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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대포집의 명물 얼음막걸리
ⓒ 이종찬
우리 나라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술 '막걸리'

예로부터 '막 거른 술'이라 해서 이름 붙였다는 가난한 서민들의 술 '막걸리'.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고스란히 담으며 오랜 세월을 거슬러 내려온 우리 나라 술 '막걸리'는 우리 나라에서 빚는 여러 가지 술 중에서도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술이다. 또한 막걸리는 그 깊은 역사와 얽힌 사연만큼이나 그 이름도 참 많다.

막걸리, 탁배기란 순수한 한글 이름에서부터, 배꽃 피는 철에 담근다 하여 이화주(梨花酒), 술빛이 흐리다 하여 탁주(濁酒), 농민들의 갈증과 배고픔을 달래준다 하여 농주(農酒), 집에서 담근다 하여 가주(家酒), 색깔이 희다 하여 백주(白酒)라 부르는 것은 물론 지역에 따라 회주(灰酒), 재주(滓酒), 합주(合酒), 부의주(浮蟻酒) 등으로도 불린다.

아마도 지구촌 사람들이 지금까지 빚어낸 여러 가지 술 중에서 막걸리만큼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는 술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이는 또한 누구나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술 막걸리가 긴 세월의 그림자를 더듬으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동안 그만큼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사랑과 애증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는 뜻도 숨어 있지 않겠는가.

막걸리는 고두밥(술밥)에 누룩을 섞어 단지에 담아 따뜻한 곳에서 발효를 시켜 빚어내는 술이다. 그러므로 잘 빚은 좋은 막걸리는 다섯 가지 맛이 나면서 적당한 감칠맛과 청량감이 있어야 한다. 즉, 단맛(감,甘)과 신맛(산, 酸), 쓴맛(고, 苦), 매운맛(신, 辛), 떫은맛(삽미, 澁味)이 잘 어울리면서 알콜도수 또한 6%일 때가 가장 맛이 좋다는 것이다.

▲ 벼가 누렇게 익어가는 논두렁을 바라보면 막걸리가 생각난다
ⓒ 이종찬

▲ 막걸리를 시키면 따라나오는 밑반찬
ⓒ 이종찬
논두렁에 앉은 아버지께서 꿀꺽꿀꺽 마시던 그 막걸리

내가 어릴 때 살았던 마을에서는 어르신들이 끼니를 거를 때마다 '탁주 반 되는 밥 한 그릇'이라며, 커다란 대접에 허연 막걸리를 철철 넘치도록 부어 꿀꺽꿀꺽 마신 뒤 김치 한쪽 쭈욱 찢어 입에 넣곤 곧장 논으로 나가곤 했다. 그 당시 우리 마을 어르신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은 그저 기분 좋게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 아니라 밥이었던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도 막걸리를 참 좋아하셨다. 아니, 막걸리를 소주보다 더 좋아하신 게 아니라 참 자주 드셨다. 그런 까닭에 나와 형제들은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주전자를 들고 마을 들머리에 있는 목로주점에 가서 시원한 막걸리 반 되를 사서 하루 종일 논에서 온몸이 땀범벅이 되도록 일을 하시는 아버지께 갖다드리는 일이었다.

그런 어느 날 하루는 아버지께서 중참으로 드시는 그 막걸리 반 되를 들고 가다가 달착지근한 막걸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주전자 주둥이에 입을 대고 몇 번 쫄쫄 빨아먹고는 아버지께 갖다 드렸다. 그러자 주전자에 든 막걸리를 대접에 따라 붓던 아버지께서는 대뜸 '오늘따라 막걸리가 와 이래 적노? 오다가 좀 엎질렀나?'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씀드릴 수도 없었다. 그저 논두렁에서 투둑 투둑 튀고 있는 메뚜기를 잡는 시늉을 하며 모른 척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막걸리 한 잔을 단숨에 쭈욱 들이킨 아버지께서는 못내 아쉬운 듯 '내일부터는 오늘 갔던 그 집에 가서 막걸리를 받아오지 말고, 길 건너편에 있는 집에 가서 받아 오이라'고 하셨다.

하긴, 중참 때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마시는 그 재미로 고된 농사일을 묵묵히 하시던 아버지께서 오죽 목이 탔으면 그러하셨겠는가. 사실, 나와 형제들도 벼베기를 할 때면 아버지의 농사일을 가끔 거들 때가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 '목이 탈 때는 막걸리 이기 최곤기라'하시며, 쬐끔 부어주시던 그 막걸리 맛은 정말 꿀맛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런 막걸리를 멋도 모르고 입에 댔으니.

▲ 안주를 다 먹어갈 때면 새로운 안주가 자꾸만 나온다
ⓒ 이종찬

▲ 매콤한 풋고추도 막걸리의 맛을 더욱 감칠맛 나게 만든다
ⓒ 이종찬
"인자 음식의 도가 트일 때도 됐다 아입니꺼"

"갈증을 푸는 데는 막걸리만한 것도 없지예. 사이다나 콜라는 마실 때는 시원하고 좋지만 돌아서면 금세 목이 또 탄다 아입니꺼. 그라고 어중간하게 배가 출출할 때에도 막걸리 이거 한 사발 마시고 나모 배가 든든해지지예. 안주도 김치조각이나 풋고추에 된장만 있으면 되고. 사실, 막걸리 이거는 술이 아이라 음식이지예."

지난 8일(토) 오후 5시. 마산의 문화재라 불리는 이선관(53) 시인과 가까운 지인들을 만나 그동안 저마다 살아온 이야기와 요즈음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찾았던 얼음막걸리 전문점 '큰대포'(경남 마산시 창동 부림시장 맞은 편). 이 집에서 30년 동안 막걸리와 가오리찜을 팔고 있다는 이 집 주인 아주머니는 "저희 집 막걸리는 중리에 있는 술도가에서 가져와 냉동실에 넣어 숙성시킨다"고 말한다.

서울이 고향이라는 이 집 아주머니는 "경상도로 시집온 지가 40여 년이 훨씬 넘기 때문에 인자 경상도 아지메가 다 됐다 아입니꺼"라며 빙그시 웃는다. 내가 올해 나이를 묻자 "저는 성도 이름도 나이도 몰라요. 그저 큰대포 아지메라고 부르이소" 한다. 내가 다시 "아지메 음식 솜씨가 그리도 좋다면서요?"하고 묻자 아지메 왈 "30년을 넘게 장사를 했는데 인자 도가 트일 때도 됐다 아입니꺼"하며 주방으로 사라진다.

10평 남짓한 어둑하고도 허름한 실내. 언뜻 보기에는 부림시장 난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목이 마를 때마다 잠시 들러 막걸리 한 사발 쭈욱 들이킨 뒤 김치 한 조각 입에 물고 바삐 나가는 간이 목로주점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실내 곳곳에 관음죽과 난 등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고, 벽에는 각종 문학예술행사 등을 알리는 포스터 등이 붙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그저 예사로운 막걸리집은 아닌 듯하다.

▲ 마산 중리에 있는 슬도가에서 직접 가져온다는 시골막걸리
ⓒ 이종찬

▲ 얼음이 동동 떠있는 막걸리는 그냥 눈으로 보기에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 이종찬
달착지근한 누룩내음과 함께 스며드는 고향의 흙내음

"저희 집에는 단골손님들만 와예. 이 집이 겉보기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주말 저녁만 되면 이 지역에서 활동하는 이선관 시인을 비롯한 작가, 작곡가, 가수, 화가, 춤꾼들이 삼삼오오 몰려오지예. 부산, 서울 등지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문화예술인들도 이 지역에 강의를 하러 왔다가 가끔 들르기도 하고예."

'큰대포집 아지메'에게 얼음막걸리(1통 5천원)를 시키자 이내 커다란 뚝배기에 철철 넘치도록 담긴 얼음막걸리 한 통이 식탁 위에 올려진다.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젖빛 막걸리에서 달착지근한 누룩내음이 코 끝을 맴돈다. 아니, 좀더 자세히 맡아보면 고향의 텃밭에서 호미로 고구마를 캘 때 물씬물씬 풍기던 그 흙내음 같기도 하다.

이어 얼음막걸리 안주로 열무김치, 멸치고추장무침, 말린 산나물무침, 풋고추, 된장, 꽃게된장찌개 등이 잇따라 나온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하얀 접시에 깔끔하게 담긴 밑반찬들이 첫눈에 보기에도 먹음직스럽다. 내가 아지메에게 "밑반찬을 공짜로 이렇게 많이 내면 누가 가오리찜(대 1만5천원, 소 1만원)을 시켜 먹겠느냐"고 하자 "큰대포 아지메가 만든 가오리찜 맛을 본 사람들은 다 알아서 시켜먹어예" 한다.

'이 집 가오리찜이 얼마나 맛있기에'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공짜 안주만 놓고 막걸리를 먹기도 멋쩍은 듯하여 아지메에게 가오리찜 작은 것을 하나 시키며 얼음이 동동 떠다니는 막걸리를 사발에 가득 따라 붓는다. 그리고 그때 논두렁에 앉은 아버지께서 순식간에 쭈욱 들이키던 그 막걸리를 떠올리며 얼음막걸리 한 사발을 쭈욱 들이킨다.

▲ 지난 30여년 동안 만들었다는 맛깔스러운 가오리찜
ⓒ 이종찬

▲ 이 집 가오리찜은 음식이 아니라 예술이다
ⓒ 이종찬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오래 산다

달착지근하면서도 약간 씁쓰레한 맛! 금세 입 속이 얼얼해지면서 가슴 저 밑바닥까지 시원해지는 이 맛을 무슨 맛이라고 해야 할까. 약간 달착지근한 이 맛은 벼를 낫으로 싹뚝싹둑 벨 때 코 끝에 희미하게 맴돌던 그 달콤한 내음 같기도 하다. 약간 씁쓰레한 이 맛은 벼를 벤 논에서 잡은 논고동을 탱자가시로 빼먹을 때 혀끝에 감돌던 그 씁쓰레한 맛 같기도 하다.

입안이 얼얼하도록 시원한 막걸리 속에 든 얼음 맛은 어릴 때 냇가의 얼음을 따다가 양지 쪽에 쪼그리고 앉아 오도독오도독 씹을 때 느껴지는 그런 맛 같기도 하다. 머리 속까지 시원해지는 것만 같은 이 느낌은 땡겨울 꽁꽁 언 미나리꽝에서 스케이트를 타다가 뒤로 꽈당 하고 넘어졌을 그때, 머리칼 깊숙이 파고 들던 그 차갑고도 시린 느낌 같기도 하다.

얼음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숟가락으로 떠먹는 꽃게된장찌개의 시원한 국물맛과 막된장에 푸욱 찍어먹는 맵싸한 풋고추의 맛도 그만이다. 얼음막걸리 한 사발 마시고 틈틈이 집어먹는 잘 익은 열무김치의 깊은 맛과 입속을 향긋하게 파고드는 말린 산나물의 깔끔한 맛도 일품이다. 가끔, 막걸리를 마시면서 이렇게 많은 안주를 집어먹어도 되는가 하는 그런 자괴감도 느껴진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 집 막걸리 안주로는 가오리찜이 으뜸 중의 으뜸이다. 말린 가오리를 포옥 삶아 버섯, 양파, 매운 고추, 마늘, 대파, 고춧가루 등을 넣고 다시 한번 자작하게 볶아내는 가오리찜은 정말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잘 모르는 맛이다. 또한 먹다 남은 가오리찜에 밥을 비며 얼음막걸리 한 사발 곁들여 먹는 그 맛은 기억 속에 오래 오래 지워지지 않는다.

▲ 큰대포집 아지메가 손으로 버무려 직접 담그는 열무김치의 맛도 일품이다
ⓒ 이종찬
"매일 저녁 식사하기 30분 전에 막걸리를 한 사발씩 먹으면 만병이 사라진다고 그래예. 게다가 막걸리는 다른 술에 비해 알콜도수도 낮은 데다 단백질을 비롯한 비타민B 등 사람 몸에 좋은 영양소가 아주 많이 들어 있다고 하거든예. 얼마 전에 TV를 보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오래 사는 사람들 중에는 막걸리를 즐겨 마시는 사람이 많다고 그럽디더."

덧붙이는 글 | ☞가는 길/서울-대진고속도로-진주-남해고속도로-서마산 나들목-부림시장-부림시장 지하도(강남극장 쪽)-'큰대포'(055-223-9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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