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두렁 밭두렁 널려 있는 시-39> 꿩

등록 2008.07.09 13:50수정 2008.07.0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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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둑에 텐트를 치고 잔잔한 수면 보며

인터넷 헌 책방에서 구입한 십여 년 전 베스트셀러를 읽고 있다가

나는 갑자기 시 한 편 쓰고 싶어졌다

막상 떠오르는 시상도 없는데 시가 쓰고 싶어지면 어쩌란 말이냐

 

책도 한 철이 있구나 생각하며 다시 책을 읽으려는데 ‘꿩꿩’ 꿩이 운다.

아까부터 ‘깍깍’ 까치가 여러 마리 소란을 피우고

저수지 저 편 숲속 뻐꾸기 애처롭게 울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목쉰 꿩의 탁한 소리에 수면에 파문 일듯 귀는 쫑긋 풀 섶으로 향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저 꿩 내 마음을 뒤흔들어 시 하나 쓰게 하려나보다

애처롭기는 너보다 저 뻐꾸기 더 애처롭고

구슬프기는 너보다 저 산비둘기 울음소리 더 구슬픈데

네게로 향하는 내 심사는 아무래도 너와 나의 오랜 애증의 기억 때문일 게다

 

내 식욕을 너는 자극하고 나는 원시의 본능으로 너를 추적하였지

네 자유를 구속하고 네 생존에 위협을 가해왔다

난폭한 살육자 되어 너의 뒤를 밟고 둥지를 밀탐하고

너의 어린 새끼들 잡아들이는 만행을 저질러왔다

 

그로부터 너는 바깥출입을 삼가고 풀 섶으로 몸을 숨겼던 게다

까치가 온 몸을 펼쳐 자유로이 민가와 들녘을 비상하는 날에도

산비둘기 떼를 지어 숲에서 숲으로 넘나드는 날에도

너는 늘 잡목 사이로 논둑 밑으로 숨어들었다

 

비상은 위태로웠고 날아드는 총탄에 네 날개는 부러져 나갔다

너의 참혹한 역사를 알기에 나의 귀는 쫑긋 네게로 열리나보다

그 기구하고 참혹한 운명을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너는 이 대명천지 밝은 세상을 식민지 삼아 사는 법을 익혀 온 게다

 

너의 회한이 오늘은 나의 시심에 한 송이 꽃처럼 피어나려나보다

뙤약볕 내리쬐는 여름 한 때 네 울음소리 오늘따라 저리 애절한 것은

네 모습 내 마음에 한 개 비애로 맺혀있는 까닭이다

공포에 가득한 네 모습 가시지 않는 영상으로 내 마음에 자리한 까닭이다

‘꿩꿩’ 다시 들려오는 목쉬어 탁한 외마디, 외마디 소리  

먼 옛날 악동의 시절 산딸기 익어가던 수풀 속 네 둥지를 찾아냈었지

너는 놀라 달아나고 너의 둥지는 가난한 시골아이 횡재가 되었었지

그랬다, 너의 둥지는 가난한 시골아이 밥상의 탐스러운 먹거리가 되었었다


네 울음소리 방향을 따라 우리는 너의 둥지를 찾아 나서곤 했지

원시의 자식들이 종횡무진 들판을 가로질러 사냥에 출동 하듯이

그래 너는 지금도 나만 보면 황급히 달아나는가보다

비명을 지르며 허겁지겁 고개를 처박고 풀 섶으로 숨어 버리나보다

 

멀리 저수지 너머 숲속에서 들려오는 애처로운 뻐꾸기소리

‘꿩꿩’ 저쪽 논두렁 풀 섶에서 들려오는 네 울음소리

저수지엔 많은 사람들 무심한 듯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꿩 먹고 알 먹고 싶은 욕심으로 꿩 대신 닭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노트


저수지 가에 텐트를 치고 독서를 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여러 가지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유독 내 마음에 와 닿는 소리는 꿩 울음소리였다. ‘꿩꿩’ 하고 들녘을 울리는 단조로운 두 마디 소리는 뭔가 하소연 하는 듯도 하고 고달픈 삶의 한탄 같기도 했다. 나는 유년 시절까지 더듬어 올라가며 꿩의 이미지를 옮겨보았다.

2008.07.09 13:50 ⓒ 2008 OhmyNews
#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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