #청진동 해장국 #바지락칼국수 #보신탕 #한국인은 '밥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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