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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김혜정 첫 장편소설 <달의 문>
ⓒ 화남
나는 전생에 토끼였다. 사람들은 자신의 전생에 대해 잘 모를 뿐, 그들도 사자나 너구리, 두더쥐, 앵무새 혹은 그 무엇이었다. 전생에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산에서 살았을 때였다. 하루는 숭이랑 설모와 숨바꼭질을 하며 놀고 있었는데 몹시 지쳐 보이는 할아버지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할아버지는 구불구불한 칡덩굴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비틀비틀 걸어오더니 곧 쓰러질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인데 도와줄 수 있겠느냐?"

숭이는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 열매를 따왔고, 설모는 도토리를 주워왔다. 할아버지는 열매와 도토리를 먹고도 기운을 되찾지 못했다. 나는 차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숭이와 설모에게 불을 지피라고 일렀다. 막상 불 속에 뛰어들 것을 생각하니 두려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드디어 나는 눈을 꼭 감고 활활 솟구치는 불길 속으로 몸을 던졌다.

- 13~14쪽, '달의 궁전' 몇 토막


"나는 전생에 토끼였다"로 시작되었다가 다시 토끼로 화하며 끝을 맺는 이 장편소설은 마치 불교에서 말하는 업(業)의 속내를 엿보고 있는 듯하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풀벌레든 그 업에 따라 끝없이 맴돈다는 그 윤회사상 말이다.

토기로 태어난 '나'는 배가 고파 죽어가는 노인을 살리기 위해 불구덩이에 몸을 던진다. 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나'의 몸은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뒤였고, 장례식이 열리고 있다. 그때 그 노인이 홀연이 나타나 "네 마음 씀이 참으로 갸륵하여 소원을 들어줄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그 노인에게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매달린다.

노인은 토끼가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천일 동안 달나라에서 떡방아를 찧어야 한다며, "천 일째 되는 날 달궁에 가서 기다리면 너의 부모님이 올 것이니라"라고 되뇐다. 그날부터 천일 동안 떡방이를 찧은 토끼는 마침내 어느 신혼부부가 첫 관계를 맺을 때 자궁 속으로 들어가 사람으로 환생한다.

"누구에게나 어떤 풍경이든 유년과 학창시절이 있을 터이다. 그리고 그 시절은 어떤 식으로든 기억되고 또 그리움으로 남는다. 저만치 가족들과 따로 앉아 수저를 드는, 폐를 앓는 아버지. 출장 갔다 돌아온 아버지의 구부정한 어깨보다 먼저 보였던 아버지의 손, 그 손에 들린 자석필통. 연탄재 뒹굴던 겨울날의 골목길, 아홉 살 아래인 남동생을 업고 골목에 나서면 노랗게 부서지던 햇살." - '작가의 말' 몇 토막

지난 2002년 9월, 중년 여성의 기억에 남아 있는 아픈 상처를 한 올 한 올 벗겨내면서 삶의 속내를 저울질하는 독특한 문체의 소설집 <바람의 집>을 펴냈던 작가 김혜정(43)이 첫 장편소설 <달의 문>(화남)을 펴냈다.

이 소설은 토끼가 사람으로 환생하는 과정에서부터 조금 독특하다. 토끼가 '윤달'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로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힘겹게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다가 갑자기 다시 토끼로 되돌아간다. 즉, 토끼에서 사람으로 태어나 성장기의 통과의례를 마친 '나'가 다시 처음의 '나'였던 토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상처 입은 기억 그리움으로 기우는 작가
작가 김혜정은 누구인가

▲ 김혜정
ⓒ화남
"사십대 이상 중년 여성의 심리묘사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해 왔던 김혜정이 <달의 문>에서는 한없이 낮게 어린아이들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어린 내면과 함께 호흡한다. 이 소설이 독특한 구조의 성장소설이면서 한편 생기발랄한 교육소설도 되고 있는 것은 작가의 눈높이가 그처럼 낮은 시선을 올곧게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 임영태(소설가)

작가 김혜정은 1962년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1996년 <문화일보>에 단편 '비디오가게 남자'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복어가 배를 부풀리는 까닭은> <바람의 집>이 있으며, 지금 '경기예술고등학교' 교사로 일하고 있다. / 이종찬 기자
작가 김혜정은 "기차가 다니지 않는 철길 옆 만두가게, 외눈박이 다리를 저는 아저씨가 느릿느릿 쪄내던 진빵과 만두. 계란 프라이와 멸치볶음이 담긴 노오란 도시락, 간장이 밴 단무지. 곤두박질 친 성적, 그 성적표가 든 무거운 가방. 밤 새워 썼으나 전하지 못한 편지, 떠나간 사람의 지워지지 않는 얼굴" 등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한다.

김혜정은 "그 모든 것을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이 소설을 쓰는 마음의 배경이 되었을 것"이라고 되뇐다. 아울러 "지금도 빼앗긴 삶의 터전을 되찾기 위해 밤낮없이 일하는 부모님을 기다리며 그림일기를 쓰다 잠드는 아이들도 있고, 세상의 중심에 서지 못한 채 쭈뼛쭈뼛 거리를 방황하는 아이들도 있으며, 입시제도에 찌들어 얼굴이 노랗게 뜬 아이들도 있다"고 덧붙인다.

"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공부는 안 하고 애 데리고 자전거나 타고 있음 어떡해?"
"중고를 사니까 이 모양이지. 수리비가 더 들겠어."
"수리는 무슨 수리, 고장났으면 그만이지."

아빠가 터덜터덜 걸어서 독서실에 갔다. 먹구름이 뒤뚱뒤뚱 아빠 뒤를 따라갔다. 자전거를 고치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내 돼지 저금통을 깨면 될까. 나는 방으로 들어와 저금통을 흔들어 보았다. 돼지야, 미안. 괜찮아. 돼지가 코를 빵빵하게 부풀리며 웃어 주었다.

아빠는 내가 돈을 내밀자 싫다고 했다. 나는 현관까지 따라 나가서 아빠 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었다. 아빠의 얼굴이 빨개졌다. 엄마는 고장 난 자전거 때문에 화가 났는지 어제부터 계속 쀼루퉁해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자 학습지를 세 장이나 하라고 했다. 전화벨이 계속 울리는데도 받지 않았다.

- 48쪽, '달의 궁전' 몇 토막


이 소설은 모두 4부에 32꼭지의 글이 담겨 있다. 제1부 '달의 궁전'에 실린 '토끼,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다' '사람으로 태어나다' '아빠의 자전거' 등 9편, 제2부 '흔들리는 나날'에 실린 '낯선 어둠, 낯선 고요' '돈을 훔치다' 등 7편, 제3부 '아웃사이더'에 실린 '반항의 시간' '비밀의 집' 등 8편, 제4부 '시간의 여정'에 실린 '전생놀이' '엄마의 애인' 등 8편이 그것.

토끼에서 '윤달'이라는 아이로 환생한 주인공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경제적인 이유로 매일 아슬아슬하게 다투는 부모의 싸움을 지켜본다. 그리고 친한 친구 현지가 성추행을 당해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는 서글픈 모습도 보게 된다. 그 뒤 부모가 이혼을 하게 되면서 '달이'는 같은 학교에 다니는 꼬마 철학자 '영우'와 정신적으로 수많은 교감을 한다.

어느덧 중학생이 된 달이는 극심한 사춘기를 겪으면서 영우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한다. 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진종일 갈빗집과 김밥집을 오가며 육체노동에 시달리는 엄마와의 대화 단절에서 오는 마찰과 영우의 갑작스런 죽음은 달이를 정서적 공황에 빠지게 만들고, 마침내 달이는 기나긴 방황의 나날에 접어든다.

"문을 열어주는 엄마의 얼굴이 여느 때와 달랐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몹시 들떠 있었다. 드디어 김밥집을 열게 된 것일까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지만 느낌에 왠지 그것은 아닌 것 같았다.

"달이야, 너……."
"왜 그래?"
"너 예고 갈래?"

기어이 금세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울먹이면서 엄마가 내 손을 잡았다.

"무슨 소리야?"
"음악, 아니 노래하란 말야. 내후년에 시내에 공립 예고가 생긴대. 빨리 레슨을 받자. 내가 알아 봤는데 너 정도면 지금부터 해도 늦지 않대."

- 187~189쪽, '아웃사이더' 몇 토막


이혼을 한 엄마와의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긴 싸움은 마침내 끝이 난다. 엄마가 달이의 음악에의 열정을 인정하고 예고의 진학을 흔쾌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렇게 공립 예고에 들어간 달이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노력한다. 그때 달이에게 또 한 명의 정신적인 동반자, 달이가 '사랑을 다스리는 무지개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준 '송채현'이 나타난다.

채현은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피아노를 아주 잘 치는 학생이다. '고흐의 방'이라 불리는 채현의 방에 놀러간 날, 달이는 그동안 감춰져 있던 채현의 음악적 깊이와 세상에 대한 박식함에 놀란다. 그때부터 달이는 채현과 서로의 슬픔을 함께 하며 몹시 가까워진다. 그러나 엄마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한국을 떠나는 채현으로 인해 달이는 또 한번 정서적 고립과 방황을 겪게 되는데….

"사월 일일, 만우절이자 개교기념일인 오늘은 열여덟 번째 맞는 내 생일이다. 춥고 긴 겨울을 견딜 수 있었던 것도 오늘을 기다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임시 공휴일을 맞아 나는 드디어 그 일을 결행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혼자만의 산행이다. 사실 어젯밤 엄마와 새 아빠, 강이, 동생 완희와 함께 남원까지 차를 타고 왔다. 그러나 그들은 산행은 하지 않고…."

- 263쪽, '시간의 저 편' 몇 토막


<달의 문>은 상처 입은 기억의 강가에서 밤을 새워 하나 둘 낚아올리는 아픈 그리움이자 그 서글픈 기억의 강에 그림자를 드리운 채 잔주름을 또르르 말고 있는 삶의 슬픈 그림자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어른들이 겪은 유년기와 10대가 곧 토끼로 살았던 전생의 기억이며, 그 전생의 기억이 곧 내생의 그림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이 소설의 해설을 쓴 작가 임영태는 "김혜정의 장편소설 <달의 문>은 성장 과정의 다양한 삽화들을 통해 부정과 긍정의 혼란스러운 내면을 유감없이 펼쳐 보임으로써 성장기 통과의례를 애틋하게 형상화해내고 있다"며, "마치 오래 보관해 온 일기라도 훔쳐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편, 오는 5일(수) 오후 6시, 서울 종로구 인사동 '부산식당'(인사동 사거리 쌈지건물 건너편 골목길, 02-733-5761)에서 김혜정 첫 장편소설 <달의 문>과 <평화, 폭력 그리고 문학―한국평화문학 제2집> 출판기념회가 열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의 신문>에도 보냅니다


달의 門

김혜정 지음, 화남출판사(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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