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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싶고, 일할 능력이 있는 빈곤층에게 담보 없이 창업 자금을 빌려준다. 이를 통해 이들에게 자립의 기반을 제공한다. 대출 이후에도 경영지원 등 사후관리를 해주고 대출금도 떼이지 않는다. 이는 정부의 빈곤층 복지정책에 관한 얘기가 아니다.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소액대출), 일종의 대안 금융이 이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지난해는 유엔이 정한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해'. 국내에선 '사회연대은행'과 '신나는조합'이 마이크로크레디트를 소개하고 확대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2005년을 보내며 국내 마이크로크레디트의 현실에 대해 2회에 걸쳐 살펴본다. 오늘은 그 두번째로 신나는조합과 이곳에서 대출받아 알콜중독을 딛고 어엿한 '사장님'이 된 진교창씨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 진교창씨처럼 한 때 알콜중독에 빠졌다가 재기를 꿈꾸고 있는 5명은 신나는 조합으로부터 각각 300만원씩 모두 1500만원을 대출받아 북악전자를 세웠다.
ⓒ 오마이뉴스 김연기

서울 정릉동 시내버스 171번 종점 국민대학교 초입 부근. 북한산 끝자락답게 이곳의 아침 공기는 차고 상쾌했다. 종점에서 내려 5분 남짓 오래된 골목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진교창씨 등 5명이 공동 운영하는 가전제품 수리 및 재활용업체 북악전자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을 찾은 지난 12월 29일 오전. 가게 앞은 냉장고, 에어콘, 세탁기 등 재활용 가전제품으로 가득했다. 진씨는 아침부터 전날 저녁 수거해온 물건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진씨와 함께 이곳에서 일하는 4명은 이미 재활용 전자제품을 수집하기 위해 자리를 뜨고 난 뒤였다. 점심시간에 앞서 한 팀이 물건을 수거하고 들어오기 때문에 그만큼 진씨의 손놀림도 빨라졌다.

"전날에 들어온 물건은 아침 일찍 보기 좋게 전부 정리를 해놔야 해요. 그래야 오후에 물건이 들어오면 뒤섞이지 않고 잘 쌓아둘 수 있거든요."

알콜중독자 5명 의기투합 1500만원 대출

북악전자가 이곳에 문을 연 것은 지난 4월. 재활공동체인 십자가 선교회에서 만난 5명이 의기투합을 했다. 진씨처럼 한 때 알콜중독에 빠졌다가 재기를 꿈꾸고 있는 이들 5명은 '신나는조합'으로부터 각각 300만 원씩 모두 1500만 원을 대출받았다. 신나는조합은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이들에게 무보증으로 대출을 해주는 곳이다. 그리고 북한산 산자락 밑에 가게를 열었다. 진씨가 수리 및 내부정리 일을 맡고, 나머지 4명이 물건 수거와 판매, 배달 일을 한다.

이곳으로 오기 전 진씨는 나머지 4명과 마찬가지로 반듯한 직장인이었다. 한 제약회사에서 영업담당 팀장으로 근무하며 아내와 딸과 함께 단란하게 가정을 꾸려갔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친구로부터 사기를 당하면서 진씨의 인생에도 불행이 닥쳐왔다.

당시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진씨에게 사업 제의를 해 왔다. 그때는 막 도시 직장인들 사이에서 '테이크 아웃' 커피가 인기를 끌던 시절, 커피전문점을 같이 해보자는 제의였다.

아내하고 상의하기를 여러 번, 결국 김씨는 친구를 믿기로 했다. 회사를 그만둔 뒤 받은 퇴직금과 당시 살고 있던 전세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1억원 가까이를 사업 자금으로 마련했다. 아내와 함께 가게를 열기로 한 곳을 직접 찾아가 꼬박 하루 동안 그곳을 찾는 손님 수를 세기도 했다.

진씨도 한 때는 반듯한 직장인, 친구 사기로 불행 닥쳐

▲ 진교창씨.
ⓒ 오마이뉴스 김연기
그리고 가게 인수를 계약하기로 한 날,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미 가지고 있던 1억 원 전부를 친구에게 맡긴 뒤였다.

"처음에는 뭔가 착오가 생겼겠지 했어요. 워낙 친하게 알고 지내던 친구라 사기를 칠 거라고는 눈꼽만치도 생각 못했죠. 그래서 충격이 더 컸나 봅니다."

진씨의 입에서 나직하게 탄식이 새 나왔다. 그 이후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면서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이때부터 술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장마가 길었던 2000년 여름의 일이었다. 결국 진씨는 알콜중독자 신세가 됐다.

1년 이상 술독에 빠져 살다가 2001년 11월 십자가 선교회를 통해 재활의 기회를 다잡게 됐다. 그곳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건강도 차츰 회복돼 갔다. 2003년부터는 선교회 주선으로 인근 식당의 주차관리 일을 1년간 했다. 그리고 2004년부터 전자제품 수리와 재활용 일을 했다.

"큰 돈 못 벌어도 일하는 것만으로 행복"

지난 2003년 12월부터는 소형 트럭을 몰고 직접 가전제품을 수거하고 수리한 뒤 다시 판매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올해 초 규모를 좀 더 늘리기 위해 가게를 찾던 중 지금의 장소를 알게 됐다. 여기에 십자가 선교회에서 신나는조합을 소개시켜줘 작지만 재기를 꿈꿀 수 있는 종잣돈을 마련했다.

"보시다시피 규모가 크지 않아서 많은 돈을 벌지는 못합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도 작지만 내가 일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게 참 다행스럽고 행복합니다."

사실 진씨 같은 이들에게 은행 대출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하지만 신나는조합은 진씨 같은 이들에게 신용이나 담보가 아닌 다시 일어나려는 자활의지 만을 보고 돈을 빌려준다. 대출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신나는 조합은 든든한 후견인 노릇도 하고 있다.

박팔주 신나는조합 팀장은 "벼룩시장에 광고를 내주고 협력업체도 소개 시켜주면서 실질적으로 매출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진씨와 함께 가게를 꾸려나가는 5명은 연 4%의 이자를 적용받아 한 달에 43만원씩 신나는 조합에 대출금 상환을 하고 있다. 큰 돈을 버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자를 갚아 나가는데 어려움은 없다.

"하루빨리 빚 청산하고 가족과 함께 사는 게 꿈"

진씨의 가장 큰 소망은 현재 개인적으로 진 빚을 전부 청산하고 하루빨리 가족들과 함께 새 삶을 꾸려 나가는 것이다. 김씨는 현재 가족과 떨어져 정릉동 국민대학교 부근의 선교원에 머물고 있다.

"올 한 해 그래도 열심히 일해서 (신나는) 조합으로부터 믿음을 얻었으니까요. 내년에는 추가로 대출을 받아서 가게를 좀 더 키워보고 싶습니다. 저도 빚 청산하고 가족들도 만나야죠."

무엇보다 이제는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서 좋다. 사기를 당하고 술독에 빠져 살 때는 '이대로 내 인생도 끝이구나'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아무 일도 안하는 것처럼 비참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변엔 일을 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힘든 시기를 벗어나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드려야죠."

빵대신 빵을 만들 수 있는 빵틀을 준다
국내 첫 무담보소액대출 신나는조합

지난 2000년 6월 설립된 신나는조합은 우리 사회에 처음으로 마이크로크레디트(무담보소액대출)를 소개했다. 담보나 보증 없이도 일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 빈곤층에게 300만원까지 대출을 해준다.(상환실적에 따라 500만원까지 추가대출) 대출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연 4%의 금리로 24개월에 걸쳐 매주 갚아야 한다.

우리 사회의 극빈자층에 대출을 해주고 있는데도 대출 상환율은 무려 94%에 달한다. 이는 시중은행은 물론, 사회연대은행보다도 높은 수치다. 박팔주 팀장은 "신나는조합은 경제적 자립뿐 아니라 극빈자들의 심리적 자활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며 "매주 교육을 통해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을 키워주다 보니 상환실적도 좋은 것 같다"고 말했다.

사회연대은행이 주로 차상위계층을 대상으로 대출을 해주고 있다면 신나는조합은 알콜중독자, 노숙자 등 극빈자층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

신나는조합의 특징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대출이 이뤄지고 있다는 데 있다. 가족이나 개인대출은 허용되지 않고 같은 자활의지를 가진 최소 3인 이상으로 구성된 공동체에만 대출이 가능하다. 박팔주 팀장은 "대출 규모가 소액이어서 여러 사람이 함께 사업체를 운영해야 하기 때문에 공동체를 지향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공동체 위주로 대출을 해주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신나는조합에서 대출을 받은 사업장은 대부분 5인1조 내지 3인1조로 구성돼 있다. 각 소모임은 매주 이자와 원금을 상환하고 일종의 '계' 형식을 통해 상호부조기금도 마련해 저축하는 습관을 기르고 있다. 현재 신나는조합은 39개 소모임 총 179명에게 3억3700만 원을 대출해줬다.

사회연대은행과 마찬가지로 신나는조합의 역할은 대출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다. 신나는 조합은 든든한 후견인 노릇도 하고 있다. 벼룩시장에 광고를 내주고 협력업체도 소개시켜주면서 실질적으로 매출증진에 도움을 주고 있다. 박팔주 팀장은 "올해 2월부터 지금의 홈페이지를 쇼핑몰 형태로 바꿔 생산에서 판매까지도 지원을 해줄 계획이다"고 말했다.

신나는조합은 또 끊임없는 교육을 통해 빈곤층으로 하여금 경제적 자활 외에 심리적 자활을 가져다 주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빵 대신 빵을 만들 수 있는 빵틀을 주겠다는 뜻이다. 박팔주 팀장은 이에 대해 "돈만 빌려주고 교육을 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다시 빈곤의 늪에 빠졌을 때 다시 헤어나오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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