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 대하드라마 <주몽>.
ⓒ 문화방송(MBC)
대하드라마 <주몽>에서 주몽은 한나라에 대항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고구려 성립 연대에 관한 <삼국사기>의 기록에 중대한 결함이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1145년에 쓰인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은 고구려가 BC 37년에 성립하였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이것은 그 이전에 나온 다른 사료(역사학 자료)들과 명백한 모순을 보이고 있다.

고구려 성립 연대와 관련하여서는, 지난 2000년 11월 24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조선장학회 창립 100주년 기념 ‘동아시아의 새 발견’ 심포지엄에서 북한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석광준 부교수도 이설(異說)을 내놓은 적이 있다.

당시 석 교수는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서 발굴된 고구려 초기의 적석총(積石塚, 돌무지무덤)이 무덤 형식이나 부장품으로 보아 BC 3세기 때의 것으로 보인다는 점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世孫)이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는 점을 근거로, 고구려는 BC 37년이 아닌 BC 277년에 건국되었다고 주장하였다.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고구려 성립 연대를 BC 277년으로 못박을 수는 없겠지만, <삼국사기>와 다른 사실을 전하고 있는 이전의 사료들이 있다면 그 내용을 일단 살펴보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일 것이다.

그럼, 고구려는 과연 언제 건국되었을까? 김부식의 기록은 정말 믿을 수 없는 것일까? 이를 위해 <삼국사기>의 관련 기록을 먼저 검토한 뒤에, 광개토대왕비문과 중국측 역사서인 <한서> 등을 통해 고구려 성립 연대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BC 37년설의 진원지인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열어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의 고구려 건국에 관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2>에서 빨간 줄을 친 부분이다.

▲ 그림 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 다섯 번째 줄에서 김부식은 고구려의 성립 연대를 적고 있다.
ⓒ 김종성
“그(졸본천 부근, 번역자 주) 토양(土壤)이 기름지고(肥美) 산하(山河)가 험고(險固)함을 보고 마침내 도읍(都邑)을 삼고자 하였으나, 궁실(宮室)을 지을 경황이 없어서 다만 비류수변(沸流水邊)에 거처를 짓고 그곳에 거하였으며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고(高)로써 씨(氏)를 삼게 되었다. 이때 주몽이 나이 22세였으니, 한나라 효원제(孝元帝) 건소(建昭) 2년이며, 신라 시조 혁거세(赫居世) 21년인 甲申(갑신)년이었다.”

이에 따르면,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연도가 한나라 효원제 건소 2년 즉 BC 37년이라고 하였다. 고구려 건국 연대를 명확히 알려주는 것으로는 가장 빠른 기록일 것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서 우리는 3가지 의문점을 가질 필요가 있다. 첫째, 고구려가 건국된 지 천년도 훨씬 넘는 시점에서 태어난 김부식이 어떻게 저렇게 단호하게 고구려 성립 연대를 말할 수 있을까? 둘째, 김부식은 왜 천년 전의 연도를 단정적으로 말하면서 정작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는 걸까? 셋째, 김부식이 고구려 건국 연대를 이야기하면서 신라보다 20년 늦게 건국되었다는 점을 유달리 강조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의문은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이와 같이 김부식은 고구려 성립연대가 BC 37년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부식의 설명에 의문을 갖게금 만드는 것이 있다. 바로 주몽과 광개토왕 간의 세수(世數)에 관한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서는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라고 한 데 반해, 광개토대왕비문에서는 17세손이라고 한 것이다. 광개토왕에게 5명의 직계조상이 더 있었다면, 주몽과 광개토왕의 중간에 약 150년 정도의 시간 차이가 더 생기는 것이고 그만큼 고구려 성립 연대도 앞당겨지게 된다. 그럼,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의 기록을 실제로 확인해 보기로 한다.

<삼국사기>에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2세손”이라는 확정적인 기록은 없다. 그것은 ‘고구려 본기’ 중간 중간에 나오는 가계(家系)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예컨대,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 본기’ 1에서는 “유리는 주몽의 맏아들”이라고 하였고, 같은 권13의 ‘고구려 본기’ 2에서는 “대무신왕은 유리왕의 3남”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기록을 추적함으로써 주몽과 광개토왕의 세수(世數)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사료를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므로, <삼국사기> 권13~권18의 기록을 <그림 3>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 그림 3
ⓒ 김종성
<그림 3>에 보이는 바와 같이,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19대 군주이고,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과 광개토왕의 세수는 12대다.

그런데 이 그림에 보면, <삼국사기>에 따를 때에 고구려의 군주들 중에서 7명이 직계 계승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4대 민중왕, 6대 대조대왕, 7대 차대왕, 8대 신대왕, 10대 산상왕, 15대 미천왕, 18대 소수림왕이 바로 그들이다. 15대 미천왕의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은 모두 직전 군주와 항렬이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 모두가 직전 군주의 아우들이라고 김부식은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우리는 2가지 의문점을 품을 수 있다. 첫째,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에 왜 이렇게 방계 계승자가 많은 걸까? 둘째, 상대적으로 사실 확인이 힘든 고구려 초기의 4대~10대 왕 사이에서 ‘아우’가 왕위를 계승한 경우가 많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의문 역시 논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소되리라 생각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따르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으로 나와 있지만, 장수왕 때에 세워진 광개토대왕비문에 따르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점을 파악하기 위해 광개토대왕비문을 수록하고 있는 <증보문헌비고>를 열어 보기로 한다. 참고로, <증보문헌비고>는 1908년에 국가가 편찬한 백과사전적 저서다. <그림 4>에 보이는 광개토대왕비문에서 빨간 줄 친 부분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림 4. 광개토대왕비문을 전하고 있는 <증보문헌비고> 권36.
ⓒ 김종성
“이 기업(基業)을 이어받았으며 □ 17세손에 이르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 二九(18세, 번역자 주)에 등극하여 영락태왕(永樂太王)이라 일컬었다.”

여기서 “□”는 빠진 글자를 표시한 것이다. 그리고 “이 기업”이라는 것은 주몽이 세운 고구려를 가리킨다.

중요한 것은, 이 비문에서 광개토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말했다는 점이다. <삼국사기>에 비해 5세(世)가 더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비문의 내용이 맞다면, 고구려 건국 시점은 BC 37년보다 최소한 150년 정도 더 앞당겨지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는 240년을 더 앞당겼지만, 광개토대왕비문에 의거하면 최소한 150년 정도를 더 앞당길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삼국사기>와 광개토대왕비문 중에서 어느 쪽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두 사료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신빙성이 높은가를 고려해 보기로 한다.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언제 기록되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삼국사기>는 1145년에 쓰여진 데 비해, 광개토대왕비는 414년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삼국사기>보다 731년이나 더 빠른 광개토대왕비를 더 신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둘째, ‘누가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김부식은 광개토왕과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으며 또 광개토왕을 본 적도 없다. 그에 비해, 광개토대왕비를 세운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아들이며 광개토왕을 직접 목격하였다. 그렇다면, 광개토왕이 주몽의 몇 대 자손인가에 관한 한 김부식보다는 장수왕이 더 전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왜 기록했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에 어느 쪽이 사실에 더 근접한 것일까? 잘 알려져 있듯이, 김부식은 기본적으로 신라 중심주의자였다. 그래서 그의 의도는 기본적으로 고구려를 폄하하고 신라를 높이는 데에 있었다. <그림 2>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김부식은 고구려 성립이 신라 성립보다 20년 늦었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고구려 성립연대를 가급적 늦추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부식의 말을 과연 100% 신뢰할 수 있을까?

더군다나 김부식은 천년 전의 연대를 말하면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김부식이 주몽과 동시대의 인물이라면 모르겠지만, 천년 이상 뒤늦게 태어난 사람이 아무런 근거도 없이 고구려 성립 연대를 그토록 단호하게 말할 수 있을까?

그에 비해, 장수왕은 정치적 이유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는 자기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광개토대왕비를 세웠다. 아들이 아버지의 비를 세우면서 자기 집안의 족보를 잘못 적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또 장수왕이 자신과 자신의 아버지가 주몽의 몇 세 손인지도 몰랐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의도적으로 고구려 성립연대를 신라보다 앞당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신라는 고구려의 상대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황을 볼 때에 고구려 성립연대를 조작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장수왕이 주몽과 광개토대왕 사이의 세수를 조작했으리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세수에 관한 김부식의 기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의 말대로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닌 17세손이라면,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의 시간적 차이도 그만큼 길어지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고구려 성립이 BC 37년보다 훨씬 이전에 이루어졌을 것임을 추론할 수 있게 된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김부식이 고구려 왕실의 세수를 잘못 적은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성립한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는 의도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김부식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세수를 조작했을까? 그 방법으로는 2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가지는 주몽과 광개토왕 사이에 있었을 몇 명의 군주를 없애는 방식이다. 또 한 가지는 직계 계승을 방계 계승으로 바꾸는 것이다. 예컨대,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게 아니라 아우가 왕위를 계승한 것이라고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세수를 줄일 수 있다.

김부식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을 사용한 것인지는 정확히 확인할 길이 없지만, <그림 3>을 통해 추론을 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림 3>에 보면, 상대적으로 사실 확인이 힘든 제4대~제10대의 시기에서 유난히 형제 계승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림 3>의 세 번째 항목인 ‘세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제4대부터는 ‘진도’가 잘 나가지 않고 있다. 아들이 그 다음 왕위를 이었다고 하면 세수가 ‘쭉쭉’ 나갈 텐데, 아우가 왕위를 이었다고 하는 부분이 계속 나옴으로써 세수가 ‘병목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 국초의 상황을 보면, 고구려는 일찍부터 부자 승계가 비교적 잘 확립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 점은 주몽의 왕위가 아들 유리에게 무난히 계승된 것을 통해서도 잘 확인할 수 있다. 요즘 드라마 <주몽>에서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태우고 있는 것처럼, 당시 상황에서는 유리가 고구려 제2대 왕에 등극하는 것이 상당히 힘든 일이었다.

<삼국사기> 권13 ‘고구려 본기’ 1에 의하면, 유리가 어머니 예씨와 함께 부여를 탈출하여 아버지의 품에 온 것은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 19년째 되는 해였다. 그러므로 주몽이 고구려를 세운 지 19년이 되도록 유리는 부여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그 19년 동안 유리는 고구려에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리가 돌아온 바로 그 해에 주몽이 죽었고 유리가 그 뒤를 잇게 되었다. 그에 관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9년 4월에 왕자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그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오니, 왕은 기뻐하며 태자로 삼았다. 9월에 왕이 돌아가니 나이 40세요, 용산(龍山)에 장사하고 동명성왕이라는 시호를 주었다.”

이에 의하면, 유리는 고구려에 들어온 지 불과 5개월만에 왕위에 올랐다. 이것은 아버지인 주몽의 왕권이 그만큼 단단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아무런 정치적 기반도 없는 유리가 주몽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부자 승계가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었는데, 사실 확인이 힘든 제4대~제10대 부분에서 김부식은 유난히 형제 승계를 많이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본다면, 김부식이 형제 승계라고 기록한 부분 중에서 몇 개는 실제로 부자 승계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세수를 줄이기 위해 그렇게 조작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비문이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할 만하다는 점을 입증하는 또 다른 증거도 있다. 그것은 바로 반고의 <한서>다. <한서> ‘지리지’ 권28하(下)에 나오는 현토군 관련 부분을 <그림 5>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림에서 빨간 줄을 친 부분이 본문이고, 그 밑의 작은 글씨는 주석이다. 본문의 내용만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 그림 5. <한서> ‘지리지’ 권28하(下)
ⓒ 김종성
“현토군은 호(戶)가 4만 5천 6개이며, 장정(口)이 22만 1845명이다. (그 아래에) 현이 3개 있으니,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다.”

<한서> 기록에 의하면, 한사군의 하나인 현토군 설립 당시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럼, 현토군은 언제 설립된 것일까? <그림 5>에서 “현토군”이라고 쓰인 부분의 밑에 보면 주석이 보인다. 그에 의하면,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 즉 BC 107년이라고 적혀 있다. 이것은 BC 107년 시점에 이미 고구려가 현토군의 영역 안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 기록에서는 고구려가 언제 생겼는지는 알 수 없어도, 적어도 BC 37년 이전에 고구려가 성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 기록에서는 현토군 관할구역 안에 고구려현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고구려현이 현토군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당시 한나라가 실제적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역에 대해서도 자국의 행정구역을 설치한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부식이 말한 BC 37년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중국 역사책에서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 이를 통해 고구려 성립연대에 관한 한 광개토대왕비문이 <삼국사기>보다 더 신뢰할 만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에, 고구려가 BC 37년에 건국되었다는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허구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또 그에 근거를 두고 있는 한국 학계의 통설 역시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고구려는 대체 언제 건국된 것일까? 북한 사회과학원에서는 BC 277년이라고 못을 박고 있지만,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렇게 꼭 집어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BC 107년 시점에 이미 고구려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또 확실한 것은 광개토왕이 주몽의 12세손이 아닌 17세손이기 때문에 고구려 건국 시점도 5세 즉 최소한 150년 정도 더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게 보면 최소한 BC 200년 전후에는 고구려가 성립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또 단재 신채호는 가충언이라는 인물이 당나라 고종에게 “고구려가 900년이 되었다”고 말한 점을 근거로 고구려 건국 연대를 더 끌어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한 적이 있다. 당 고종이 7세기 중엽의 인물이므로, 그로부터 900년 전이면 대략 BC 3세기가 된다. 북한측의 BC 277년 건국설과 대체로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그러므로 BC 277년이라고 꼭 집어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고구려는 이미 BC 3세기 때에 성립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BC 3세기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하게 되면, 고구려가 한나라(BC 202~AD 220)보다도 더 일찍 성립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주몽이 한나라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고구려를 건국하였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고대 한중관계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또 고조선이 BC 108년에 멸망했다는 중국측의 기록이 확실하다면, 이는 고조선과 고구려가 일정 기간 동안 병존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며 또한 고구려가 고조선에 속해 있었을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리고 서력 기원 전후에 한나라에 대항한 고구려의 용맹한 군주가 실제로 있었다면, 그는 주몽이 아니라 주몽의 후손이었을 가능성도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나오는 BC 37년 건국설이 허구이기 때문에 한국 고대사 및 한중관계 역시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올바른 역사를 복원하려면, 김부식을 ‘청문회’에 소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김부식이 별다른 근거도 없이 고구려를 폄하하기 위하여 조작한 고구려 성립연대를 깨지 않는 한, 한국 고대사 및 한중관계의 진면목을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볼 때에, 어쩌면 실제의 주몽은 한나라에 대한 콤플렉스가 전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고구려가 한나라보다 먼저 건국되었다면 말이다. 어쩌면 주몽은 중국 전국시대(BC 5~3세기)의 7웅과 경쟁을 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김부식에게서 벗어나면, 이와 같이 역사가 달리 보이게 될 것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 제15회 임종국상.. 저서: 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 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신라왕실의 비밀,왕의 여자 등.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