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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가 중원을 빼앗긴 1368년 이래로 동아시아에서는 명나라가 신흥 패권국가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명나라와 조선 사이에는 긴밀한 동맹체제가 구축되었다. 이 동맹체제는 기본적으로 동북 지방의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여진족이 ‘악의 축’으로 인식되었으며, 명나라의 주도 하에 조-명 연합군이 수시로 여진족 토벌에 나섰다.

그런데 여진족에 대한 집중 견제는 또 다른 재앙의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일본열도의 통일이었다. 대륙의 조선과 명나라가 여진족 견제에 신경을 쏟고 있는 틈을 타서 일본은 15세기 중반부터 16세기 후반까지 공전(空前)의 통일전쟁에 돌입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에 출현한 3명의 영웅 즉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의해 일본은 센고쿠(戰國)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BRI@일본이 이 시기에 비약적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내부의 경제발전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일본에 대한 대륙의 견제가 소홀했기 때문이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 공격으로도 잘 표현되듯이, 그 이전 시기에는 대륙 국가에서 일본을 ‘주기적’으로 견제하였다. 일본의 성장과 대륙 진출을 막기 위한 사전 견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명 양국이 여진족 억제에 바탕을 둔 태평성대에 만족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전대미문의 통일전쟁이 수행되었고, 전쟁의 승리자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여세를 몰아 대륙 침략의 ‘망상’까지 꿈꾸게 되었다. 우리가 흔히 ‘200년 태평성대’라고 알고 있는, 조선 전기의 ‘명나라에 의한 평화’ 즉 팍스 시니카(Pax Sinica)는 일본이라는 또 다른 ‘위협’을 잉태하는 요인이 되고 있었다.

대륙으로부터 아무런 견제가 없었기에, 일본 역시 아무 제약 없이 ‘꿈’을 꿀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침략 계획은 20세기 일본인들의 대동아 공영권 구상을 연상시킬 만큼 ‘스케일’이 상당히 큰 것이었다.

도요토미가 대륙침략계획을 발표한 1585년 9월 3일 이후인 1586년 3월에 쓰인 선교사 루이스 프로이스의 서한에 따르면, 당시 도요토미는 동생에게 일본열도를 물려주고 자신은 조선·중국 침략에 전념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또한 나라(奈良)의 어느 승려가 남긴 1587년 3월 3일자 <다몬인닛키>에 의하면,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남만·중국까지 쳐들어갈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고 한다.

이제 겨우 조그만 섬나라를 지배하기 시작한 인물이 자기 시대에 조선·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까지 진출하려 한 것이다. 20세기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대야망’을 떠올리게 하는 측면이다.

그리고 도요토미는 일본 통일과 대륙 침략을 별개의 사안으로 인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동부 일본의 호조씨(氏) 세력을 물리친 1590년 7월 이전부터 이미 조선 침략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륙 진출의 전 단계로서 1587년 3월에 규슈 지방을 공격하였고, 이때부터 쓰시마 영주를 통해 조선 정부와 교섭하기 시작하였다. 쓰시마 영주를 통해 조선에 요청한 것은 “조선 군주가 일본에 입조(入朝)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조선 군주가 직접 일본에 찾아와서 무릎을 꿇으라는 ‘황당한’ 요구를 한 것이다.

센고쿠 통일이 달성된 1590년 이전부터 도요토미가 이미 조선 침략을 동시에 추진하였다는 것은, 그의 머릿속에서는 ‘일본 통일’이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세계 통일’을 추진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또 센고쿠 통일이 달성된 지 2년만인 1592년에 정말로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는 것은, 그가 일본 통일과 대륙 침략을 동일한 범주로 생각하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실제로도 그는 자신의 ‘꿈’이 실현 가능하다고 판단했던 모양이다. 그 점은 도요토미가 매우 치밀하게 대륙 침략을 준비한 데에서도 잘 드러난다. 센고쿠 통일 과정에서 잘 드러난 그의 치밀하고 용의주도한 성격은 조선 침략의 준비과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그는 먼저 조선에서 가까운 규슈를 침략의 전진기지로 설정했다. 그리고 각지의 상인들을 동원하여 규슈의 하카다(오늘날의 후쿠오카시 소속)를 병참 기지로 만들었다. 하카다는 무구상·도검상·소금상·목재상·어물상·석재상 등이 직종별로 배열된 ‘백화점식’ 병참 도시로 거듭났다. 또한 오사카·사카이·나라의 공인(工人)들을 규슈 지방에 불러 군수품 생산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비단 상공인들만 전쟁에 동원된 게 아니었다. 농민들도 인부로 동원되었다. 수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조선 침략을 위해 동원된 인력의 3분의 2가 인부나 수부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총력전에 대비한 전쟁 준비였던 것이다.

도요토미가 1581년 돗토리성 전투를 수행할 때처럼, 조선 침략에 대비하여 상인층 등을 동원하여 조선 코앞에서 치밀하게 병참 준비를 하였다는 것은 그가 대륙 점령을 실현 가능한 목표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꿈이 그야말로 망상에 불과하였다는 점은, 도요토미의 조직적인 무사 군대가 조선 농민 의병들의 대항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별다른 군사훈련도 받지 못하고 별다른 무장도 갖추지 못한 조선 농민들에 의해 도요토미의 대야망이 짓밟혀졌다는 것은, 당시의 일본이 아직은 대륙을 점령할 만큼의 실력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한 객관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가 일본통일 이전부터 조선침략 계획을 발표하고 또한 이를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에게는 대륙의 정세가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조선과 중원이 여진족 견제에 여념이 없는 국제정세가 그에게는 호기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청년 시절에 오다 노부나가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이른 새벽부터 주군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하였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나중에는 조선·중국·남만까지 가슴에 품을 야망을 꿈꿀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당시의 대륙 국가들이 여진족 견제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진족만을 ‘악의 축’으로 선포한 명나라와, 그 명나라의 ‘대테러 전쟁’에 이끌려 다닌 조선은 결국 또 다른 잠재적 ‘악의 축’인 일본의 발호를 막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허술한 국제정세 등이 작용하여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한 인물의 망상이 일본의 국가정책으로까지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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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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