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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가족모임 이강전 대표는 '필리핀 남자랑 사는 한국 여자들은 인내심이 강해야한다'고 말한다. 다름이 아니라 인종주의적 편견 때문이다.
ⓒ 송민성
97년 4월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다. 상대는 서툰 한국어로 누군가를 찾았다. 같은 직장에 외국인 동료가 있어서 그를 찾는가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정확히 한달 후 또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서툰 한국어를 쓰던 그 사람이었다. 이번에는 누구도 찾지않았다. 다만 서툰 한국어로 '나는 외국 사람인데 좋은 친구로 한번 만나면 안되겠느냐'고 제안해왔다. 호기심에 응했던 그 만남이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호기심에 응했던 만남이 삶을 바꾸고

필리핀가족모임(K-P Family)의 이강전 대표는 남편 데이브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리며 웃었다.

"잔뜩 긴장했더라구요. 밥을 먹으면서 어찌나 떨던지. 첫인상이 좋았죠. 착한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만남이 계속되고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함께 가정을 꾸리기로 결심했다. 주변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가족들은 물론 가까운 친구들까지 '어떻게 필리핀 남자와 결혼할 수 있냐' '다시 생각해봐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함께 있고자 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이 깊었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가 처음에는 나 안보겠다고 했어요. 그래도 꾸준히 찾아 뵙고 열심히 살았어요. 그렇게 1년쯤 하니까 어머니가 받아주시대요. 지금은 착하고 성실하게 사니까 예뻐하시죠."

힘이 되어 주었던 사람들, 필리핀가족모임

▲ 이강전 대표와 데이브씨의 아들 다운군은 붙임성이 좋아 '이모' '이모'하며 기자를 따랐다.
ⓒ 송민성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데이브가 불법체류자였기 때문에 혼인 신고는 물론 아이의 출생 신고도 할 수 없었다. 강제출국의 불안감은 항상 이들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99년 5월에 남편이 자진출국을 했어요. 그때 저도 따라갔죠. 필리핀에서 혼인 신고도 해야했으니까."

필리핀에서 혼인 신고를 한 후 함께 한국으로 오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불법체류 전력이 있다보니 비자가 잘 나오지 않았고, 가족이라고 설명해도 필리핀에서 한 혼인 신고는 인정해 주지 않았다.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어 이 대표가 먼저 한국으로 돌아왔다.

기약할 수 없는 기다림이 계속되었다. 데이브가 언제 들어올 수 있을지, 들어올 수 있기나 한 것인지 모든 것이 불투명했다.

"당장 생계를 해결하는 것도 어려웠어요. 아이는 커가고 언제까지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서 일단 아이를 필리핀에 보냈어요. 남편에 이어 아이와도 생이별을 해야했죠."

이때 힘이 되었던 것이 바로 필리핀가족모임이었다. 필리핀 남자와 결혼한 여성들로 이루어진 필리핀가족모임은 이와 같은 가족들이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나누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99년 11월부터 시작되었다.

"다들 비슷비슷한 난관에 부딪히니까 누구보다 서로의 사정을 잘 알아요. 함께 고민을 털어 놓고 다독여 줄 수 있다는 게 무척 힘이 됐죠."

"불법체류가 죽을 죄인가요? 가족이 생이별을 해야할 만큼?"

힘겨운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날 딸의 안타까운 상황을 지켜보던 어머니가 "같이 필리핀에 가자"고 했다.

"아들을 만났는데 나를 못 알아보는 거에요. 한국말도 잊어버린 것 같고. 자식이 알아보지 못할 때 심정은 정말 겪어본 사람만이 알 거예요."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혼자 가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남편과 아이가 같이 가야만 했다. 그 길로 어머니와 함께 집을 나서 9시간만에 대사관에 도착했다.

"들어가니까 영사관이 우릴 보더니 그냥 지나쳐버리는 거야. 얼마나 황당해요. 사람이 왔는데."

더욱 황당한 것은 쓰레기통에 처박혀 있는 서류 뭉치였다. 남편의 입국에 필요하다고 해서 이 대표가 1년에 걸쳐 보냈던 여러 가지 서류들과 데이브의 입국 허용을 요청하는 탄원서, 편지들이 포장도 뜯기지 않은 채 버려져 있었다.

"영사관에게 사정을 얘기했더니 불법체류 전력이 있어 못 보내 준다잖아요. 왜 불법체류를 했는데, 한국에서 안 받아주니까 그런 거잖아요. 불법체류를 했다손치더라도 그게 그렇게 죽을 죄인가요? 가족이 생이별을 해야 할 만큼? 아무리 우리가 힘든 길을 택했다고 하더라도 나라가 짐을 덜어주지는 못할 망정 더 큰 짐을 지워줘야 되겠냐구요?"

그러자 영사관은 선심쓰듯 1개월 관광비자를 발급해 주겠다고 했고 이 대표는 단번에 거절했다.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가족이 무슨 관광비자를 받아요. 그랬더니 3개월 방문비자를 다시 주더군요."

한국은 아직도 인종주의적 편견이 강한 나라

▲ 이 대표의 꿈은 소박하다. 세 식구가 세상의 편견에 굴하지 않고 행복하게 사는 것. 갈 길은 멀지만 이 대표는 희망을 잃지않는다고 했다.
ⓒ 송민성
그렇게 해서 이 대표의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와 함께 살게 되었다. 같이 살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지만 그 행복을 이어가자면 필수적인 것이 또 돈이었다. 그러나 방문비자로 들어온 데이브는 취업을 할 수 없었고 세 식구의 생계를 이 대표 혼자 책임져야 했다.

비슷한 문제로 힘겨워하던 필리핀가족모임은 이러한 방문비자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슈화하기 시작했다. 여러 인권단체, 외국인노동자단체들과 함께 노력한 결과 2002년 취업비자가 허용되었다.

"물론 그것도 한계가 있어요. 제조업에서만 일할 수 있고 근로계약서와 사업자등록증을 첨부해야 기한 연장이 되거든요. 그런데 회사에서는 근로계약서나 사업자등록증 같은 거 잘 안 주려 하구요."

그래도 그 덕분에 데이브는 현재 군포에서 사출일을 하고 있다. 하루에 12시간씩 휴일도 없이 일하지만 그가 받는 임금은 한국인보다 적다.

우린 힘없는 소수이지만...

요즘 이 대표는 곧 초등학생이 될 아이에 대한 걱정이 크다.

"아이들이 크면서 생김새가 이국적으로 변하거든요. 얼굴이 까매지고 쌍꺼풀이 진해지고. 우리 모임의 한 여자아이는 반 아이들이 하도 놀려대서 '차라리 설거지하는 데 보내 달라'고 한대요. 그런 얘기 들으면 마음 아프죠."

그는 "그래서 필리핀 남자와 같이 사는 한국 여자들은 인내심이 강해야한다"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한국은 아직도 인종주의적 편견이 강한 나라잖아요. 문화는 저마다 다른 건데 손으로 밥 먹는 더러운 사람들이라고 욕하고. 남편이 필리핀 사람이라고 하면 곧바로 '먹고 살기 힘들겠네'하며 무시하는 식이죠."

지난 6일에 참가한 무지개포럼에서 기지촌 아이들의 어려움을 전해듣고 유난히 마음이 아팠던 것도 '그들 역시 우리 아이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기지촌 아이들도 여러 가지 편견 때문에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무척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도 우리 아이들은 아빠 엄마가 있으니까 더 낫다고 해야 할까요?"

이 대표는 이번 필리핀가족모임에서는 기지촌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볼 생각에 벌서 마음이 부풀어있다.

"우린 힘없는 소수지만 그래도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거에요. 힘을 모으다보면 또 나아지는 게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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