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07년 4월1일, 택시 노동자 허세욱은 "한미FTA 즉각 중단하라"고 외치면서 분신을 했다. 사진은 2007년 당시 범국민추모제.
 2007년 4월1일, 택시 노동자 허세욱은 "한미FTA 즉각 중단하라"고 외치면서 분신을 했다. 사진은 2007년 당시 범국민추모제.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40년이 흘렀다. 스물두 살의 청년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몸에 불을 붙였던 1970년 11월13일로부터. 그의 분신은 우리 사회가 잠 안 오는 약을 먹으면서 재봉틀에 핏덩이를 토하며 일하던 노동자들의 삶을 돌아보게 했다. 그 후 이름뿐이던 근로기준법이 조금씩 지켜지게 됐고, 그의 뜻을 따르는 수많은 이들이 노동현장에 '민주노조' 깃발을 꽂았다.

3년이 지났다. 쉰 넷의 늙은 택시노동자 허세욱이 "한미FTA 즉각 중단하라, 노무현 정권 퇴진하라"면서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2007년 4월 1일로부터. 그의 죽음은 국민의 반대에 아랑곳 않고 한미FTA 체결에만 힘썼던 '신자유주의 좌파' 노무현 정부의 본모습을 국민에게 알렸다.

분신 후 세상에 알려진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행동하는 양심'의 본보기였다. 그 삶이 '깨어있는 양심'들에게 보낸 메시지는 강렬했다. 하지만 항상 깨어있기가 벅찬 '보통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메시지를 종종 잊는다. 이제 3년, 다시금 그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택시노동자 허세욱이 우리에게 남긴 숙제를 떠올려 본다.

'배달의 기수', 세상의 실상을 보다

허세욱씨에게 인생은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터널과 같았다. 가난한 농사꾼 집안의 9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중학교까지만 마치고 못하고 서울로 올라온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배달뿐. 막걸리 배달, 꽃 배달, 박카스 배달 등을 전전했다. 이 '배달의 기수'는 결국 1991년, '사람 배달'까지 하게 된다. 택시운전사가 된 것. 생전에 그는 그때까지의 삶을 "망나니 같았다"고 표현했다.

1994년, 그 삶을 뒤흔드는 순간이 찾아왔다. 재개발 지역인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살던 그는 골목 모퉁이에서 강인남이란 봉천6동세입자대책위 활동가가 용역깡패에게 잔인하게 맞는 장면을 본다. 돕고 싶었지만 겁이 많아 돕지도 못하고 몰래 훔쳐만 봤다. 허씨는 참여연대에서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 2007년 2월호 참여연대 열성회원 인터뷰에서 당시를 "참 부끄러운 기억"이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그 뒤 많은 걸 깨달았죠." 세계의 실상을 보게 된 그 순간, 사람들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가 터널을 뚫고 나온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 한 살이었다.

3주기를 맞아 이달에 출간된 <허세욱 평전>을 쓴 송기역 작가가 강인남씨 관련 이야기를 더 들려준다.

"강인남 선배가 허세욱님에게 처음 선물한 책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였대요. 그걸 두고두고 후회하세요. 진짜로 그렇게 살 줄은 몰랐던 거죠. 보통 사람들은 그렇지 않잖아요."

허씨는 강씨를 '싸부'라고 불렀다. 이후에도 허씨에겐 여러 명의 '싸부'가 생겼다. 그는 나이와 상관없이 활동가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송 작가는 그를 "'싸부'님이 하는 얘기는 곧이곧대로 듣는, 그걸 그대로 실천해 버리는 사람이었죠"라고 표현했다.

"오늘도 잘 배우고 갑니다"... 집회장에서 세상을 배운 사내

고 허세욱 씨의 죽음은 이 시대 '깨어있는 양심'들의 가슴을 울렸다. 범국민추모제에서 애통해하고 있는 참가자들.
 고 허세욱 씨의 죽음은 이 시대 '깨어있는 양심'들의 가슴을 울렸다. 범국민추모제에서 애통해하고 있는 참가자들.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하나의 깨우침은 또 다른 깨우침을 낳았다.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는, 적나라한 폭력이 난무한 철거투쟁에서 세상을 본 허씨는 계속 알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게 생겼다. 사는 터전을 지키는 일에 나섰던 그는 바로 일하는 터전을 위해 일어섰다. 소속돼 있던 한독운수노조가 상급단체를 한국노총에서 민주노총으로 바꾸는 투쟁에 함께 한 것.

곧 이어 참여연대, 민주노동당에도 가입했다. 자신이 겪은 강제철거 뒤엔 사회구조적인 모순이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후였다. 또한 그는 미군장갑차에 치어 숨진 두 여중생 효순·미선 투쟁, 매향리 미군폭격장 폐쇄 요구 투쟁을 겪으면서 사회구조적인 문제가 평화와 통일의 문제와 따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데도 눈을 떴다. 그런 투쟁에 빠지지 않는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평통사)'이란 단체에도 가입한다.

박석민 민주노총 교육국장은 허씨를 떠올리면 "오늘도 잘 배우고 갑니다"란 말이 떠오른다고 했다. 집회 때면 꼭 뒷자리에 앉아 있다가 집회가 모두 끝나고 나면 실무자들이나 어른들한테 허리를 굽히고 두 손으로 악수를 하면서 잘 배우고 간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고. 박 국장은 '민족민주노동열사 허세욱 정신계승사업회'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정신계승사업회는 허씨의 삶을 보여주듯 민주노총, 참여연대, 평통사, 민주노동당이 결합돼 있다.

투쟁의 현장도 허씨에겐 배움터였다. 그는 두 번이나 홀로 택시를 타고 매향리 폭격장에 찾아갔다. 전경이 그 소리에 놀라 방패를 떨어뜨릴 정도로 어마어마하다는 폭격소리를 직접 들었다. 효순, 미선양이 살해된 현장에도 직접 택시를 몰고 갔다. 그렇게 미군의 실체를 속속들이 파악했다. 그 뒤 일반 시민들은 이름조차 낯선 한미안보협의회(SCM), 한미안보정책구상회의(SPI) 규탄 농성이나 기자회견들에서도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허씨는 앞서 소개한 <참여사회>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집회장엔 상하도 없고 너와 나도 없습니다. 오직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힘만이 있을 뿐이죠. 일한 만큼 대접받는 사회가 된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남을 돕느라 정작 자신은 끼니 굶어

택시로 하루 340여km씩 한 달을 꼬박 몰아 허세욱씨가 손에 쥔 돈은 100만 원 남짓이었다. 허씨는 그 돈의 상당수를 내가 아닌 남을 위해 썼다. 동네에 혼자 사는 노인들을 돌보고 소년소녀가장들을 도왔다. 관악주민연대, 참여연대 등 각종 시민사회단체 회비를 내고, 단체 활동가들의 넉넉하지 못한 생활을 부지런히 챙겼다. 그러느라 정작 자신은 끼니를 거르는 경우가 많았다.

유종대 한독택시분회 대외협력부장은 "허세욱 형님은 참 정이 많으신 분이었어요"라고 했다.

"제가 살던 곳이 공원이 되는 바람에 이사를 하게 됐어요. 이사하고선 형님한테 '저 이사했습니다' 한 마디 했죠. 저녁에 일 나가려고 택시 트렁크를 열었는데 화장지 두 묶음이 들어있는 거예요. 누가 갖다놨나 생각해 보니 허세욱 형님밖에 없더군요. 그 이튿날 형님한테 '화장지 갖다 놓으셨죠?'라고 물으니까 '아니, 뭐 그걸 얘기를 해. 내가 가보지도 못하고 해서….'라고 하시더라고요."

허 씨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 유 부장은 술자리에서 허씨가 얼핏 지나치듯 하는 얘기를 통해 그가 혼자 사는 노인분들 라면도 사다 드리고 공짜로 택시도 태워드리곤 했다는 것을 알았다고했다.

잘 드러나지 않았던 이의 빈자리가 큰 법. 유 부장은 출근할 때면 꼭 한독운수 사내에 있는 허세욱 기념관에 들린다고 했다. "청소는 잘 돼 있는지 형님이 남긴 물건들은 잘 있는지 확인할 때마다 허세욱 형님이 생각나요"라고 말하는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배우고... 실천하고... 또 실천하고...

'달리는 민주노동당'이라고 불렸던 허씨는 생활이 곧 '운동'이자 '실천'이었다. 택시 손님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고 손님들과 끊임없이 사회 이슈에 대해 대화를 나눴다. 일 끝내고 봉천동 셋방으로 가는 새벽길까지 남은 유인물들을 집집마다 넣으면서 실천을 이어갔다.

많은 단체에 가입했던 허씨는 '그냥 회원'이 아니었다. 평전 작업을 위해 허씨가 활동했던 단체들을 찾았던 송기역 작가는 모든 단체에서 "허세욱님은 회원이 아니라 활동가셨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자신은 그냥 회원의 활동을 한 것이겠지만 어느 회원도 그처럼 열성적으로 강연을 찾아다니고 집회에 빠짐없이 참여를 하지 못하니 그가 도드라진 것은 당연할 수밖에.

허씨의 작은 단칸방엔 각종 강연 때 빼곡히 필기한 노트, 각종 신문 스크랩 등이 남겨졌다. 송 작가는 그의 삶을 "끊임없는 자기 극복, 자기 갱신의 삶"이었다고 칭했다. '허씨는 못 배운 한'을 풀기 위해 늘 배울 곳을 찾았고 스스로 공부했다. 말주변이 없는 콤플렉스도 그렇게 고쳐 나갔다.

"허세욱님은 말투가 어눌하고 표현을 잘 못하셨어요. 그런데 2007년 평택 대추리의 희망이 사라져갈 때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도 논리적이고 꽤 잘하게 돼요. 그만큼 노력한 결과겠죠."

송 작가는 허씨의 변화상을 전해줬다.

"당시 그분은 의식이 다른 차원으로 건너갔던 것 같아요. 모든 걸 걸고 저항의 길을 걸어왔던 한 평범한 시민의 입이 확 열린 거죠. '한미FTA를 폐기하라'고 말해야 하니까…."

고등학교에 가지 못한 허씨는 대학에 가고 싶어 했다. 2006년에 잠깐 고등학교 검정고시 준비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열심히 할 수가 없었다. '그 놈의 대추리 때문에…, 그 놈의 FTA 때문에….' 그는 "싸워야 하는데 잘 시간이 어디 있냐?"고 했던 사람이다.

세상을 뒤흔든 택시노동자의 경적 소리

세상의 실상을 깨달은 고 허세욱 씨는 일하는 현장을 바꾸는 데도 앞장섰다. 맨 왼쪽에 있는 이가 고 허세욱 씨다.
 세상의 실상을 깨달은 고 허세욱 씨는 일하는 현장을 바꾸는 데도 앞장섰다. 맨 왼쪽에 있는 이가 고 허세욱 씨다.
ⓒ 민주택시연맹 한독운수분회

관련사진보기


허씨의 죽음을 '참여정부의 살인'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허씨는 누구보다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에 반대하며 집회에 참석했었다. 그랬던 그에게 노 대통령은 '한미FTA'라는 독약을 선물하려 했다. 송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봤을 때 한미FTA는 그분이 그동안 했던 싸움들의 총체였던 거예요. 그동안 자신이 목격한 이 사회의 모순과 불의, 그리고 효순·미선 사건에서 본 미국의 모습, 신자유주의의 폐해들…. '모순 종합선물세트' 같은 거였죠. 한미FTA가 소수의 이익을 위해 민중의 생존권을 종합적으로 묶어서 떨이로 처분하자는 거잖아요. 자신이 살아온 삶을 FTA로 묶어서 폐기처분하려는 것에 대해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택시노동자 허세욱씨는 자본의 총공세에 경적을 울렸다. 깊은 밤중에 깨어 있는 사람들이 듣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송 작가는 "한밤중엔 자지 않는 사람들이 많지 않잖아요. 깨어있는 사람들이 듣기를 바라면서 길게, 그리고 크게 울리고 싶었던 거죠. 사람들이 자다가 '화들짝' 일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서 경적을 누르신 거죠"라고 하면서 "그 경적 소리를 우리가 들었어야 하는데…"라고 덧붙였다.

세상을 뒤흔든 허씨의 긴 경적엔 그가 삶으로 보여줬던 당부도 담겼다.

"명망가 운동을 하지 마라. 책상머리에 앉아서 일하지 마라. 현장으로 내려와라. 떨어지는 감 주워 먹는 사람이 되지 마라."

누군가를 짓밟는 데 익숙한, '1등만 기억하는 이 더러운 세상'에 길들여져 떨어진 감인 줄도 모르고 주워 먹던 사람들의 목이 탁 막힌다. 갑갑한 목을 어루만지고 있는 이들에게 '열사'보다 '형님, 아저씨'란 호칭이 더 친숙한 허세욱씨가 하늘에서 참으로 좋아했던 구호를 크게 들려준다.

"단결해서 싸우자! 하나가 돼서 싸우자!"

"택시가 집, 집회장이 마당이었던 사람"
[인터뷰] <허세욱 평전-별이 된 택시운전사> 집필자 송기역
<허세욱 평전>을 집필한 송기역 작가
 <허세욱 평전>을 집필한 송기역 작가
ⓒ 노동세상

관련사진보기

송기역 작가는 '허세욱'이란 이름을 그가 분신하던 2007년 4월1일에 처음 들었다고 했다. <허세욱 평전> 작업을 부탁받고 자신은 그처럼 치열하게 살지 못했고 그걸 자신도 없어 부담스러워 망설였다고도 전했다. 하지만 허세욱씨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그가 "세상에 아픈 자리는 가지 않은 곳이 없으니 분명 우리는 어디선가 스쳤을 거다"란 생각이 들었고 그의 이야기들을 보면 볼수록 자신의 마음이 움직여 2년여의 평전작업을 진행했단다.

- 허세욱 씨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 있을 텐데….
"평전 집필의 출발점이 된 사진 한 장이 있다. 2007년 1월 대학로에서 열렸던 집회에서 찍은 사진인데 집회장에서 쉰 넷의 아저씨가 하늘을 보면서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그게 바로 영정 사진이다. 그분한테는 집이 잠시 들렸다가 몇 시간 자고 나오는 여인숙 같은 곳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집은 어딘가. 바로 '택시 안'이었다. 실제 집보다 더 오래 머물렀던, 늘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던 실천의 공간. 집이 있으면 마당도 있지 않나. 집회 현장이 그런 곳이었다. 사람들이 항상 허세욱을 발견하는 공간. 허세욱님은 남들이 마당을 쓸고 화단을 가꾸듯 집회가 끝나면 휴지를 줍고 남은 유인물들을 모아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갖고 가셨다."

- 그는 대단한 실천가였던 것 같다.
"가난하고 검소했다. 종이 한 장도 아껴 버려지는 유인물을 못 봤다. 누구나 그래야겠지만 그게 쉽지 않지 않은가. 몸을 움직여야 하니까…. 단점도 있다. 실천에 철저했던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좀 극성이었다. 집회에 갔는데 단체 깃발이 안 보이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하곤 했다. "안진걸 팀장님, 참여연대 깃발이 안 보이네요." "어, 오늘 민주노총 왜 안 왔어요?"라고. 사실 매번 어떻게 그분처럼 집회마다 다 가겠나. 그래도 정말 우리들의 생존권을 총체적으로 짓밟는 싸움이 있으면 그건 하나가 돼서 싸울 필요가 있다. 허세욱님이 자주 말씀했듯이 '돈 있는 자는 돈으로, 지식 있는 자는 지식으로, 그림 그리는 자는 그림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 만난 주변 분들은 그의 죽음을 어떻게 봤나.
"그렇게 겁 많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던 분이 가장 극단적인 죽음으로까지 간 데 아파했다. 이 죽음은 우리 사회에 대한 심각한 경고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허세욱님은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다. 그가 말했듯이 워낙 '밑바닥 인생'을 살아와서 따뜻하게 살고 싶어 했다. 친구를 필요로 했고, 사실 가장 큰 친구는 가족 아닌가.  
'나는 고향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그건 내가 현재 여기 서 있기까지 출발한 데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갈 데에 대한 절박함이 더 컸을 수도 있다. 고향이 없는 만큼 현재를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는 '진짜 행복'을 바랐다. 내가 진실을 본 게 있는데 나 혼자만 행복하게 사는 건 무의미하다, 더불어 행복하게 사는 '진짜 행복'을 원했다."

- 그의 죽음에 크게 영향을 받은 사람이 있나.
"허세욱님이 분신하셨을 때 소화기를 뿌렸던 전경을 만났다.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영화로만 봤던 그 친구는 너무 충격을 받아 그분에 관한 기사를 찾아봤고, 유서가 가슴이 아팠다고 하더라. 특히 '모금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전부 비정규직이니까.' 부분. 한 지방대에 다니던 학생이었는데 유서를 보고 주변 선배들을 봤더니 죄다 비정규직이더란다. 나도 왜 '전부'라고 했을까 의아했다. 생각해 보니 정규직 역시 예비적인 비정규직이더라. 작년에 투쟁한 쌍용차 노동자들이 쌍용 경력 자체가 인정이 안돼 막노동을 전전하고 있는 것처럼…. 그 전경이었던 친구의 꿈이 경찰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정말 어려운 사람들, 시민들에게 친구가 돼 주는 그런 경찰이 되고 싶다고 하더라. 진짜 '민중의 지팡이'가 되고 싶다고."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월간 <노동세상> 4월호(www.laborworld.co.kr)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허세욱, #허세욱 평전
댓글

노동자의 눈으로 본 세상, 그 속엔 새로운 미래가 담깁니다. 월간 <노동세상>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