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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날
비올롱의
긴 흐느낌
단조로운 우수로
내 마음
쓰라려

종소리 울리면
숨막히고
창백히
옛날을
추억하며
눈물짓는다

그리하여 나는 간다
모진 바람이
날 휘몰아치는대로
이리 저리
마치
낙엽처럼


▲ 단풍빛에 포옥 빠져들고 있는 용추계곡
ⓒ 이종찬

▲ 용이 하늘로 승천했다는 초록빛 용추호수와 길상사
ⓒ 이종찬

▲ 용추계곡으로 가는 산길
ⓒ 이종찬

단풍잎에는 세 계절의 가뭄과 비바람, 번개와 천둥소리가 들어있다

시인 폴 베르린느(Paul Verlaine, 1844∼1896)의 '가을의 노래'를 나직하게 읊조리며 단풍 빛에 젖어들고 있는 계곡을 찾아 나선다. 산과 계곡 곳곳을 곱게 물들이고 있는 단풍잎에서 문득 '비올롱의 긴 흐느낌'이 들려오는 것만 같다. 갑자기 마음이 쓰리다. 가끔 불어오는 바람에 온몸을 파르르 떠는 저 단풍잎들이 너무나 서럽게 보인다.

지금은 저 예쁜 단풍잎들이 사람들의 눈을 저리게 만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말라 비틀어져 떨어질 것이 아닌가. 또 어떤 단풍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이 골짝 저 골짝을 마구 뒹굴다가 사람이나 짐승의 발에 밟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산산이 부서지기도 하고, 또 어떤 단풍잎은 풀과 나무의 발목에 고단한 몸을 뉘였다가 봄이 오면 새로운 생명을 키워내는 밑거름이 될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 어쩌면 나뭇잎들이 아름답게 내뿜는 저 고운 빛깔들은 세 계절 동안 나뭇가지를 부여잡고 힘겹게 살아온 자신의 고된 삶을 거둬들이는 마지막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또한 나뭇잎들의 저 마지막 몸부림 속에는 지난 세 계절 동안 겪었던 가뭄과 비바람, 번개와 천둥소리가 들어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세 계절 동안 벌과 나비와의 굳은 약속이 나뭇잎 곳곳에 금으로 새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지난 세 계절에서 힘겹게 헤엄쳐 나와 마침내 가을을 맞이하여 곱게 물드는 단풍잎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속에는 곧 맞이해야 할 죽음이 내포되어 있다. 아니, 죽음이 아니라 이제는 '영원'이 다가와 있는지도 모른다. 그 영원은 다시는 윤회를 거듭하지 않는 그런 영원이 아니라 내가 떨어져 죽음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 그런 영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마지막 가는 길이 저리도 곱게 빛이 나는 것이 아닐까.

▲ 붉은 빛을 한껏 머금고 있는 단풍잎
ⓒ 이종찬

▲ 용추계곡 산길 곳곳에는 노오란 산국이 점점이 피어나 있다
ⓒ 이종찬

맑은 계곡물 위에 단풍잎 떠도는 풍경은 한 폭의 수채화

용추계곡은 경남 창원시 한가운데 우뚝 솟은 전단산(567m)과 창원의 해와 달을 떠올려주는 비음산(486m)을 견우와 직녀의 미리내처럼 갈라놓고 있는 깊고 아름다운 계곡이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지는 숲의 동굴과 깊숙한 계곡에 빼곡히 박힌 기기묘묘한 바위투성이, 매끄럽게 흘러내리는 맑은 계곡물과 지저귀는 산새소리를 듣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신선이 된다.

용이 승천했다는 초록빛 물빛의 아름다운 용추호수를 끼고 있는 용추계곡. 용추계곡은 북면의 달천계곡이나 성주사가 있는 불모산 계곡(창원에서 가장 아름다운 계곡이나 진해 시민들의 식수원인 성주못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폐쇄시켰음), 창원공단 뒤의 장복산이 빚어놓은 그런 계곡과는 달리 도심(경남도청 뒤) 한가운데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다.

용추계곡은 봄에는 연분홍빛 진달래와 철쭉, 여름에는 짙푸른 녹음을 뿜어내는 울창한 숲과 티 없이 맑은 물, 가을에는 울긋불긋한 단풍과 단풍잎이 수북이 쌓인 이끼 낀 바위, 겨울에는 허옇게 흩날리는 억새가 장관이다. 또한 용꼬리처럼 꿈틀거리는 계곡이 깊고 끝없이 길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마치 승천하는 용이 된 듯한 신비스러움까지 더해준다.

특히 단풍이 물드는 가을에 바라보는 용추계곡의 풍경은 더없이 아름답다. 촘촘한 가시 사이 알밤을 툭툭 까발리는 밤나무와 꿀밤(도토리)을 투둑투둑 흘리고 있는 굴참나무, 금세 피를 토해놓은 듯한 빠알간 잎사귀를 매단 피나무, 용비늘을 달고 있는 소나무를 이무기처럼 휘감고 올라간 칡넝쿨, 맑은 계곡물 위를 한가롭게 떠도는 아름다운 단풍잎 등은 보이는 그대로 한 폭의 가을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 빨갛게 잘 익은 청미래 열매
ⓒ 이종찬

▲ 용추계곡 바위와 소에도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잎이 가득
ⓒ 이종찬

계곡 곳곳에는 온통 울긋불긋한 단풍잎 세상

23일(일) 오후 1시. 울긋불긋한 단풍빛에 포옥 빠져들고 있는 용추계곡으로 간다. 초록빛 용추호수가 잔주름을 또르르 말고 있는 저만치, 전단산 기슭에 둥지를 튼 채 단풍빛을 물고 있는 길상사에서는 '지장보살'을 염송하는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누구를 위한 염불일까. 곧 속세를 떠나기 위해 마지막 숨결을 고르고 있는 저 숱한 단풍잎들을 위로하기 위한 염불일까.

초록빛 물결 위에 짙푸른 가을하늘이 출렁이고 있는 용추호수를 바라보며 노오란 산국이 점점이 피어난 산길을 천천히 거슬러 오른다. 오늘 따라 단풍잎처럼 울긋불긋한 옷을 입은 등산객들이 유난히 많다. 저들 중 몇몇은 비음산이나 전단산 산마루에 오를 것이고, 또 몇몇은 나그네처럼 용추계곡에 찾아들어 깊어가는 가을빛에 포옥 잠길 것임에 분명하다.

밤송이 껍질과 꿀밤 껍질이 뒹구는 산길을 따라 용추계곡 중턱쯤 오르자 빨간 열매를 매단 청미래 넝쿨이 손짓을 한다. 그래. 어릴 때에는 저 빨간 청미래를 따서 호주머니 볼록하게 넣고 다니며 동무들과 나눠먹곤 했지. 싯푸른 청미래는 몹시 쓰고 떫었지만 저렇게 빨갛게 잘 익은 청미래는 몹시 달착지근한 맛이 났었지.

빠알간 청미래 몇 개 따서 입에 넣고 우물거리며 기묘한 바위가 용비늘처럼 늘어선 용추계곡으로 들어선다. 용추계곡 바위 위와 바위 틈, 맑은 물이 고여 있는 자그마한 소(沼)에는 단풍잎들이 수북이 떨어져 계곡이 온통 울긋불긋하다. 고개를 들어 짙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거기에도 어김없이 울긋불긋한 단풍이 손짓하고 있다.

▲ 맑은 계곡물 위에 나뭇잎배 되어 떠도는 단풍잎
ⓒ 이종찬

▲ 빨강 주황, 노랑빛으로 물든 용추계곡의 단풍
ⓒ 이종찬

산도 계곡도 사람도 모두 울긋불긋한 단풍빛에 물들다

따가운 가을햇살을 피해 오른 손으로 눈가리개를 한 채 바라보는 저 비음산과 전단산 마루 곳곳에도 울긋불긋한 가을빛이 콕콕 찍혀 있다. 고개를 숙여 이끼 낀 바위 사이 미끄러지는 계곡물을 바라보아도 온통 울긋불긋한 물방울들이 무지개빛처럼 톡톡 튀어 오른다. 그 계곡물에 은근슬쩍 비치는 내 얼굴에도 어느새 울긋불긋한 단풍물이 맴돌고 있다.

산도, 계곡도, 사람도 모두 울긋불긋한 단풍빛으로 일렁이고 있다. 시리디 시린 계곡물에 손을 담가 자그마한 돌덩이 하나를 뒤집자 거기 잽싸게 달아나는 가재의 등 위에도 울긋불긋한 단풍잎 몇 개, 신선이 띄워놓은 나뭇잎배처럼 떠돌고 있다. 저만치 굴참나무 아래 평상처럼 널찍한 바위 위에도 노오란 굴참나무 잎사귀가 수북이 쌓여 있다.

가을이 깊어가는 용추계곡에는 바람이 불지 않아도 노랑 빨강 갈빛 단풍잎들이 갑자기 후드득 후드득 떨어지는 굵은 빗방울처럼 툭툭 떨어지고 있다. 이윽고 나그네의 마음속에 오래 전에 심어놓은 나무에서도 울긋불긋한 단풍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 중 빨간 빛의 단풍은 오랜 사랑의 흔적이요, 노랑빛의 단풍은 현기증 나는 그리움이요, 갈빛 단풍은 마침내 그 오랜 그리움의 끝자락에 서서 울고 있는 긴 긴 기다림이리라.

그날, 나그네는 용추계곡에서 울긋불긋 물드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나그네의 마음속에 무엇이 숨어있는지를 알아냈다. 그리고 용추계곡 곳곳에 툭툭 떨어지는 울긋불긋한 단풍잎에서 나그네의 오랜 사랑의 흔적과 현기증 나는 그리움과 긴 긴 기다림을 보았다. 깊어가는 가을, 용추계곡의 울긋불긋한 단풍잎들은 마침내 나그네의 마음까지도 울긋불긋 물들여 놓고 만 것이다.

▲ 이 노오란 빛은 누가 빚은 아름다운 솜씨냐
ⓒ 이종찬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대진고속도로-진주-남해고속도로-동마산 나들목-창원역-39사단-명곡로터리-창원의 집--경남도청과 경남도의회 사잇길-용추호수-용추계곡

※용추계곡으로 올라가는 나들목인 용추호수 주변에는 무료 주차할 수 있는 널찍한 공터가 있으며, 국수와 백숙, 파전, 동동주를 파는 집들이 늘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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