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김홍신 <한 잎의 사랑>
ⓒ 문학세계사
가을을 누가 만들었나요
한 여인이 낙엽 되어
가지끝 삭풍을 맞고 있는데
왜 가을에 떨어뜨리나요

겨울이 오면 눈덮인 묘등에서
샛노란 프리지아 꽃이 필 수 있겠지요
그대 영혼은 바로 그 향기니까요

담쟁이 잎새가 그대 가슴마냥
불꽃이 되는데
자고 일어나면 우수수 떨어지네요
한 잎을 실로 묶어 놓고
그대의 이름을 새기지요

마지막 잎새 하나 매달리듯 겨울 나고
봄마중 나가 새순이 된다면
그때 온세상은 프리지아 향내가 날 텐데요

밤새 붉은 달님 닮은 잎새 앞에
촛불을 켜두렵니다

-20~21쪽, '한 잎의 사랑' 모두


지난 3월, 김홍신은 오랫동안 천식을 앓고 있었던 아내 이화영(50)씨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큰 슬픔을 겪었다. 그때 김홍신은 열린우리당 소속으로 우리나라 정치 1번지라 불리는 종로에 출마, 한창 선거운동을 벌이고 있는 때였다. 당시 각 언론사에서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홍신의 당선은 확실해 보였다.

총선 당일에도 각 방송사가 발표한 출구조사에서 김홍신은 한나라당 박진 후보를 6~8%포인트 정도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개표 초반부터 숨가쁘게 엎치락뒤치락하던 표차는 개표 결과 안타깝게도 김홍신에게 결국 500여표 차이의 낙선이라는 뼈아픈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그때 김홍신은 낙선의 변에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깨끗하고 아름답게 선거를 치렀기에 기쁘다"며 "많은 분들과 함께 즐거운 축제를 즐겼기에 행복하다"고 말했다. 과연 김홍신다운 말이다. 아니, 어쩌면 힘든 정치를 그만두기를 바랐던 사별한 아내의 간절한 바람이 그를 낙선으로 이끈 것인지도 잘 모르겠다.

"햇살 고운 날이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습니다./ 가슴에 '자유인'이란 이름표 하나 달고/ 느긋하게 숨도 천천히 쉬면서 말입니다./ 잠자리 한 마리가 콧등에 앉아 잠들만큼 말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을 태울 수만 있다면/ 그래서 굳어가는 내 열정을 말랑거리게 할 수 있다면/ 한 줌 재가 될 때까지/ 사랑벼락 한번 되게 맞고 싶습니다./ 사랑천둥 소리도요." -'시인의 말' 몇 토막

<인간시장>의 작가이자 15대, 16대 국회의원으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김홍신(57)이 첫 시집 <한 잎의 사랑>(문학세계사)을 펴냈다.

사별한 아내를 그리는 지독한 사랑으로 가득한 이번 시집은 '사랑은 무죄', '천년의 사랑', '겨울 찻집', 멈추지 않는 사랑', '사랑의 속살', '하얗게 떠난 당신', '살아남은 자의 고독', '미쳐버린 그리움', '허수아비 하나', '보시', '묘비명'을 포함 모두 4부에 62편의 시가 아내를 향한 안타까운 손사레질처럼 실려 있다.

근데, 왜 하필이면 김홍신은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준 소설을 저만치 내버려두고, 밥도 되지 않고, 권력도 되지 않는 시를 쓰기 시작했을까. 아내를 잃어버리고, 국회의원 배지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시가 보이기 시작했을까. 아니, 시만이 아내가 떠난 빈 자리를 채워줄 수 있다고 믿었던 탓일까.

그는 '시인의 말'에서 "허기진 내 영혼을 무엇으로든 채우고 싶었지요"라고 나직하게 고백한다. 이어 "마르고 말라 갈라터진 목마름의 실체는 알 길이 없고, 그래서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막상 시를 쓰다보니 "내 영혼의 푸념거리가 이리 많은 줄 미처 몰랐습니다"라고 속삭인다.

사랑받는 세포는 암도 이겨낸다 하니
이제 우리가 할 일이라곤
사랑하는 일뿐

-13쪽, '우리 할 일' 모두


그랬다. 시인의 아내는 그가 17대 총선에 출마하기 전부터 천식으로 비롯된 각종 합병증에 시달리며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시인이 17대 총선에 출마한다고 하자 그의 아내는 입 속에 호스를 넣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말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끄덕인 뒤 고개를 돌린 채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사실, 시인의 아내는 그가 정치를 그만두고 작가의 자리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국회의원이라는 신분 하나 때문에 말 토씨 하나 행동 하나까지도 샅샅이 드러나는, 그 때문에 여러 가지 이해관계에 얽힌 사람들로부터 온갖 협박과 비난을 받아야 하는 남편의 그런 자리가 무척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그러한 고통의 자리가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생명 있는 소중한 것들에 대한 더 큰 사랑이라고 믿는다. 그런 더 큰 사랑이 없다면 생명 있는 소중한 것들을 갉아먹는 암덩어리와 같은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된다고
아니된다고
오진일 거라고
오진일 거라고
하늘 무너진 자리에 서서
통곡
오열
원망
분노
기도
애절한 외침

그대 따라 가려오 그대 따라 가려오
그대 떠난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겠소
빈 껍데기로 살아서 무엇하리오
가려거든 날 데려가오
저승동무 나밖에 더 있겠소

-16~17쪽, '빈 껍데기로 살아서' 모두


시인은 아내가 이제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결과를 듣고 온몸으로 통곡한다. "아니된다고/ 오진일 거라고/ 하늘 무너진 자리에 서서" 오열하는 시인은 차라리 아내를 따라 이승을 떠나 저승길 동무라도 되고 싶다. 아내 없이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의 모든 삶은 그저 빈 껍데기로 보일 뿐이다.

작가 김홍신은 누구인가?
지난 3월, 사랑하는 아내 잃어

▲ 작가 김홍신
ⓒ문학세계사
"이 시집을 관통하고 있는 것은 외형적으로는 죽은 아내에 대한 회한이며, 그리움이며, 그 어떤 몸부림으로도 다시는 불러올 수 없는 완성되지 않은 사랑이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한 여인에 대한 사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주적 교감의 상태에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소중함이라는 커다란 깨달음으로 나아간다."- 하재봉(시인) '해설' 몇 토막

작가 김홍신은 1947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1976년 <현대문학>에 소설 '물살'이 추천 완료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해방영장> <인간시장> <바람바람바람>을 펴냈으며, 소설집으로는 <무죄증명> <수녀와 늑대>, 꽁트집으로 <도둑과 도둑님> <제법 노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당 홍보위원장과 대변인을 맡았으며, 제15대ㆍ16대 국회위원에 당선된 뒤 여러 언론사에서 평가한 국회의정활동 1위로 뽑히기도 했다. 제12회 <한국소설문학상>, 제6회 <소설문학작품상> 받음. / 이종찬 기자
그래서 시인은 더욱 몸부림친다. "그대가 살아난다면/ 그대 살아 있는 동안/ 푸줏간의 고깃덩어리처럼/ 매달린 채/ 거꾸로 세상을 살아도 그만"이라고. 아니, "살아온 만큼만 살게 해달라/ 비는 게 아니다/ 그저 평균수명만큼만/ 재잘거리며 살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세상 모든 과학과 의사와 병원을 조롱할 수 있는 기적은 있다"('작은 기도 하나')라며 스스로를 달랜다.

여기서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참뜻은 아내에 대한 지극한 사랑, 아내를 살리고자 하는 처절한 몸부림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시인은 그런 아내를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잘못된 것, 올곧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틀리고 구부러진 것들에 대한 통곡과 오열과 원망과 분노와 기도와 애절한 외침을 토해내고 있는 것이다.

네가 떠난 뒤
그리움에 북받쳐
네가 세상에 없는 줄 알면서
그냥 걸어봤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입니다"

그래 너 없는 세상
난 어쩌란 말이냐

-'지금 거신 전화는' 모두


시인의 아내는 시인의 그런 간절한 바람과 절규에도 불구하고 "그저 기도나 해주세요// 마지막 유언은/ 울음 삼킨 소리/ 애써 담담한 척 높낮이 없는 저음"을 남긴 채 시인과 두 아이를 남겨둔 채 훌쩍 이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때 시인은 체념한다. "차라리 먼저 가는 자가 행복하나니/ 뒤따르는 자를 누가 슬퍼하겠느냐"('내 가슴 속 신화')라며.

하지만 체념도 어느 한순간뿐,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은 "누르고 눌러도/ 오장육부를 뒤틀며" 자꾸만 치밀어 오른다. 그 그리움은 "목구멍까지 차올라/ 숨만 쉬어도 토할 수밖에 없는 미친 사랑"이다. 그 그리움은 "거머리 속 뒤집듯/ 토하고 토해 쏟은/ 미친 사랑의 흔적"이기도 하고 "바싹 타버린 심장 반 줌/ 재가 되어버린 영혼 반 줌"('그리움')이기도 하다.

그렇게 사무친 그리움에 몸을 떨던 시인은 어느날 문득 "그대 떠난 게 아니다/ 육신은 떠났지만/ 영혼은 내 심장에 붙어 있다"고 깨닫는다. 그리고 "천국엔/ 그대 육신과/ 내 영혼이 있고// 지상엔 그대 영혼과/ 내 육신이 있다"며 "죽은 이와 살아 있는 자의 사랑"('천국의 사랑, 지상의 사랑')을 꿈꾼다.

내게 참을 수 없는 사랑이 있어요
하늘 무너져도 그대 있는 곳이면
땅끝까지 쉬지 않고 달려갈 거요

가다가다 못 가면 멈춘 자리에
쓰러져 내 비석을 세울래요
사랑을 헤매다가 선 채로 죽었노라

훗날 누군가 비석 보고 말하겠죠
사람답게 살다 갔노라

-119~120쪽, '묘비명' 몇 토막


아내에 대한 못 다한 사랑을 몸과 영혼을 분리시킨 천국의 사랑과 지상의 사랑으로 승화시킨 시인은 마침내 그 사랑을 이 세상에 대한 보다 더 큰 사랑으로 바꿔놓는다. 그 사랑은 "영혼을 불태워 잿더미 만들/ 목 쉬게 부를 비밀"이며 "몸짓으로 몸짓으로 갈구하는/ 열정"('묘비명')이자 "그대 앞에/ 부끄럽게 바치는/ 붉은 열매 하나"('사랑 4')이다.

김홍신의 첫 번째 시집 <한 잎의 사랑>을 궤뚫고 있는 것은 사별한 아내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다. 그 사랑은 때때로 시인의 몸을 내려치는 죽비가 되기도 하고, 마음 가장자리에 늘 켜져 있는 촛불이 되어 이 세상의 어둔 바다를 밝히는 사랑의 이정표가 되기도 한다. "사랑받는 세포는 암도 이겨낸다"(우리 할 일)고 했듯이.

한 잎의 사랑

김홍신 지음, 문학세계사(2004)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